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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리 양식장 내 바다에 떠 있는 샌드위치 패널 숙소 전경
 가두리 양식장 내 바다에 떠 있는 샌드위치 패널 숙소 전경
ⓒ 국민권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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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국민권익위원회(이하 권익위)는 풍랑에 흔들리는 바다 위 바지선 위에서 힘들게 생활하던 외국인 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고 취업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구제하였다고 밝혔다. 

외국인근로자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입국한 스리랑카 국적의 노동자 A씨는 지난 2022년 11월부터 한 양식장 사업주 B씨와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양식장의 사료와 그물을 관리하는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주 B씨는 근로계약과는 달리 숙소를 제공하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 A씨를 양식장 바지선 위에서 지내도록 했다. 당시는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A씨는 바지선에서 먹고 자며 지냈다. 빨래는 바닷물로 할 수 밖에 없었고, 화장실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추운 겨울 바지선에서 지내다, 결국 '탈출'

견디다 못해 A씨는 사업주 B씨에게 사업장 변경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사업주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A씨는 2023년 4월경 바지선을 '탈출'했다. 사업주는 A씨가 '무단 이탈'하였다며 관할 고용노동지청에 신고했다. 

2023년 7월 해당 고용노동지청은 사업장 변경 사유에 대해 노동자와 사업주가 다투자, '외국인근로자 권익보호협의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협의회는 사업주 B씨의 손을 들어 주었고, 결국 A씨는 한국에서의 취업, 체류 자격이 박탈되는 상황에 처했다. 

근로계약을 위반한 건 사업주인데, 강제로 추방될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한 A씨는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에 민원을 제기했다. 
 
화장실은 없고, 바지선 바닥에 구멍을 뚫어 대변을 보면 그대로 바다로 배출되었다. 가스레인지로 물을 데워 사용했고, 세탁 시설이 없어 바닷물로 세탁했다. 먹는 물과 흰밥 이외의 식사 공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화장실은 없고, 바지선 바닥에 구멍을 뚫어 대변을 보면 그대로 바다로 배출되었다. 가스레인지로 물을 데워 사용했고, 세탁 시설이 없어 바닷물로 세탁했다. 먹는 물과 흰밥 이외의 식사 공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 국민권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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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위 조사결과, A씨는 사업주로부터 정당한 숙소를 제공받지 못했고, 바다 위 바지선 쉼터에서 지내며, 기본적인 생활이 불가한 것은 물론이고 그 밖에 부당한 처우도 함께 받고 있는 점이 확인되었다.

바지선 위 생활 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는데, 바닥에 구멍을 뚫어 대변을 보면 그대로 바다에 배출되었다. 가스레인지로 겨우 물을 데워 사용하도록 했고, 세탁 시설이 없어 바닷물로 빨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먹는 물 공급이나 흰밥 이외의 식사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권익위는 이 결과를 토대로 A씨의 사업장 변경을 허용하도록 고용노동지청에 의견을 제시했다. 

국민권익위, 사업주 귀책 인정

'외국인근로자 권익보호협의회'를 통해 사업주 손을 들어줬던 고용노동지청은 8개월 만에 태도를 바꿔, 권익위 의견을 수용하였다. 결국 A씨는 '외국인근로자의 책임이 아닌' 사유로 사업장 변경 허가를 받고, 체류 자격도 회복하였다. 바지선을 탈출한 지 1년 만에 사업주 귀책을 입증하고 권리 구제를 받은 것이다. 

한파 경보가 발효되었던 2020년 12월 20일 경기도 포천의 농장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이주노동자가 숨진 채 발견된 일이 있었다. 사망 직후 부검에서 질병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였지만, 논란 끝에 근로복지공단 의정부지사는 "난방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가건물 기숙사에서 한국의 추운 겨울을 지내며 건강이 치명적으로 악화된 것으로 판단"한다며 산재를 승인했다

이후 고용노동부는 비닐하우스 등 숙소 상태가 열악한 경우 고용허가제를 불허한다는 대책을 세웠다. 이행 기간 농가는 숙소시설을 정비하도록 하고, 외국인근로자에게는 열악한 숙소를 사유로 사업장 변경을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이러한 조치들이 농·어촌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졸속 정책이라고 비판하였는데, 추운 겨울 바다 위 판잣집에서 지내는 외국인 노동자를 목격하고도 고용노동부가 이 문제를 여전히 외면하고 있음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유엔 "인신매매의 핵심은 착취"

2018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행위만을 인신매매로 여겨왔다'며 하지만 유엔(UN) '인신매매방지의정서'에 따르면 인신매매의 핵심은 '착취'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인신매매 가해자는 사람의 취약한 상태를 이용, 합당한 대가 없이 노동력을 착취해 경제적 이득을 얻거나 성매매 강요 등을 통해 성을 착취하는 경우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당시 인권위는 미국 국무부의 인신매매보고서가 한국의 어선 이주노동자들을 강제노동을 당하는 인신매매 피해자로 보고 있다며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정부의 노력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인신매매는 인간의 권리를 박탈하고, 그들의 꿈을 짓밟으며, 생명의 존업성을 파괴하여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하는 범죄다.
 인신매매는 인간의 권리를 박탈하고, 그들의 꿈을 짓밟으며, 생명의 존업성을 파괴하여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하는 범죄다.
ⓒ 국가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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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고용허가제 전체를 폄하할 수는 없지만, 이런 열악한 주거 문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인신매매의정서'의 인신매매 정의에 딱 들어맞는 상황이라며, 외국인 근로자를 취약한 지위에 있도록 한 구조 문제를 지적했다.

최 변호사는 국가가 독점적으로 고용허가제를 운영하고 있는데,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사고가 발생하면 둘이서 해결하라고 하는 것이 너무 잔인하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살아남으면 다행이고 죽으면 어쩔 수 없다?

한편, 지난 2월 5일 고용노동부는 임금체불, 고용평등, 외국인 고용허가제 등 직장에서의 모든 노동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초기상담 과정부터 모든 문제가 다루어질 수 있도록 원스톱 종합상담‧권리구제 체계를 구축하여 촘촘하고 두텁게 지원한다고 밝혔다. 전국 9개 지역을 선정하여 외국인근로자 지역정착 지원사업을 신속하게 시작한다고 알리기도 했다.

정부는 역대 최대 규모의 외국인 노동자 도입을 앞두고, 운영하는 전국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거점 9개소, 소지역 35개소)의 24년도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1월 1일 운영을 중단시켰다. 폐기하고 딱 한 달 5일 만의 정부 정책이라고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열악한 지위의 설계자는 결국 '한국 정부'인데, 20년 겨울 포천의 비닐하우스에서 한 외국인 노동자는 사망했고, 22년 겨울 바지선 위 판잣집에서 한 외국인 노동자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으면 다행이고, 죽으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외국인 노동자 도입 정책, 이제는 변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건희 기자는 공익법률지원센터 파이팅챈스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파이팅챈스 블로그에 함께 게재합니다.


태그:#이주노동자, #주거, #판자집, #비닐하우스, #파이팅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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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공익법률센터 파이팅챈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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