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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도 때론 소용돌이치고, 장애물을 만나면 순간 역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바다로 나아간다. 이게 순리다. 민중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강줄기에 민중이 늘 올바른 선택만 하는 건 아니다.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반동의 흐름을 보이며 역사를 거스르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의 진보를 추동하는 힘 역시 민중이 결정한다.

고부 봉기가 해산하고, 백산을 떠나는 전봉준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절망했을까, 아니면 더욱 결의를 다졌을까? 봉기 해산은 역사의 길과는 정반대였다. 분명 흐름을 거슬렀다.
 
동진강에서 바라 본 백산. 고부 봉기 지휘소가 있던 이곳에서 전봉준은 봉기 해산을 맞는다.
▲ 백산 동진강에서 바라 본 백산. 고부 봉기 지휘소가 있던 이곳에서 전봉준은 봉기 해산을 맞는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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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묻지 않겠다'는 말에 안심하였건 신임 군수의 유화 제스처에 현혹되었건, 그건 분명 반동의 길이었다. 다가오는 농사철에 대한 압박감이 한몫했다 하더라도, 군수 목을 베어 전주성을 점령하고 한양 권력을 뒤엎어 버리자던 애당초 결의에 비하면 너무도 허망한 해산이었다.

하지만 이마저 민중의 뜻이다. 한번 흩어진 군중을 다시 뭉치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라야 하는지, 봉기 해산 후 백성들은 뼈저리게 실감한다. 살을 에는 아픔으로 닥쳐온 고부 땅의 참상. 나라는 대체로 그러했으며, 관리라는 작자들은 허가받은 도둑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봉기군의 해산

군수로 임명된 박원명은, 당시 왕후 민씨 세력의 찌꺼기는 아닌 듯 보였다. 쥐새끼 같은 다른 수령들과도 달랐다. 보수의 가치인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의 안위를 도모하는 게 관리의 도리라 생각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박원명은 방을 붙여, 봉기 관련한 모든 죄를 없는 것으로 하겠다고 밝힌다. 이게 무서운 효력을 발휘하여, 민심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봉기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던 중산층과 유학자가 여론을 주도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한다.

위선적인 먹물 근성이 흔들어댄 민심이다. 박원명은 연이어 3월 1일 위안 잔치를 열 것이니 개의치 말고 참여하라 한다. 그의 이런 유화 제스처에, 봉기군에서 이탈하는 숫자가 자꾸만 늘어난다.
 
대뫼마을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 담벽에 그려진 박홍규 화백의 고부 봉기.
▲ 고부 봉기 대뫼마을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 담벽에 그려진 박홍규 화백의 고부 봉기.
ⓒ 이영천(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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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명이 잔치에 참여해 백성과 술과 음식을 나눈다. 이틀 후에는 따로 봉기군에서 이탈한 사람을 위로하는 잔치를 연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봉기군이 순식간에 와해돼 버린다. 임시방편적 유화 조치가, 신념이 취약한 봉기군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셈이다.

고부군(구 지명, 현 정읍시·고창군) 백성에겐 경계를 넘어 반란을 일으킬 의지가 아직 부족했다. 새 세상을 열어야겠다는 신념도 약했고, 두 달여 간 봉기에 대한 피로감도 쌓였다. 무엇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농사철이 봉기군 와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기회주의자의 등장

한편, 안핵사(조선 후기 지방 사건처리를 위한 임시직 정부 관리)로 임명된 이용태는 보름 가까이 장흥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다 박원명이 고부에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졸 800명을 이끌고 고부 가까운 입암 천원역에 웅크리고 있었다. 봉기군이 해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졸을 몰아 점령군처럼 고부에 들어온 그가 저지른 악행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이용태는 봉기군이건 아니건, 남자라면 무조건 잡아들였다. 남자 그림자도 찾을 수 없게 된 마을에 이제 역졸(역노비)들이 도둑으로 변한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집마다 들이닥쳐, 돈이 될 만한 물건과 재물을 빼앗고 훔쳐 간다. 그다음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한다. 무력과 완력에 무기력하게 당한 고부는 동네마다 난리가 났고, 통곡으로 날이 새고 밤을 보냈다.

이용태라는 끔찍한 악마의 숨결이 온 고을을 할퀴고 난도질하며 겁탈했다. 봉기군으로 나간 남자가 없으면, 대신 여자를 묶어 관아로 끌어갔다. 마을마다 불을 질러 고부가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인근 태인과 정읍, 흥덕까지 휩쓸고 다니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일대 백성은 물론 부자와 유학자까지 끌끌 혀를 찰 지경이었다.
 
고부 관아 터인 고부초등학교 입구에 세워진 옛 관내도 지도.
▲ 고부 관내도 고부 관아 터인 고부초등학교 입구에 세워진 옛 관내도 지도.
ⓒ 이영천(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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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 감옥에 수천 명 늙고 힘없는 노인과 아녀자가 갇혔다. 고부 봉기는 이렇게 한고비를 넘어가고 있었다. 들엔 보리가 푸르렀고 산에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꽃 대궐을 이루던 그 화창한 시절, 고부는 삭풍에 해 기우는 스산한 겨울이었다. 백성을 위무하지는 못할망정 재물을 빼앗고 죽이며 겁탈하는 나라. 백성들은 군대를 해산시키지 말고 싸움을 넓혀야 한다던 전봉준의 말을 실감했다.

