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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책 표지
▲ . 스토너 책 표지
ⓒ 알에이치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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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창에 '존 윌리엄스'라는 작가 이름을 입력했다. 그의 소설 <스토너>를 읽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나서 좀 더 폭넓은 이해를 위해 작가의 생애를 찾아보며 독서를 마무리하곤 한다. 

그런데 이번엔 동명의 미국인 작곡가만 나올 뿐 저자의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서점들에서 올려놓은 간략한 작가 소개가 그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의 전부였다. 그 역시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인 윌리엄 스토너처럼 어느 정도 인정받기는 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한 삶을 살다 간 것은 아닐까.

윌리엄 스토너는 1891년 미주리 주 중부의 한마을에 있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척박한 땅을 일궈 얻은 미미한 소출로 먹고사는 부모 밑에서 그의 삶도 그렇게 흘러갈 줄 알았으나, 군청의 공무원이 아버지에게 아들의 농과대학 진학을 권유하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기회를 얻게 된다.

4년의 학업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을 예정이었지만, 2학년이 되어 영문학 개론 수업에서 들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한 편이 그의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꿔 놓았다. 영문학과 사랑에 빠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학업을 계속해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의 모교인 미주리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근무하게 된다.

어려운 환경에서 이뤄낸 결실이라 주인공 앞에 탄탄대로의 삶이 펼쳐지길 바랐지만 그의 인생은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예쁜 딸도 낳았지만 결혼생활은 불행했고, 불안정한 아내로 인해 딸까지 고통받는 삶을 살게 된다. 대학에서 동료와 갈등을 겪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고, 평생 정교수가 되지 못한 채 조교수에 머물다 암에 걸려 사망한다. 생명이 약동하는 초여름에 홀로 방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스토너의 손에 들린 건 그가 썼던 단 한 권의 책이었다.

책을 덮은 뒤 멍해진 이유 

책을 덮고 나서 잠시 멍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화나 문학작품을 보다 보면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되어 고생 끝에 낙이 오길 바라는 마음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독자의 기대를 외면한다. 역경과 불행이 해소되지 않고 세월의 물결에 뒤죽박죽이 된 채 쓸려가는 한 인물의 삶을 세밀하게 보여줄 뿐이다.

학자로서 명성을 얻지 못했고, 사후에도 깊이 추모하거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던 그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세속적인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고 해서 '실패'라고 단정 짓기엔 어쩐지 망설여진다.

문득 전도연 배우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인어공주>가 떠올랐다. 돈밖에 모르는 억척스러운 때밀이 엄마와 아내에게 매일 구박받는 착한 아빠를 보며 일상에 환멸을 느끼던 주인공은 집을 나가버린 아빠를 찾아 부모의 고향인 섬마을을 방문한다. 거기서 그녀가 만난 건 놀랍게도 스무 살의 엄마인 해녀 '연순'이었다.

풋풋하고 상큼한 젊은 시절의 엄마는 당시 우체부였던 아빠를 짝사랑하고 있었고, 그런 부모의 젊은 날을 지켜보던 주인공은 그들의 로맨스를 돕기로 한다. 삶에 찌든 엄마와 아빠에게도 아름답게 빛나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걸 깨달으며 마음을 열고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딸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 냈던 그 영화가 책 속의 문장 위로 오버랩되었다.
 
"엄마와 제가...... 우리 둘 다 아버지를 실망시켰죠?" (중략) 클레어몬트의 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이디스가 보였다. 파란 드레스와 가느다란 손가락과 부드럽게 미소 짓던 하얗고 섬세한 얼굴. 그리고 매 순간이 달콤하고 놀랍다는 듯 열성을 띠던 연한 푸른색 눈. "네 어머니는......" 그가 말했다. "네 어머니가 항상 그렇지는......" 그녀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 속에서 한때 소녀였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 <스토너>, 본문 중에서

그레이스는 가끔 동네 아이들과 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와 함께 커다란 서재에 앉아 아버지가 채점하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모습을 지켜볼 때가 많았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말을 걸면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찌나 조용하고 진지한 대화였는지, 윌리엄 스토너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부드러움에 감동했다. (중략) 그러면서 자기 눈앞에서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을 놀라움과 사랑의 눈길로 지켜보았다. - <스토너>, 본문 중에서


영문학 개론 강의실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오래 전의 문학작품과 교감하던 마법 같은 순간, 사랑의 설렘으로 가득했던 젊은 날, 아이와 눈 맞춤을 하며 미소 짓던 따스하고 충만한 오후. 그런 빛나는 순간이 그의 삶에도 있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는 불행했고 실패한 삶이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평생 따랐고 그 과정에서 짧지만 충만한 시간을 보냈기에 후회 없이 행복하지 않았을까.

누리기보다는 견뎠고
떠나지 않은 채 남았으며
물리치는 대신 물러나지 않았던,
모퉁이를 돌 때마다 되뇌는
평범하고도 오래된 그 이름,
윌리엄 스토너
- <스토너> 발문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그저 수용하는 자세로 견디며 소박한 생을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인물은 아닐지라도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했던 그의 태도가 성공지향적인 세상에서 피로감에 젖은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일깨워주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평범하지만 비범했고, 불행했지만 행복했던 스토너의 삶을 보며 마음속 가득히 퍼져나가는 위로를 느꼈다.

중년기에 접어든 후, 꿈꿔왔던 미래와 다른 현실을 보며 '앞으로의 내 삶은 지금 이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감에 휩싸일 때가 있다. 어릴 적 가슴에 품었던 화려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군중 속의 한 명으로 특색 없이 살아가는 내 모습이 성에 차지 않기에 드는 감정이겠지. 이 책은 그런 내 삶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대부분은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 삶에서 무엇을 이뤘는지 보다 어떻게 살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이 소설을 읽으며 좀 더 힘을 내서 인생을 헤쳐갈 마음이 생겼다. 묵묵하게 생의 무게를 견디며 오늘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 <스토너>가 위로와 용기를 주리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릴 수 있습니다.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알에이치코리아(RHK)(2015)


태그:#스토너, #존윌리엄스, #삶의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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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와 책 리뷰를 적는 브런치 작가입니다. 다정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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