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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한 사회가 혁명적 변화에 맞닥뜨리면, 신구 세력 간 쟁투는 그 균형이 깨질 때까지 계속된다. 변곡점이다. 과정에서 무수한 작용과 반작용이 반복된다. 매우 격렬한 혼란과 충돌, 파괴와 몰락, 폭력과 희생이 뒤따른다. 이 지점에 놓인 어느 사회든, 경중은 있을지언정 과정 없이 지나간 건 거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동학혁명 1차 봉기는 급격한 변화를 맞아들이는 필연의 과정으로 바라봐야 한다. 수백 년 동안 억압당하던 민중이, 썩을 만큼 썩어버린 구체제와 침략적 외세를 향해 처음으로 총구를 겨누었기 때문이다.
 
갑오년 3월 20일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공음면 구암리 구수내)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다.
▲ 무장 기포지 갑오년 3월 20일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공음면 구암리 구수내)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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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전쟁을 염두에 둔 무장봉기다. 역사와 민중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도 중요했겠지만, 무엇보다 혁명전쟁의 승리가 관건이다. 따라서 백성의 지지가 절대적이다.

다음이 무기다. 서구열강이 근대화 명분으로 침략적 자본주의를 밀어붙이는 힘과 배경엔 막강한 화력이 있었다. 그들이 넓혀가는 식민지 쟁탈전 한복판에 조선이 놓여있었다. 따라서 패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혁명군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일어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만일의 패배는 그다음 짊어져야 할 역사의 무게다. 그렇더라도 강요된 굴욕과 굴종에 떨쳐 일어나 싸워보지조차 않는다면, 이는 역사에 너무 큰 죄를 짓는 것 아니겠는가?

혁명 그 뒤까지 내다본 창의문

손화중이 기반을 다진 무장현은 여러 측면에서 재봉기에 무척 적합한 곳이었다. 서부 전라도 한복판의 군사 요충지이며, 고부를 압박하기 좋은 제반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 또한 선운사 석불 비결 사건 영향으로 농민군 규모나 사기도 다른 어느 곳보다 월등하다.
 
고창군 무장면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는, 낮은 산이 둘러싼 분지형 지형으로 국도 22호선 변에 자리한다.
▲ 동학혁명 기포지 고창군 무장면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는, 낮은 산이 둘러싼 분지형 지형으로 국도 22호선 변에 자리한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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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여 혁명군이 출정한 곳은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다. 갑오년 3월 20일이다. 조그만 언덕이 둘러싼 분지형 들판에 농민군이 꽉 들어찬 풍경을 상상해 본다. 바람에 휘날리는 수많은 깃발이 장관이다. 각 고을 깃발 아래 농민군이 오와 열을 맞춰 정연하게 서 있다. 황토물들인 두건을 쓰고 같은 길이의 죽창을 들었다. 조총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부대는 당장에라도 한양으로 진군할 태세다.

혁명 포고 의식이 엄숙히 거행된다. 여러 필 말에 탄 지도부의 권위가 한껏 드높다. 대장기를 앞세운 전봉준이 단에 오른다. 창의문이 펼쳐진다. 호남 창의소 총대장인 전봉준의 낭독이 우렁차다. 농투성이들이 명실상부 혁명군으로 거듭나는 의식이다. 수많은 구경꾼까지 몰려들어 언뜻 보기엔 엄청난 규모의 군대처럼 보인다.
 
'창의문'
세상에서 사람을 귀하다 함은 인륜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륜의 가장 큰 자라 …(중략)… 학정이 날로 자라고 원성이 그치지 아니하여 군신부자 상하 구분이 무너지고 말았다. …(중략)… 허다한 세금으로 걷은 재물이 국고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권력을 가진 자가 제 배를 채우고 만 것이며 국가에는 쌓이고 쌓인 채무가 있어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중략)…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수령과 권력 도배의 탐학에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하고 흩어지면 국가는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대의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만 제 몸만을 생각하여 나라 재산만 축내는 게 어찌 옳은 일이랴. …(중략)… 금일의 광경에 놀라지 말고 나라가 태평하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함께 살아 보기를 바라노라.
-갑오년 삼월 이십일, 호남 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98~200 의역 인용)
  
1894년 3월 20일 무장 구암리 구수내에서 전봉준이 낭독한 창의문.
▲ 무장 포고문(원본) 1894년 3월 20일 무장 구암리 구수내에서 전봉준이 낭독한 창의문.
ⓒ 고창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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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갑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후 들고일어선 봉기가 이용태에게 처절하게 능멸당했다. 이를 딛고 한양을 쓸어 임금의 목을 벨 기세로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창의문은 한참 맥 빠지는 소리뿐이다. 분명 깊이 고민이 있었을 터이다.

창의문에 그 흔적이 엿보인다. 조선 사회 주류세력을 끌어안으려는 노력이다. 이들을 적으로 삼고선 성공을 담보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인지한 글이다. 전략적으로 멀리 혁명 후까지를 보고 있다.

혁명군은 천천히 움직였다, 왜냐면 

의식을 치른 후, 고부를 향해 진군한다.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무장과 고창, 줄포를 점령한다. 그 길에 군사와 무기를 모으고 줄포 조운창을 부숴 군량을 확보한다.

고부는 하루거리였으나, 혁명군은 작정한 듯 천천히 움직인다. 민심을 다독이고, 봉기 소식이 널리 퍼져 동조 세력을 규합하기 위함이다. 이용태는 도망칠 게 뻔하다. 불필요한 전투는 가급 피해야 한다. 아울러 고부 옥에 갇힌 사람들의 안전도 도모해야 한다.
 
