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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추도사업을 벌이는 호센카(봉선화) 회원들의 자료관 모습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추도사업을 벌이는 호센카(봉선화) 회원들의 자료관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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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말 필자의 도쿄 여행을 안내한 기무라 선생님의 안내로 40년 이상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는 니시자키씨를 만났다.

나가사키에서 온 기무라씨도 필자도 추모비가 있는 위치를 몰라 주민들에게 묻고 또 물어 찾아간 곳은 도쿄에서 지바현으로 연결되는 '구요쯔기바시' 다리가 있는 '아라카와' 강변에 위치한 조그만 주택가 골목이다.

강물 범람을 막기 위해 쌓은 커다란 제방 아래 있는 조그만 비석 앞에는 누군가 헌화한 꽃과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높이 1미터쯤 되어 보이는 검은색 비석에는 '도(悼)'란 글자가 씌어있었다. '도(悼)'란 '슬퍼하다'란 뜻이다.

추도비 사진을 찍고 있는데 '호센카(봉선화)' 자료관에 있던 '니시자키'씨가 문을 열고 나와 추도비에 대한 설명과 함께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자료사진을 보여주며 진상규명을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조선인들이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로 학살 시작돼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 '간토(關東)' 지역 일대에는 리히터 지진계로 7.9의 강진이 지역 일대를 급습했다. 목조 주택이 대부분인 각 가정에서 점심을 준비하던 시간이었다.

지진은 순식간에 도시를 강타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격심해졌다. 도시를 기습한 지진은 흔적만 남은 거리 위에 연기로 피어올랐다. 곧이어 '불이야!'라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거리는 아수라장이 됐다. 때마침 피워 놓은 가정과 마을 음식점의 풍로와 아궁이의 불씨가 화재 발생의 원인이었다.

화재는 곧바로 거대한 불기둥을 이뤘고 불꽃은 다시 불길을 낳아 56군데나 되는 불무더기가 도쿄를 덮쳐 나갔다. 거대한 불길과 하늘로 치솟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에 놀란 일본인들이 헌병의 감시하에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에 놀란 일본인들이 헌병의 감시하에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다.
ⓒ 니시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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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을 학살한 자경단원들 모습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을 학살한 자경단원들 모습
ⓒ 니시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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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돌연 '조선인이 방화했다'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재산을 잃은 사람들에게 유언비어는 강렬한 자극이 됐다.

관동대지진 당시 '스미다구'에서도 혼죠지역을 중심으로 대화재가 발생해 아라카와(荒川) 강변에는 피난 나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유언비어에 분노한 군인들은 기관총으로 조선인을 총살하였으며 경찰, 자경단도 살해 행위에 가담했다.

조선인을 식별하는 가장 쉽고 널리 사용된 방법은 일본어였다. 의심이 가는 사람에게 '기미가요'를 부르게 하거나 '15엔 50전' 같은 조선인에게는 어려운 발음을 시켰다. <독립신문>에서는 이 당시 조선인 6661명이 희생됐다고 보도했다.

'구요쯔기 다리' 주변 조선인 학살 증언록에는 처참했던 당시의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지금 아라카와역(현 야히로역) 남쪽에 '온천지'라는 큰 연못이 있었어요. 헤엄도 칠 수 있는 연못이었구요. 쫒겨난 조선인 7~8명이 거기에 뛰어들었는데 자경단이 총을 가지고 쐈단 말이에요. 그쪽에 가면 그쪽에서, 이쪽에 오면 이쪽에서 쏘고 결국 죽여 버렸습니다."
 
또 다른 증언 내용이다.
 
"아라카와역 남쪽 언덕에 데려온 조선인을 강에 향하도록 나란히 놓고 병사가 기관총으로 쏴죽였습니다. 쏘이면 굴러 떨어지는 거에요. 근데 안 굴러간 사람도 있었죠. 꽤나 죽였어요. 저는 구멍을 파라고 지시당했어요. 그 후에 석유를 뿌리고 태워 묻었어요. 잘 태워지지도 않은 채, 거기에다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도 같이 묻은 거에요. 싫었어요. 가끔 무서운 꿈을 꿨어요."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한 한 초등학교 교사의 노력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아라카와 방수로 개설의 역사를 조사하던 초등학교 교사가 그 지역의 노인들로부터 관동대지진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당시 희생자에 헌화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사와 추도를 주변에 호소했다.
  
니시자키씨가 아라카와 방수로 개설 역사를 조사하던 초등학교 교사 사진을 보여줬다. 그녀의 노력으로 아라카와 강변에서 학살당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하고추도하는 모임이 시작됐다.
 니시자키씨가 아라카와 방수로 개설 역사를 조사하던 초등학교 교사 사진을 보여줬다. 그녀의 노력으로 아라카와 강변에서 학살당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하고추도하는 모임이 시작됐다.
ⓒ 니시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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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이 나던 해 11월자 신문 기사에 의하면 헌병 경찰의 경계하에 강변 희생자의 주검을 적어도 두 차례에 걸쳐 파내어 어디론가 운반하였으나 희생자 유골의 행방은 조사할 수가 없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여 유골도 무덤도 없이 진상을 규명하지도 공적 책임을 묻지도 못한 채 101년이 흘렀다. 
     
