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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편집자말]
정읍시 이평면 면사무소 앞. 고부 봉기 당시 전봉준이 봉기 당위성을 설파했던 곳으로 이를 지켜 본 감나무 고사하고 다른 감나무가 자리를 대신한다.
▲ 말목 감나무 정읍시 이평면 면사무소 앞. 고부 봉기 당시 전봉준이 봉기 당위성을 설파했던 곳으로 이를 지켜 본 감나무 고사하고 다른 감나무가 자리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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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목(巨木)이 사라진 그루터기는 수십 년이 지나도 허전할 뿐이다. 어느 가곡의 묘사처럼 예 섰던 그 큰 나무의 빈자리 허전함이야 무엇에 비길 수 있겠는가?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거목이라 칭할 만한 인물은 과연 몇이나 될까? 열 손가락을 넘겨 꼽을 수 있을까. 말목장터엔 거목이 있던 자리에 5척 단신의 거목이 남긴 흔적이 뚜렷하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이곳을 찾았다. 이평면 마항리에 친구가 살아서다. 차가운 눈발 날리던 말목장터가 그땐 참 분주했다는 인상만 강하다. 배들이 이평(梨平)으로 말목이 마항(馬項)으로 바뀌었으니, 한자로 바뀐 예쁜 이름을 참 오래도 잊고 살아간다.

분주하던 장터도, 구수한 국밥집도, 다방과 당구장이 같이 있던 2층 건물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다. X자로 교차하는 사거리만 휑한 바람을 용케도 품고 있다.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네 갈래로 뻗은 길의 흔적은, 1894년 그때 고부의 경제 중심지가 이곳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면사무소 서쪽이 전봉준이 살던 장내리 조소마을 쪽이다.

말목장터엔 거목이 있었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가 할퀴고 가면서 입힌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거목인 감나무는 말라 죽고 말았다. 1894년 1월 10일(음) 그 밤, 5척 단신의 눈빛 형형한 인물이 고부성을 격파해 조병갑 목을 베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설파한, 절절한 연설을 귀담아들은 나무다. 당시도 너른 그늘을 드리울 만큼의 수관(樹冠)이었다면, 족히 200살은 넘겼음 직한 거목이다.
 
2003년 태풍 매미의 피해로 고사한 감나무를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입구에 전시하고 있다.
▲ 말목 감나무 2003년 태풍 매미의 피해로 고사한 감나무를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입구에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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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거목인 감나무는 조선 민중에게 신세계를 열어 줄, 사람 사는 세상의 거목으로 떠오를 5척 단신인 그를 알아보았을까? 5척 단신 인물의 연설에 가지를 흔들어 백성을 독려했을 감나무는, 가지 잘린 채 박제되어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거목의 그 감나무가 섰던 자리에 이젠 다른 감나무가 뒤를 잇고 있다.

이게 나라인가?

새 세상을 염원하는 사람들을 규합해 혁명을 일으키자는 사발통문이 은밀히 돌았다. 고부 인근 동학 대접주 몇몇과 구체적인 행동계획도 마련했다. 봉기 날짜를 1893년 12월 1일에 맞춘다. 비밀리에 무기를 마련하고 출정할 농민군도 모았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11월 30일, 만석보 수탈에 따른 문책성 인사로 익산 군수로 발령 난 조병갑이 득달같이 전주 감영으로 달려가 버린다. 그 바람에 목 베려던 처결 대상이 사라지고 말았다.

조병갑의 목적은 하나다. 전라감사 김문현의 갓끈을 붙잡고 재차 고부군수로 눌러앉으려는 술수를 쓰려는 속셈이다. 또한 가문의 권세와 막대한 뇌물을 앞세워 왕후 민씨를 비롯한 무당 진령군과 권력 핵심에도 선을 대려는 것이다.
 
말목장터에서 고부로 향하는 길에서 본 천태산과 두승산. 봉기군이 넘었을 산이다.
▲ 천태산과 두승산 말목장터에서 고부로 향하는 길에서 본 천태산과 두승산. 봉기군이 넘었을 산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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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 피를 짜내 만든 뇌물이 효과를 발휘한다. 고부군수로 발령 난 이은용이 12월 24일 안악 군수로 발령 나고, 신좌묵으로 대체된다. 다음날 신병을 이유로 신좌묵이 사직하자, 26일 이규백이 발령 난다.

이 자도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같은 날 하긍익으로 발령 나지만 역시 사직한다. 28일 박희성이 발령 났다가 사직하자 29일 강인철로 바뀌지만 1894년 1월 2일에 사직한다. 불과 10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6명이 발령 났다가 특별한 사유 없이 사직이 반복된 것이다.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관직을 가지고 얼마든지 장난칠 수 있는 참으로 한심한 지경이다. 왕후 민씨가 정점인, 권력을 사유화한 집단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이런 나라와 권력이 백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찌 취급했을지 말하자면 입만 아플 뿐이다. 2024년의 권력은 어떤가? 범죄 피의자인 전직 장관을 대사관으로 임명해, 해외로 도피시키기는 권력이다. 이게 나라인가?

고부 봉기

말목에서 신태인 향하는 길옆에 예동마을이 있다. 정읍천 물이 동진강에 합수하기 전, 마을 동쪽의 보(洑)에서 맴돈다. 이 물로 배들 농사를 일궜다. 이를 기리기 위해 마을에 전해오는 풍속이 있다. 매년 정초 성대하게 치르는 풍년을 기원하는 보 굿이다.
 
