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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사업소에서 도장은 어렵고 힘든 작업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도장 작업은 나의 기준이 아니라 고객의 만족도에 따라서 완성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죠. 정비 작업은 수리하거나 교환을 해서 기능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답이 나오지만, 도장 작업은 고객의 미세한 시선 차이에 따라서 만족도가 천차만별이에요. 특히 조색(페인트 조합에서 색깔을 맞추는 작업)은 정답이 없어요. 그만큼 작업자의 축적된 기술력이 있어야 가능하죠."
 
대화를 하는 동안 밝은 얼굴로 지난 날을 말했다.
▲ 창원서비스센터 제해홍 직장 대화를 하는 동안 밝은 얼굴로 지난 날을 말했다.
ⓒ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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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된 차량, 그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문밖을 나갈 수 없다

한국지엠 창원서비스센터에 수리를 위해 입고되는 차량 중 단순한 부품교환이 아니고서야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문밖을 나갈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바디, 도어, 펜더, 앞뒤 범퍼에 조그마한 손상이 발생했을 때는 그의 손길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지난 8일, 한국지엠 창원공장과 인접해 있는 서비스센터에서 33년 차 도장 작업 베테랑인 제해홍 직장을 만났다. 1967년생인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배운다는 자세로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는 1992년 1월에 창원정비로 입사해서 지금까지 33년째 한곳에서만 근무하고 있어요. 처음 입사할 때는 사무직 노동자를 포함해서 70여 명이 함께 일했는데 지금은 57명이 근무를 하고 있어요. 앞으로 3년 동안 10명이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사업소가 지금보다 더 축소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파손된 범펄를 수리하기 위해서 샌딩 작업을 하고 있다.
▲ 제해홍 직장 파손된 범펄를 수리하기 위해서 샌딩 작업을 하고 있다.
ⓒ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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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을 몇 년 앞둔 그는 후배들의 미래를 먼저 걱정했다. 대화를 이어가며 지나온 소소한 삶을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장인·장모에게 정을 느끼다

"경남 고성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어려서부터 집안이 풍족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살아온 삶은 부자가 되지 못했지만, 내 집도 장만하고, 장가도 가고, 두 아들까지 뒀으니 자수성가했다고 봐야지요. 아버지는 결혼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입사 후 큰 아이를 낳았는데 딱 한 번 안아보고 돌아가셨어요."

일찍 이별한 부모님 얘기에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경상도 사나이가 애써 그리움을 감추는 뜻한 느낌이었다.

"친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런지 처가의 장인·장모님이 부모님 같았어요. 고맙게도 맞벌이하던 저희 부부를 대신해서 장모님이 두 아이를 많이 보살펴 줬습니다. 지금도 장모님이 생존해 계시기에 시간이 될 때마다 자주 찾아뵈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직장 후배에게 도장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 제해홍 직장 직장 후배에게 도장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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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리움과 감사함을 잊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가족 얘기가 나온 김에 결혼하기까지 에피소드를 듣고 싶었다.

이웃사촌, 타국살이, 이별, 전화카드로 결혼에 골인하다

"제가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자취를 했는데요. 바로 옆집에 지금의 아내가 살았어요. 그 당시 아내는 일본 자본의 유명한 전자제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몇 번 안면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제가 마음먹고 고성 고향 집에 가자고 했어요. 그때 같이 가서 깨를 심고 왔어요. 표현은 안 했지만 제가 마음에 들어놔 봤어요. 그리고 만남이 계속됐어요."

"그러다가 제가 1991년도에 대우국민차 직업훈련원에 들어가게 됐고, 6개월간 일본 스즈키 자동차로 연수를 가게 됐어요. 그때가 25살이었는데. 전화카드 구입비로 월급을 거의 다 썼어요. 다음 해 1월에 귀국해서 4월에 결혼을 하게 됐어요. 전화카드가 아니었으면 결혼에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해홍 직장은 결혼까지의 성공 이야기를 흑백 TV를 보듯 구성지게 꺼내 놓았다. 이어 그에게 자녀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첫째 아들은 폴리텍대학을 나와서 여수에 석유화학 회사에 다니며 결혼까지 시켰어요. 첫째는 이제 한시름 놓았습니다. 둘째는 대학에서 컴퓨터 응용가공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옆에 있는 도장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청소 일을 하고 있어요. 정규직과 분리돼서 일하면서 힘들만도 한데 내색 않고 잘 다니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직장에서 고된 노동을 내색하지 않고 이겨내고 있는 자식 얘기를 꺼낼 때 어느 부모가 안쓰럽지 않겠는가? 그도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아들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부모의 미안함이 느껴졌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회사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물었다.

"1995년 28살 때 러시아 로스토프에 2개월간 파견을 나간 적이 있었어요. 그 당시 러시아에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자동차를 반조립 상태로 포장해서 수출했어요. 그런데 기차로 이동 중에 외부의 손상이 많이 발생했어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국에 있는 정비사업소에서 3명이 선발돼서 파견을 나갔지요."

"그곳의 추위는 대단했어요. 추운 날씨에 현지에서 조달한 시너와 페인트가 한국에서 사용하는 거랑 달라서 애를 많이 먹었어요. 도장 부스도 없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깜짝 놀란 게 러시아 사람들은 파손된 차를 수리하는데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천천히 하더라고요. 진짜 놀랐습니다."

  
분무기로 섬세하게 페인트를 칠하고 있다.
▲ 제해홍 직장 분무기로 섬세하게 페인트를 칠하고 있다.
ⓒ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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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3년간 살아온 삶을 점수로 평가한다면 스스로 몇 점을 주고 싶냐고 질문했다.

"저는 80점 이상은 주고 싶어요. 입사해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일들은 다 해본 것 같아요. 산악회 20년, 산악자전거, 스킨스쿠버, 암벽등반, 마라톤, 헬스 등 지금도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으니까요.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누구의 큰 도움도 없었지만, 무난하게 결점이 없이 살았고, 아내를 만나 안정적인 가정도 이뤘으니 이 정도면 80점 이상은 줘도 된다고 생각해요."

대화하는 동안 군살 없는 근육질 몸매에서 그동안 얼마나 꾸준히 좋아하는 운동을 섭렵해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33년 차 베테랑 도장 노동자로서 삶을 후회하지 않는지 물었다.

나는야, 온기와 손길로 원상회복 시키는 공예 예술 노동자

"저는 제 직업을 잘 선택했다고 믿습니다. 제 손으로 거칠어진 바디 표면에 샌딩 작업을 하고, 퍼티를 입히고, 또다시 샌딩 작업을 한 후, 적정온도 30℃ 이상 도장 부스에서, 보호장비를 착용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분사기로 칠을 마친 후 다시 새롭게 탄생한 자동차를 볼 때, 그 기분은 도장 노동자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은 모릅니다."

"고객에게 마지막으로 수리가 완료된 차량을 인도할 때, 고객이 활짝 웃으면서 잘 해줘서 고맙다는 그 말 한마디를 들을 때, 이 직업을 참 잘 선택했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저는 도장 작업은 사람의 손길과 온기로 창조하는 공예 작품이며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분야에서 33년째 이상 한길을 걷는다는 게 요즘 시대에 바보 같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는 매일매일 유해 화학물질이 포함된 미세먼지, 공구의 소음, 늘 상 노출되는 열기, 땀으로 얼룩진 작업복, 고객과의 감정노동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비하하지 않았다. 늘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며, 아버지로의 소임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도장 노동자인 제해홍 직장에게 박수를 보낸다.

태그:#한국지엠, #창원정비, #제해홍, #도장, #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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