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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오봉산에서 진안 마이산 조망
 임실 오봉산에서 진안 마이산 조망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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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의 연분홍 은은한 색채가 산새의 지저귐과 어울리는 4월 초순에 임실 오봉산에 올랐다. 임실 성수면 오봉저수지의 상류에서 왕방계곡으로 향하면 개울가 암벽에 자리 잡은 돈학정(遯壑亭)이 나타난다. 이 정자 앞 교량을 건너 오른쪽으로 열린 임도를 2.0km 올라가면 임실 오봉산 등산로 안내판이 기다린다.

임도 옆 양지쪽 덤불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인기척에 지레 놀랐는지, 껑충 뛰어올라 날렵한 뒷모습을 보이며 시야에서 금세 사라졌다. 경사가 제법 급한 가파른 계단과 평탄한 숲길로 이어진 0.54km의 짧은 거리를 솔숲 내음 상쾌한 산바람을 맞으며 오봉산 정상에 도달했다. 멀리 가까이 첩첩산중에 마이산이 두 봉우리의 귀를 쫑긋하여 바로 눈에 띈다.

장수 팔공산 아래 마령제 부근에서 천황지맥, 영대지맥과 성수지맥이 분기한다. 영대지맥은 영대산(666m), 오봉산(625m), 칠봉산(524m)과 덕재산(483m)의 산줄기로 이어지는데, 영대지맥은 동쪽으로 흘러가는 천황지맥과 양팔을 벌린 듯이 두 산줄기 사이의 오수분지를 감싸 안았다. 
 
백제 시대 거사물현 위치의 오수분지
 백제 시대 거사물현 위치의 오수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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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오수분지는 아늑하였다. 남원의 교룡산이 조망의 좌표를 잡아주고, 분지의 중심에 성산(城山)이 둥두렷이 우뚝하다. 성산에는 거령산성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백제 멸망 후 3년 동안 백제 부흥군과 유민들이 신라에 항전하였던 당찬 지역이었고, 이후에 신라는 지방 정예 군대를 이 지역에 주둔시켜 거사물정(居斯勿停, 청웅)이라고 하였다. 

이 지역의 출중한 인물로 고려 시대 문신 이능간(李凌幹, ?~1357)이 있다. 그는 1320(충숙왕 7년)년에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수천km 밖의 티베트로 유배시킬 때 왕을 호위하였다. 1326년에는 원나라가 고려 조정을 없애고 원나라의 직할 성(省)으로 격하하려 시도하자, 원 황제에게 주청하여 이를 중지시켰다. 그는 훗날 사림(士林)으로부터 면좌당(免左堂)이라고 칭송받았다. 보은설화의 대표 격인 오수개 설화도 이 지역의 당찬 기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오봉산 정상에서 잘 조망되는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마한 시대 이전부터 당차고 자주성이 강한 세력의 튼실한 터전이었는데, 시대에 따라 백제 거사물현, 통일신라 청웅현, 고려 거령현으로 독립적 행정 구역이었고, 조선 시대에는 남원부의 북쪽 지역이었다. 현재는 이 지역이 남원시 보절면 사매면과 덕과면, 장수군 산서면, 임실군 오수면 지사면으로 나뉘었다.
 
임실 오봉산 계곡 족도리풀 꽃 (꽃 지름 2~3cm)
 임실 오봉산 계곡 족도리풀 꽃 (꽃 지름 2~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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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을 내려오는 길에 맑은 계곡은 야생화 미소가 가득했다. 쥐방울덩굴과의 족도리풀이 지면에서 꽃봉오리를 내밀고 솟아올라 개화하기 시작하였다. 꽃 지름이 2~3cm인 이 꽃의 꽃말은 모녀의 정이다. 석죽과의 큰개별꽃 꽃 지름 6~8mm의 작은 꽃을 하얗게 피웠는데, 은하수라는 꽃말처럼 계곡의 여울물 소리에 잘 어울리는 꽃 자태이다. 