배들 가장자리 예동마을 앞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 기념 조형물. 앞에 1894 숫자가 인상적이다.
▲ 예동마을 기념물 배들 가장자리 예동마을 앞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 기념 조형물. 앞에 1894 숫자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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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고혈인 뇌물의 힘으로, 조병갑이 1월 9일 고부군수로 다시 발령 난다. 이 소식을 들은 고부 사람들 마음은 어땠을까? 치밀하게 준비한 봉기를 곧바로 결행한다. 1월 10일이다. 예동마을 보 굿에 천여 명이 참여한다. 굿이 끝나자 약속대로 말목장터로 이동한다.

장졸 수백이 세 패로 나누어 천치재와 운학리 방향으로 진군한다. 읍내에도 수백 장졸이 대기하고 있다. 캄캄한 밤길이다. 머리에 감은 흰 두건만이 또렷하다. 그 밤으로 관아를 들이쳐 조병갑 목을 베어야만 한다.
 
갑오년 정월 초삼일 밤에 태인 주산리(舟山里) 접주 최경선이 건장한 도인 삼백 명을 모아 그 밤으로 고부 북면 마항 장터까지 삼십 리를 달려와, 먼저 약속되어있던 고부 백성으로 구성된 수천 명의 부대에 합류하였다. 마항 장터 전후좌우 민가 등에서 총과 창 등 무기를 거두어 그 밤으로 고부읍 북성(北城)으로 들이쳐 일제히 총을 쏘며 공격하였다. 읍을 에워싸고 사면팔방으로 총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울리며 공격하자 읍이 함락되었다. 이때 고부 관졸들이 대항코자 하였으나 대세 이미 틀렸음을 알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즉시 관아를 둘러싸고 관리들을 수색하니 군수 조병갑은 이미 도망하였고, 다만 좌수(座首)와 이속(吏屬)만이 남아 있었다. 관속 중에 군수와 함께 백성을 수탈한 한 자 여럿을 잡아내 목을 베고, 군기고를 열어 총 창 탄약을 거두고 읍내에 있는 청죽(靑竹)을 베어 죽창을 만들어 총 없는 사람 하여금 지니게 하였다. 옥문을 열어 민란 대표들과 원통한 누명으로 갇힌 백성을 석방하고 또 창고를 열어 쌀을 빈민에게 나눠주고 읍의 행정과 치안을 정돈하였다. (동학사. 오지영. 문석각. 1973. p201~202 의역 인용)
 
고부 봉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조병갑을 죽이고 전주로 진격하자고 했을 때,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길이다. 대나무를 잘라 죽창을 만들고, 횃불을 밝혀 병장기로 중무장해 고부 읍내를 향해 밤길을 걷는 농민군.

한겨울 칼바람에 맞서 천치재 꼭대기에 올라서 너른 배들을 바라보는 농민군 마음은 어떠했을까? 저 들판에서 대를 이어 농사지으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려 천대받으며 살아온 삶을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보았을까?
 
말목에서 고부로 향하는 고개 중 두승산 옆으로 난 길. 봉기군도 이 길을 넘었을 것이다.
▲ 두승산 옆 고개 말목에서 고부로 향하는 고개 중 두승산 옆으로 난 길. 봉기군도 이 길을 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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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권력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나서는 길. 자신은 물론 가족과 친인척까지도 죽음으로 내몰지도 모르는 길. 관과 수령, 부자들에게 굴복하여 비굴하게 넘던 고개가 아닌, 그들의 목을 베고 징벌하러 죽창 들고 넘어가는 고갯길.

말없이 그 고개를 넘던 농민들의 마음은 차가운 바람만큼이나 얼어붙었을 것이다. 나서지 않아도 된다면 굳이 이 길을 나섰을까? 희미한 호롱불 아래 가족과 오순도순 아늑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그 길을 나섰던 짐작조차 어려운 고부 농민의 마음은…

왕의 목을 베지 못해서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을 때, 어찌 알았는지 조병갑은 도망치고 없었다. 역시 그다운 줄행랑이다. 본시 기회주의자들의 속성이 대개 이러하다. 농민군도 다른 고을로 통하는 여러 갈래 길로 급히 쫓아 봤지만, 끝내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고부를 점령한 농민군이 무장하려 무기고를 열어 보니 목불인견이다. 나라를 지키라고 준비해 둔 무기가 다 망가지거나 녹이 슬어 제 기능을 발휘하는 무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고부 관아가 있던 현 고부초등학교.
▲ 고부관아 터 고부 관아가 있던 현 고부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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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 관아에 창의소를 세우고 군민들을 안돈 시키는 한편, 치안과 질서를 유지한다. 해방구다. 또한 봉기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창의문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관군의 공격이나 습격에 대비해 철저히 방비하면서 결의를 다잡고 있었다.

우리 근현대사는 잘못된 역사의 반복이다. 동시대에 바로 잡아야만 할 숙제를 고스란히 후세에게 떠넘기며, 똑같은 잘못을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꼴을 방관하고 있다. 왜 그럴까? 우리는 단 한 번도 민중의 이름으로 이런 불의를 처단해본 경험과 본보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평면 면사무소 좌측 언덕에 세워져 있는 말목장터를 기억하는 비.
▲ 말목장터유지비 이평면 면사무소 좌측 언덕에 세워져 있는 말목장터를 기억하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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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단죄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들이 단 한 번이라도 단죄당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같은 잘못과 악행을 반복적으로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을까. 한 번이라도 왕을 죽였다면 그럴 수 있을까.

1894년 조병갑이건 고종이건 목을 베고 썩은 기득권 세력을 근간에서부터 해체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태그:#고부봉기, #말목장터, #예동마을, #고부성함락, #동학농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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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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