1923년 11월 15일자 <국민신문> 모습으로 아라카와 언덕에 묻혀져 있던 카메이도 사건 희생자와 조선인 희생자 유골을 경찰들이 몰래  발굴해 사라졌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923년 11월 15일자 <국민신문> 모습으로 아라카와 언덕에 묻혀져 있던 카메이도 사건 희생자와 조선인 희생자 유골을 경찰들이 몰래 발굴해 사라졌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나사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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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1월 14일자 <호치신문> 기사 모습으로 아라카와 언덕에 묻혀있던 카메이도 사건 희생자 유골을 경찰들이 몰래 발굴해 사라졌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923년 11월 14일자 <호치신문> 기사 모습으로 아라카와 언덕에 묻혀있던 카메이도 사건 희생자 유골을 경찰들이 몰래 발굴해 사라졌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니시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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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모임인 '호센카(봉선화)' 회원들이 나섰다. 그들은 2009년 9월에 추도비를 세우고 매년 9월초 토요일 오후면 사건이 일어난 아라카와 하천 부지에서 추도식을 연다. 호센카 회원들이 추도비에 새긴 내용이다.

"희생자들을 추도하고 역사를 반성하여 민족의 차이로 배척한 마음들을 일깨워 새기고자 한다. 여러 민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본 사회의 창조를 염원하며 여러 민간인들이 이 비를 세운다."

호센카(봉선화)의 내력은?
 

니시자키씨가 생면부지의 조선인들을 위한 활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대학 4학년 시절이다. 1982년 아라카와 강변에 묻혀있는 조선인 희생자 유골을 발굴해보자는 선배의 제안을 듣고 참여하면서 부터다. 중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다 퇴직한 그는 '호센카(봉선화)' 회원들과 함께 진상규명과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며 모금을 마련했고 회비 내는 회원이 500명 정도라고 한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단체인 '호센카(봉선화)' 그룹 일원인 니시자키(오른쪽)씨가 학살이 일어났던 아라카와 강변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속 조선인은 강건너로 대피했으나 자경단에 쫒겨 도망쳐 간신히 살아났다고 한다. 나가사키에서 온 기무라씨(왼쪽)는 원폭희생자 마을인 합천에서 한달간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고 사비를 들여 징용당했던 조선인 유골 반환운동을 하는 양심적 지식인이다. 태백산맥을 두번이나 읽은 지한파 지식인이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단체인 '호센카(봉선화)' 그룹 일원인 니시자키(오른쪽)씨가 학살이 일어났던 아라카와 강변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속 조선인은 강건너로 대피했으나 자경단에 쫒겨 도망쳐 간신히 살아났다고 한다. 나가사키에서 온 기무라씨(왼쪽)는 원폭희생자 마을인 합천에서 한달간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고 사비를 들여 징용당했던 조선인 유골 반환운동을 하는 양심적 지식인이다. 태백산맥을 두번이나 읽은 지한파 지식인이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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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유골 발굴 사진을 들고있는 니시자키씨 모습.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유골 발굴 사진을 들고있는 니시자키씨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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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비 옆에는 봉선화가 심어져 있었다. 아직 제철이 아니어서인지 꽃이 피지 않았지만 홍난파가 작곡하고 김형준이 작사한 가곡 <봉선화>가 마음을 아프게했다. 관동대학살이 일어나고 두 해가 지났을 무렵 시인 김형준이 친구 홍난파가 1920년에 만든 바이올린 곡 <애수>를 듣고 시를 썼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가곡이 바로 <봉선화>이다. 가곡 <봉선화>는 우리 민족에게 조국을 잃은 슬픔이 진하게 배어있는 노래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 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가운데 유일한 묘비가 있는 구학영의 묘비


기무라 선생님을 따라 도쿄를 출발해 몇 차례나 전철을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사이타마현. 기무라 선생님한테 "저녁이 가까운 시간인데 왜 이렇게 멀리까지 나를 데리고 갑니까?"하고 묻자 대답이 돌아왔다.

"관동대지진 당시 6천 명이 넘는 조선인 희생자 중에 유일하게 묘비가 있는 사람이 구학영입니다. 당시 28세의 구학영은 사이타마현에서 엿장수로 살다가 희생됐어요. 구학영씨는 마을 주민인 미야자와 기쿠지로와 우정을 나누고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끝내 희생됐대요. 기왕 도쿄까지 왔으니 묘비를 봐야하지 않겠어요?"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엿장수 구학영' 씨 묘비가 있는 사이타마현 쇼수인 공동묘지 모습.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조선인 중 유일한 묘비가 있는 곳이다.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엿장수 구학영' 씨 묘비가 있는 사이타마현 쇼수인 공동묘지 모습.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조선인 중 유일한 묘비가 있는 곳이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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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시골역 앞에 있는 '쇼수인(正壽院)'은 마을 사람들도 위치를 잘 모르는 공동묘지였다. 다행히 '쇼수원'의 위치를 아는 분의 도움을 받아 묘비들을 한참 뒤지다 찾아낸 곳에는 '조선인 학살의 진실규명을 멈추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널빤지가 세워져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학살에 가장 많이 관여한 것은 자경단이라며 국가 책임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나마 구씨의 유해를 수습한 기쿠지로와 그를 지키려던 경찰서장 그리고 묘비를 만들어준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노력으로 묘비가 보존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관동대지진당시조선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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