오봉산 등산의 출발점인 돈학정은 개울을 건너서 재실 한 채와 마주하고 있다. 돈학정은 조선 전기의 충신인 송경원(宋慶元, 1419~1510)이 은둔했던 정자이고, 재실은 그를 모신 사당이다. 송경원의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호는 돈학((遯壑)인데 세상을 은둔한 산골짜기를 의미한다.

그는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로 재직하던 1457년(세조 3)에 단종이 영월에 유폐되자 영월로 달려가 통곡하였으며, 단종이 사사 되자 계룡산에서 2년간 상복을 입고 지냈다. 그리고 그는 임실 백이산에 은거하여 돈학정(遯壑亭)을 짓고 평생을 숨어 살며 충절을 지켰다. 

돈학 선생이 백이산에 숨어 살 때 자주 산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개울가에 앉아서 큰 소리로 슬프게 노래하기도 했다. 선생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나뭇꾼들은 미친 늙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돈학정(遯壑亭)은 원래 임실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창건하였는데, 1939년에 후손들이 현재 위치로 옮겼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돌너와를 지붕에 얹었는데, 10여 년 전에 강판 기와로 교체하였다. 
  
임실 오봉산 계곡 큰개별꽃 (꽃 지름 6~8mm)
 임실 오봉산 계곡 큰개별꽃 (꽃 지름 6~8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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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학 선생 재실의 왼쪽, 오른쪽과 뒤쪽 담장 50여m가 요즘 보기 힘든 돌너와 얹은 돌담이어서 이채로왔다. 이곳 돌너와는 점판암(粘板岩)으로 한쪽으로만 결이 있어 슬레이트처럼 얇은 돌판이다. 이 지역 왕방계곡은 예로부터 우리 전통 난방 시설의 중심 재료인 구들돌의 생산지였다. 왕방계곡에서 생산된 구들돌은 전라선 철도 오류역으로 운반되어 전국으로 팔려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서는 가옥이나 정자의 지붕에도 기와 대신에 토산품(土山品)인 돌너와를 많이 얹었었다. 

이곳 재실의 돌담은 높이가 1m이고, 두께는 60cm 정도이다. 돌담은 20~30cm 크기의 호박돌을 사이를 띄우고 그 사이에 점토를 채워서 두겹으로 튼튼하게 쌓아올렸다. 돌담의 마루는 길이 30cm, 너비 20cm와 두께 4cm 크기 돌너와를 표준으로 크고 작은 돌너와를 아귀를 맞추어 비가 새지 않게 층층히 쌓아 덮었다. 돌너와 얹은 돌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돈학 선생의 굳은 절의가 아직도 의연히 느껴지는 듯하다. 돌담이 하늘을 가린 돌너와를 모자처럼 쓰고 수백년 풍상을 견디고 있다. 

지역 주민 한 분이 이 돌너와 얹은 돌담이 철거될 거라고 말했다. 이 돌담이 허물어져 미관이 안 좋기도 하고, 때때로 보수하려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이곳 왕방마을의 마을 모정(정자)도 돌너와 지붕이었는데 관리가 어려워서, 10년 전에 돌너와 지붕을 내리고 기와로 교체했다고 한다. 돌너와 지붕 건축물 형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사라져 가는 추세이다. 

이곳 재실의 돌너와 돌담은 지역 향토성이 강한 재료를 활용한 전통 건출물이 남아 있다는 의미도 크고, 돈학 선생의 충절과 삶의 태도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문화적 자신이다. 임실 오봉산 탐사를 마치면서, 돌너와 얹은 돌담이 들려주는 돈학 선생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임실 왕방리 송씨 재실의 돌너와 돌담
 임실 왕방리 송씨 재실의 돌너와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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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임실오봉산, #임실왕방리돌너와돌담, #임실돈학정, #임실돈학송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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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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