현 상황을 최대한 보전하면서 백성을 설득해 체제 안으로 흡수하여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보수주의자 박원명.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봉기군이 무서워 숨어있다가 해산하자 점령군처럼 들어와 도적질과 약탈, 겁탈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기회주의자 이용태.

2024년은 어떠한가?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부나방처럼 만연한 기회주의와 수구가 판치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이용태'들이 보수를 참칭, 득세하는 작금 현실은.

무장(茂長)에서의 논의... 다시금 혁명을 준비하다

당시 봉기 불길은 사그라들었고, 손화중은 망설인다. 이 싸움을 혁명으로 끌고 가고 싶은 전봉준과 김개남의 긴 설득이 이어진다. 민중의 분노가 힘이다. 이 분노가 손화중을 움직인다. 이용태의 무지막지한 만행에 그도 마침내 결단한다. 민중의 의기투합이며 혁명의 결행이다.
 
손화중 동학 도소가 차려져 있던 무장현 괴치리 괴치 마을의 현 모습.
▲ 괴치리 손화중 도소 손화중 동학 도소가 차려져 있던 무장현 괴치리 괴치 마을의 현 모습.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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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숙고한다. 우선 혁명을 이끌 권위를 세워야 한다. 썩은 세상을 상대로 민중 스스로 세우는 권위다.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스스럼없이 따를 힘이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수평적이어야 한다. 평등이라는 동학 교리에 충실하면서, 당시의 근본 모순인 계급 질곡을 깨뜨린다는 뜻을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라도 전체가 동시에 들고일어나야만 길이 열린다고 보았다. 이런 힘을 모을 필요성으로 '호남 창의소'라는 형식과 권위를 갖추게 된다. 창의소에 모든 혁명 역량과 대의를 집중시키기로 한다. 각 포와 접이 거느린 조직이 혁명군의 근간이다. 총대장은 전봉준이, 손화중과 김개남은 각각 거느린 군대의 대장을 맡기로 한다. 세상을 뒤엎는 첫걸음이다.

보리 낱알이 굵어 가고 못자리를 만들어 모내기를 준비하여야 하는 시절이다. 1년 중 가장 힘들고 바쁜 계절이다. 배곯는 보릿고개다. 먹을 게 없어 막 피기 시작하는 나물이나 소나무 껍질을 파먹는, 빼빼 말라가는 시절이다. 이런 즈음에 군사를 모을 것이라는 통문이 돌았다.
 
동학혁명 기포는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공음면 구암리 구수내)에서 이뤄진다. 무장현은 조선 후기 고부군과 함께 전라도의 주요 군현 중 하나였다.
▲ 무장 읍성 동학혁명 기포는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공음면 구암리 구수내)에서 이뤄진다. 무장현은 조선 후기 고부군과 함께 전라도의 주요 군현 중 하나였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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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흩어진 고부 남정네들은 허기진 창자를 붙잡고 어서 봉기 깃발이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용태에 대한 적개심이 활활 타올랐지만, 무엇보다 배고픔을 참기가 힘들었다. 봉기 때 고봉으로 먹었던 쌀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굶어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니, 이용태를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았을 것이다.

농민군을 모아

보리가 고개 숙일 즈음 슬픈 배고픔이 전라도 골골을 휩쓸고 있었다. 굶주림과 복수심에 불타던 백성에게 가뭄 속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3월 11일, 드디어 깃발이 오른다. 최경선과 김덕명이 원평에 임시 지휘소를 차리고 군사를 모은다는 전갈이다.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두건 색깔과 죽창 길이까지 제시한 통문이, 이어질 싸움의 승리를 담보하는 느낌이다. 굵어 가는 보리알만큼이나 다가올 싸움에 대한 전투의지와 승리의 기대도 같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백성은 이용태에게 이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처절한 복수와 엄청난 공포심이다. 많은 군사를 모아야 공포감을 없애고, 고부 봉기의 열의와 적개심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승리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모악산을 병풍 삼아 자리한 원평. 1894년 원평은 우리 역사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 원평 모악산을 병풍 삼아 자리한 원평. 1894년 원평은 우리 역사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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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원평 장날이다. 장터로 몰려드는 장돌림 틈에 군사들이 합류한다. 고부 피난민은 물론이고 금구, 원평, 태인에서 앞다퉈 몰려든다. 높은 열망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지휘부는 고부를 공격하지 않고 손화중의 근거지인 무장으로 이동하기로 한다. 고부 백성에게 재봉기를 알려 공포심을 없애고, 이용태에겐 경고와 위협을 가하는 전술이다. 무엇보다 고부 관아에 갇힌 수천 명 목숨을 보전하려는 조치다.

단번에 3천여 농민군이 모인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같은 크기의 죽창으로 무장한 농민군은 한결 질서가 잡히고 위엄이 선 모습이다. 원평에서 화호나루로 이동, 백산을 빙 돌아 고부를 거치고 흥덕을 지나 무장에 당도한다. 봉기 전까지 가급 관군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작전이다.

3월 12일 무장에 당도한 농민군은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자취를 감춘다. 고부에서 봉기한 반란군에서, 이젠 낡은 옛 체제를 깨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혁명군으로 거듭나려 한다.

아울러 이들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 국가를 만들고자 스스로 일어서고자 했다. '모든 걸 갈아엎고야 말겠다'라는, 농민군의 혁명 의지였다.

태그:#고부봉기, #박원명, #이용태만행, #손화중과무장, #동학혁명의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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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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