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글 말미에 언급한 '지혜학교 인문반 철학 수업'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그에 앞서, 지혜학교의 철학교육 커리큘럼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14년 동안 지혜학교의 철학교육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 변화의 흐름은 철학교육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고민의 흐름이며, 시도와 방황의 흔적이기도 하다. 

이 변화를 관통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안교육현장에서는 '연구'와 '교육'을 병행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역설이다. 이 역설 때문에 연구소가 문을 열었으며 그 때문에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글과 다음 글에 걸쳐 지혜학교의 철학교육 커리큘럼이 시기별로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설정되었고, 각각 어떤 과제를 남겼는지 '차분히' 되새겨 보려고 한다.

되돌아보면, 철학교육 커리큘럼은 항상 '교과 바깥의 상황'으로 인해서 촉발되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철학교사가 입·퇴사하는 상황이라든지, 학교 교육과정 차원에서 전체 학년별 교육 시수가 달라진다든지, 각 학년별로 주요 과업이 재배치가 된다든지 등. 

이런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그에 맞춰 철학교육의 커리큘럼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철학교사들은 이 틈을 타서 그동안 교실에서 겪은, 수업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듬어서 '잽싸게' 새로운 커리큘럼으로 구성해 낸다. 이때 새로운 커리큘럼은 비유하자면, 수차례 검증을 통한 '완성품'이 아니라, 이제 검증을 해야 하는 '시제품'에 가깝다. 이것이 철학교육 커리큘럼 변화의 기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1, 2010년~2011년, 개교 직후, 철학수업 편성의 당혹감

개교 직후 철학교육계획이 기록으로나마 남아있다. 지혜학교의 깃발을 세운 뒤 학교가 허허벌판 위에 덩그러니 서 있을 때, 책상과 칠판, 분필만 있던 교실에 교사와 학생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할 때, 아무것도 없는 현실에서 '미래의 플라톤'을 길러내는 꿈이 가득할 때의 계획이다. 

참고로 이전까지의 글에서는 '학년'을 공교육의 학년 구분에 따라 '중1, 2, 3, 고1, 2, 3'으로 표현했지만, 이제부터는 지혜학교의 학년 구분에 따라 1, 2, 3, 4, 5, 6학년으로 표기할 것이다. 그러니까, 중1은 '1학년'이며, 고2는 '4학년'인 셈이다. 지혜학교의 '학제'는 2010년부터 2019년까지 기초과정 2년(1, 2학년), 본과정 3년(3, 4, 5학년), 심화과정 1년(6학년)이었고, 2020년부터는 기초과정 2년(1, 2학년), 본과정 2년(3, 4학년) 심회과정 2년(5, 6학년)으로 변경되었다.     
 
개교 초기 철학수업의 계획이다. 선배 교사가 이 시기를 어떻게 살아냈을지,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 2010년~2011년 지혜학교 철학교육 커리큘럼 개교 초기 철학수업의 계획이다. 선배 교사가 이 시기를 어떻게 살아냈을지,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 추교준

관련사진보기

 
당시 철학교육계획표를 보자. 기초과정 2년, 본과정 3년, 심화과정 1년의 구분 위에 철학과 학부의 커리큘럼을 한 줄로 길게 나열하고 그 앞뒤로 나름의 교육 내용을 덧붙인 것처럼 보인다. 예전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철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가장 긴 교육과정은 '학부 교육과정'이다. 피할 수 없는 상상력의 한계다. 계획을 짠 선배 교사도, 이 계획을 받아 든 사람들도 모두 막막했을 것이다. 내가 개교 3년 차부터 학생들을 만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비인가 대안교육 현장에는 '공인된' 교육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공교육에서 유행하는 '교사가 곧 교육과정'이라는 말이 정말 100% 적용되는 곳이다. 교사 개인이 언제,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왜 가르칠지 온전히 스스로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를 차분히 준비할 수 있는 교사는 단연코 없다.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은 사춘기 청소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를 발산하고 분출하기 때문이다. 

