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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임실교당
 천도교 임실교당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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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임실읍 성가리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천도교 임실교당 건물은 1930년에 지어져 본채, 바깥채와 문간채로 구성된 한옥목조문화재가 있다. 이 건물의 본채는 천도교의 핵심 사상인 인내천(人乃天)의'人'을 상징하는 좌우 대칭형의 구조로, 1912년에 건립된 서울 우이동 의창수도원의 봉황각 내실과 같은 형태로 지어져 의미 있는 천도교 건축물이다. 이곳 임실 성가리의 임실교당은 1940년대에 천도교 중앙총부가 잠시 옮겨져 활동했던 곳이다.

사람이 하늘이라는 천도교 서울 봉황각과 임실교당의 건축물

천도교 임실교당의  'ㄴ' 자로 된 문간채를 들어서서 작은 마당과 중문을 지나면 안마당이다. 안마당을 'ㄱ' 자형 본채와 'ㄴ' 자형 바깥채가 튼 '口' 자형으로 에워싼 구조로 되어 있다. 본채는 전면 6칸, 측면 3칸이 'ㄱ' 자로 좌우 대칭을 이루었으며 앞퇴와 뒷퇴를 내고 가운데 방을 두었다. 이렇게 'ㄱ' 자로 좌우 대칭인 본채가 그 내부를 좌우로 분리한 것은 남자석과 여자석을 구분한 것으로 기독교 및 천주교가 전래하는 초창기에 남녀 구별의 유교 사상이 투영된 종교건축물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천도교 임실교당 본채의 건물 형태는 의암 손병희가 1912년에 천도교 연성수련장으로서 건립하여 천도교 교리와 사상을 심화시키고 3.1운동의 구체적 계획을 구상한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봉황각(鳳凰閣) 본채를 본떴다. 이 봉황각의 내실(內室)은 좌우 대칭형 한옥으로 좌우대칭이며 총 7칸 규모 목조 한옥으로 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봉황각의 왼쪽 머리를 구성하는 부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오른쪽 모서리 한 칸은 몸채 왼쪽 모서리와 겹쳐 있어서 건물 평면의 모양이 '을(乙)' 자형이다. 천도교 임실교당 본채는 봉황각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이 더 크다. 따라서 봉황각 내실은 뒷툇마루가 없는 대신 천도교 임실교당은 뒷툇마루가 있는 것이 다르다.
 
천도교 임실교당 안마당
 천도교 임실교당 안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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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乙)은 동학의 본질인 천심(天心)의 심(心), 즉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1912년에 세운 의창수도원 봉황각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천도교 임실교당의 본채는 건축학적인 입장에서는 단순히 'ㄱ' 자형 목조한옥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이는 곧 천도교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핵심인 사람[人]을 형상화한 것으로 사람을 중히 여기는 뜻이 담겼다.

교세가 활발했던 임실 지역

천도교 <임실교사>(최동안, 1981)는 1873년 3월에 해월 최시형이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새목치(鳥項峙) 아래 새목터 마을(1066번지) 허선(許善)의 집에 도장을 베풀어 설법 포교 활동을 하였다고 동학의 임실 전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35일간 설법과 교리를 배웠다고 한다.
 
천도교 임실교당 인내천 사상 형상화한 본채
 천도교 임실교당 인내천 사상 형상화한 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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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지도자 김개남(金開南)이 19세가 되던 1871년부터 새목터마을에서 멀지 않은 성밭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하였고, 그가 '21세에 동학에 입도했다'는 이야기가 이 지역에는 전해 온다. 성밭마을에 머물던 김개남의 동학 입도 시기와 이 새목터마을에서 최시형이 포교하던 시기가 일치한다.

<천도교회 월보>(통권 제167호(1924), 8월호)에 박내홍(朴來弘)의 『전라행(全羅行)』 기행문이 실려 있는데, 임실 지역의 동학 교세가 왕성하였음을 표현하고 있다.

"임실은 전북 제일의 교세를 가지고 있는 종리원으로 청웅면 새목터는 갑오년간에 동학 제 두령의 거소(居所)였으므로 해월신사가 자주 행차하시며 항언(恒言)하시길, '임실은 산의 기운이 좋으니, 사람이 많이 살겠다'하셨고, 갑오년 동란 시에 일군이 도가(道家) 아닌 집이 거의 없었다."고 하였다. 

1894년 동학 혁명 당시에 임실은 임실현(任實縣)이었고, 오수역은 남원부 관문인 북쪽의 역참으로 남원부의 동학교당 본부가 있었다.

임실과 오수역(獒樹驛)은 주민 모두가 동학당에 가담했다. 한 개의 현이 모두 동학도인 지역이어서 주민들이 동학도가 역적임을 알지 못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4년 9월 18일) 요약]

이렇게 '임실은 모두가 동학도'라고 기술하였고, '오수역도 주민 모두가 동학당에 가담하였다.'라고 기록하였는데, 과장된 표현으로 보이지만 이 지역의 동학 교세가 매우 컸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위기의 현대에 새로운 가능성 제시 

1860년 4월에 최제우(崔濟愚)는 경천(敬天)과 시천주(侍天主) 신앙으로  한울에 대한 공경 사상이 중심인 동학을 창도하였다. 그는 1861년에 남원 교룡산성 안의 은적암에 1년간 은거하며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집필했다. 동학(東學)의 초기 사상은 최제우의 시천주와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종지(宗旨)에 집약되어 있다. 손병희는 '사람이 곧 한울(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정립하며 동학을 천도교로 체계화하였다.
 
천도교 임실교당 바깥채
 천도교 임실교당 바깥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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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종교는 내세의 초월적인 시원이나 대상을 향해 경배하며 의식(儀式)을 체계화했다. 동학은 이전까지 내세와 밖으로 향하는 경배의 방향을 되돌려 '내 안의 하느님'인 세상과 우주를 경배하였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은 인간만이 세상의 주인이며 주체라는 의미는 아니다. 동학과 천도교의 핵심 관점은 '경천(敬天)'과 '경인(敬人)'을 거쳐서 '경물(敬物)'에까지 도달해 있다. 

인간중심주의를 기조로 한 현대 사회는 첨단 기술이 발달했지만, 비인간적이고 환경과 생태계 파괴는 위험 수위를 넘었다. 문명적 위기에 당면한 현대 사회에 필요한 태도는 인간주의를 극복하고 비인격적인 사물에서도 애정과 공경을 실현하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과 조화로운 생태적 환경에서의 사람과 사물의 일상적인 존재 자체가 새롭고 중요하며 숭고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동학은 내세를 제시하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현세를 중시하는 사상적 관점을 지니게 된다. 

동학으로 시작하여 반봉건 반외세 저항 운동으로 발전한 1894년의 동학 혁명이 당시의 현실에서는 좌절되었지만, 사람이 곧 하늘이며 만물이 모두 하늘이라고 보는 동학과 천도교가 내포한 사상은 문명적 위기의 현대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임실읍 성가리의 천도교 임실교당을 둘러보고, 가까운 곳에 임실 치즈를 개척한 지정환 신부가 재임했던 천주교 임실성당 사제관과 치즈숙성 동굴과 치즈 개척 초기의 벽화가 그려진 골목길을 찾아가 볼 수 있다. 

마을 뒷산에 있는 야생동물보호구역의 백로 서식지는 겨울철에도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임실의 성가리는 동학의 역사와 임실 치즈의 문화를 함께 찾아볼 수 있는 체험 관광지이다.
 
천도교 임실교당 본채
 천도교 임실교당 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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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임실의동학, #천도교임실교당, #천도교인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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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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