무장에서 고부 가는 길에 동학농민군이 넘었다는 굴치에서 본 풍경. 사진 가운데 산이 흥덕 관아, 좌측이 고부 두승산이고 우측이 정읍이다.
▲ 고부 가는 길 무장에서 고부 가는 길에 동학농민군이 넘었다는 굴치에서 본 풍경. 사진 가운데 산이 흥덕 관아, 좌측이 고부 두승산이고 우측이 정읍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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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혁명군이 '동도대장(東徒大將)' 깃발을 앞세워 고부에 입성한다. 정연한 행군행렬이 5리가 넘었다고 전한다. 위용도 엄정하다. 며칠 전까지 장흥 역졸들에게 험한 고초를 겪던 고부 백성들에게,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군대처럼 보인다. 온 고을이 회한으로 눈물범벅이다. 피해를 치유하는 게 최우선이다. 불에 타 집 없는 백성에게 우선 식량을 나누어 준다.

그제에서야 살벌하고 지옥 같던 고을이, 가난하나 평화롭던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탐관오리의 수탈이 없는, 같이 사는 세상이 당장에라도 손에 잡힐 듯하다. 총을 들고 맞서 싸워야겠다는 핏발서는 의기가, 온몸에 감각으로 전해온다.

전봉준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망을 다시 제시한다. 군사를 일으켜 전주와 서울을 점령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절절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틀 후 백산에서 동학혁명군의 대의를 천하에 선포하겠다고 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혁명전쟁에 들어선다고 설파한다.

동학혁명의 상징이 된 이 말

3월 25일, 당일 아침부터 백산에 흰옷 입은 농민이 모여든다. 간단한 봇짐에 짚신을 꿰고 황토물들인 두건에 죽창 들고 오는 사람, 숨겨두었던 화승총을 메고 오는 사람, 무기가 될 만한 병장기라면 무엇이건 들고 오는 사람으로 백산 가는 길과 나루터가 온통 북적인다. 모인 숫자가 8천에 육박한다. 북쪽의 태인, 금구, 원평, 김제, 전주 방면과 남쪽으론 정읍, 고창, 흥덕, 무장, 부안, 영광 등에서 온 농민이다.

대회는 혁명을 결행하자는 의식이다. 이는 죽고 사는 전쟁이 전제다. 창의소가 짊어져야 할 현실의 무게다. 백산 대회를 통해 혁명군 지휘체계를 명확히 한다. 상명하복의 수직 체계가 아닌 수평적 연대다. 모든 사안은 협의를 통해서 결정된다. 각 부대 통솔권은 해당 지역 대표가 갖는다.
 
1894년 3월 25일 백산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혁명전쟁에 들어 선다. 1만여 군사가 모여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는 동학혁명 상징적 문구가 여기서 만들어 진다.
▲ 동학혁명백산창의비 1894년 3월 25일 백산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혁명전쟁에 들어 선다. 1만여 군사가 모여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는 동학혁명 상징적 문구가 여기서 만들어 진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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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문을 지어 만천하에 포고한다. 아울러 4대 명의와 농민군이 지켜야 할 12대 명의를 제시한다. 의군으로서 지켜야 할 행동강령이다.
 
읍내에서 주둔한 3일 후 대군을 몰아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군대 체계를 재구성하면서 모두의 바람대로 전봉준이 대장, 손화중과 김개남이 총관령, 김덕명과 오시영이 총참모가 되었다. 최경선이 영솔장에 송희옥과 정백현 등이 비서가 되었으며 대장기에는 보국안민(輔國安民) 4자를 큰 글자로 쓰고 거듭하여 격문을 지어 사방에 전하였다.

격문: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자 함이라. 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 밑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감사와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갑오 삼월, 호남 창의 대장소 재 백산

동학군이 고부를 함락한 후 백산에 진을 치고 거듭 격문을 발표한 후, 호남 일대는 물론이고 조선 강산이 고부 백산을 중심으로 흔들렸다. …(중략)… 모여드는 자가 수천에 달해, 백산은 인산인해로 수만 군중이 둘러싸고 있어 정말 백산이란 지명으로 울렸다.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라는 비결이 맞았다고 한다. 죽창을 든 수만 군사만으로 앉으면 죽산이 된다고 하였다. (앞의 책. p202~209 의역 인용)
 
결기 충만한 격문이다. 모든 이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한다. 그 울림은 지금까지 살아있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은 동학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아울러 '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고자 함이다'라는 문장은 '반봉건 반외세'라는 동학혁명의 핵심을 명쾌하게 규정하고 있다.
 
사람 人 모양으로 형상화한, 긴 행렬이 연상되는 동학혁명 조형물. 황토현 기념관 안에 옛 것을 철거하고 새로 세웠다.
▲ 동학혁명 조형물 사람 人 모양으로 형상화한, 긴 행렬이 연상되는 동학혁명 조형물. 황토현 기념관 안에 옛 것을 철거하고 새로 세웠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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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이 올랐다, 혁명전쟁이다. 무엇을 부수고 무엇을 바꿔낼 것인가? 혁명군 창끝이 향하는 모든 지점이 목표물이다. 낡고 썩어빠진 모든 것이다.

태그:#무장기포, #백산대회, #앉으면죽산서면백산, #무장창의문, #백산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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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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