이틀이 멀다 하고 학생들 사이에서 온갖 일들이 펑펑 터진다. 모두 자기를 봐달라고 아우성이다. 여기서는 싸우고, 저기서는 학교를 탈출한다. 그런 학생들을 챙기고 보듬으면서 여러 활동과 행사들을 기획하고 치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한 달이, 일 년이 훌쩍 지난다. 만약 이곳이 이른바 '자유 학교'(free school)라면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청소년들의 자발성을 독려하고 지지하며 그들을 무한히 신뢰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교육적 의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혜학교는 어쩌자고 여기에다 '철학, 인문학을 중점적으로 교육한다'는 생각까지 더했을까? '철학'이라는 단어와 '대안학교'라는 단어를 조합하는 일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아마 개교 초기에 현장을 겪으며 철학교육 커리큘럼을 고민했던 선배 교사는 이런 물음을 던졌을 것이다. 지혜학교 구성원들이, '몇몇 철학교사가 현장에서 낮에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과 함께 뒹굴다가, 밤에는 책상 앞에 앉아서 커리큘럼을 연구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 2012년~2015년, 철학교육의 확장, 타 교과 및 활동 연계 

이런 상황에서 2011년 말부터 '철학교육연구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실무 준비 끝에 2012년 초, 연구소의 문을 열었다. 당시 학부모이자 동양철학연구자인 김태완 소장을 중심으로 4명의 연구원들이 모였다. 철학교육을 연구하여 '지혜학교의 철학교육 커리큘럼'을 제시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의 철학교육 커리큘럼의 가장 큰 특징은 지혜학교라는 '현장에 적합한' 철학교육을 하는 것, 구체적으로는 인접 과목과의 유기적 연계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철학교육 커리큘럼을 구상하면서 인접 교과와 연계한,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융합적' 교육을 시도했다.
▲ 2014-2015년 철학 수업 배치 철학교육 커리큘럼을 구상하면서 인접 교과와 연계한,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융합적' 교육을 시도했다.
ⓒ 추교준

관련사진보기

 
2012~2015년의 커리큘럼도 여전히 대학 학부를 참고하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교육계획은 이전의 계획에 비해서 교육의 분야가 시대적, 지역적으로 '세분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지금 보면 거창하기는 마찬가지다.) 

2년 정도 수업을 하다 보니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학생들이 철학수업을 포함하여 여러 인문학 수업을 듣는데, 여기저기서 듣는 수업 내용들이 학생 안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지 않고 학생들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2014년부터는 아예 여러 수업들이 연계될 수 있도록 수업의 형식과 내용이 '서로 맞물려' 상승효과를 낼 수 있도록 조율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동시에 수년간 현장에서 철학수업을 운영해 본 결과, 기초과정 학생을 대상으로는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는 철학수업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업을 과감하게 뺐다. 자신들의 경험으로는 이해도, 공감도 되지 않는 철학을 공부하느니, 차라리 텃밭에 나가서 씨를 뿌리고, 좋은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며, 운동장으로 나가서 공을 차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구성원들 사이에 형성되었다.  

앞서 이야기 한, '교사가 곧 교육과정'이라는 구호는 철학교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연구소에는 석사급 이상 동·서양 철학 전공자들이 두루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철학교육 커리큘럼이 정해지면, 그 범위 안에서 각각의 연구원들이 교재 선정을 포함하여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는 형식과 내용으로 수업을 구상하고 운영했다.

각자 열과 성을 다해서 열심히 고민하고 준비하고 수업하는데도 현장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앞에서는 '원래 교육이란 자판기에서 물건을 뽑아내는 일과 다르지!'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뒤에서는 '더 늦기 전에 여기서 하는 온갖 노력들이 지니는 결과들, 그 결과들이 지니는 교육적 의미를 학생과 학부모에게 확인시켜줘야 하지 않을까?'하는 욕심과 불안도 커졌다. 

그러던 2015년 겨울, 예상치 못하게, 5학년 학생들 중 몇몇 학생들이 교사회를 대상으로 '나는 6학년이 되어도 수능 준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졸업해서도 대학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졸업 전에 1년 동안 인문학 공부를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제공해 달라'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해 왔다. 이에 바쁘게 움직여서 1년짜리 '인문학 종합 공부 세트'라는 '시제품'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것이 2016년부터 2024년,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는 '인문반 철학수업'의 시작이다. (다음 글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서 게시 되었습니다.


태그:#광주지혜학교, #철학교육, #대안학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