메뉴 건너뛰기

close

민족민주화성회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학교 학생들
▲ 1980년 5월 15일 민족민주화성회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학교 학생들
ⓒ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관련사진보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하면서 유신체제의 국가 파시즘은 막을 내렸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정보부 안가에서 파티 중에 피살되었고, 이로써 유신의 심장은 멈추었다. 그곳은 10년 전 어용학자들이 3선개헌을 모의하던 건물이었다.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봄 같지 않은 봄이었다. 많은 국민과 민주인사들의 바람과 달리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은 유신잔당들에 휘둘렸다. 재야 세력과 일부 정치인들은 1979년 11월 24일에 명동 YWCA에서 '통일주체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열어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을 반대했다. 신민당도 과도정부의 정치 일정에 반발했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청와대 경호실, 보안사, 수경사, 특전단 등 수도권의 핵심 요직에서 독재자의 비호 아래 세력을 키워 온 하나회 출신의 정치군인들이 1979년 12월 12일에 하극상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했다. 짙은 먹구름이 서울의 하늘을 뒤덮었다.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던 강만길은 다산연구회 팀들과 함께 시국을 걱정했다. 서서히 밀려오는 검은 파고를 내다보면서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1980년 5월 15일 발표된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는 강만길 등 양심적인 현직 교수 134명이 참여했다.

우리들 뜻을 같이하는 134명 일동은 민주 발전에 대한 과도정부의 모호한 태도, 더욱 심화되어 가는 경제 위기, 그리고 민주화와 생존의 권리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격화되고 있는 학생과 근로자들의 항의 시위에 대해 강압책으로 맞서고 있는 당국의 무능무책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주석 1)

이렇게 시작된 '시국선언'은 '1. 비상계엄령 즉각 해제, 2. 최규하 과도정부는 평화적 정권 이양 시기를 금년 안으로 단축, 3.학문의 연구와 발표 자유 보장, 족벌재단·교수 재임용제 폐지, 4.언론의 독립과 자유 보장·해직기자전원복직, 5.노동기본권 보장과 대기업 편중의 지원정책 폐기, 6.민주인사들에 대한 석방·복권·복직, 7.국군의 정치적 중립과 한 사람이 국군보안사령 보직과 중앙정보부장직 겸직은 불법이므로 시정할 것' 등의 내용을 담았다.

강만길은 이 시국선언 발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신 시기 해직 교수들을 위한 서명운동에 몸을 사렸던 교수들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정희 시대'가 끝나고 '서울의 봄'이 온 후 <교육민주화선언> 때는 별로 애쓰지 않고도 고대 교수 50명 이상의 서명을 쉽게 받을 수 있었으며, 소문을 듣고 자진해서 내 연구실로 찾아와서 서명하는 교수들도 있었다. 새삼 지식인들의 '현명한' 처세술을 생각하게 됐지만, 그 지식인들이 민족사회 및 인류사회의 내일을 이끌 젊은이들의 교육을 담당할 주체임을 생각하면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석 2)

유신체제에서 권력의 단맛에 취한 전두환 등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에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의 뒤를 잇는 군부 쿠데타였다. 이와 함께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날조하여 김대중, 문익환, 여춘호, 이해동, 함세웅, 고은 등 재야 인사들을 구속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전두환 신군부는 권력을 유지하는 데 저해 요인이라 판단한 정치인과 재야인사 그리고 학계의 명망 있는 교수들을 골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날조했다. 여기에 강만길도 엮었다.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 등이 빌미가 되었다. 전국 계엄 확대 조치에 강만길은 먼저 몸을 피했다. 며칠 뒤 집에 전화를 거니 아무 일도 없다고 해 안심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괜한 고생을 했다고 생각하며 일주일 만에 집에 들어가서 겨우 속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었더니 건장한 사내 셋이 들어오면서 "그동안 어디가 있었습니까. 일주일이나 집 앞에서 잠복하느라 애먹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순간 피하라고 권한 대학동창의 정보가 정확한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연행되어 간 곳은 성북경찰서 유치장이었다. 들어가서 얼마 후 같은 대학 같은 학과의 이상신 교수가 잡혀 왔고, 뒷날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연극원 원장을 지냈지만 그때는 어느 대학교의 대학원생이었던 황지우 씨하고 또 많은 대학생들이 잡혀 왔다. (주석 3)

취조실로 끌려간 그는 김대중으로부터 고려대 학생들을 선동할 자금으로 얼마를 받았느냐며 사실대로 불라고 추궁했다. 김대중을 만난 사실도 없고 그 집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며 사실대로 말했으나 이미 각본이 짜인 상태에서 그의 진술은 의미가 없었다.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10만 원인가를 받았노라 했더니 액수가 적다면서 다시 고문을 가하기에 결국 계속 불어나니 학생 선동 자금을 150만 원까지 올라갔다." (주석 4)
강만길과 재야 인사들을 억지로 엮은 김대중 사건은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조작한 사건이었다.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유치하기 그지없는 진술조서와 혹독한 고문이 계속되는 한 달여 동안 광주에서는 살인마들의 무참한 시민 학살이 벌어졌다. 그리고 시민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짓밟고 시위를 진압하면서 날조한 사건의 조연급은 풀어주었다. 강만길도 한 달여 만에 석방되었다.

경찰서 유치장 생활 한 달 동안에 광주항쟁이 진압되고 전두환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게 되자 고등학교 교사 동거인들과 나는 바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어떤 일인지 이상신 교수와 황지우 씨를 포함한 학생들은 서대문구치소까지 이송된 후에야 석방되었다. 석방되면서 이상신 교수를 서대문까지 보내는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국민교육헌장 반대 사건으로 중앙정보부 남산 취조실 구경을 잠깐 해 봤지만, 저 무작스러웠던 군사정권 아래서 한 달 동안이나 갇혀 있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가족들의 고생도 많았고, 동료 교수들에게도 걱정을 끼쳤는데, 나와서 보니 지식인 134인의 선언에 동참했던 교수 등은 거의 다 검거되어 며칠씩은 고생을 했다. (주석 5)

주석
1> <암흑 속의 횃불(4)>,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 1997.
2> <역사가의 시간>, 236쪽.
3> 위의 책, 245쪽.
4> 위의 책, 149쪽.
5> 위의 책, 25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강만길평전, #강만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