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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강우관측소에서 바라본 비슬산
 낙동강강우관측소에서 바라본 비슬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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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1900년 출생한 현진건은 1918년 상해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줄곧 대구에 거주했다. 그 후 중국 유학 중 당숙 현보운에 입양되어 1919년 귀국한 현진건은 1943년 타계할 때까지 서울에서 생활했다.

서울에 거주할 때에도 현진건은 아버지 현경운과 벗들이 살고 있는 고향 대구를 늘 기억했다. 1920년 첫 소설 〈희생화〉를 발표하면서 "그(남자 주인공)는 대구 사람이다. 그의 부모는 아직도 대구에 산다. 그는 서울 있는 오촌 당숙 집에 유숙하고 있다."라고 기술할 정도였다.

대표작 중 한 편으로 평가받는 〈고향〉(1926년)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생긴 일이다"로 시작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후기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신문지와 철창〉(1929년) 역시 "나는 어줍잖은 일로 삼남 지방 T경찰서 유치장에서 며칠을 보낸 일이 있다."가 첫 문장이다.

고향 대구를 사랑한 민족문학가 현진건

현진건을 연구하고 현창하기 위해 2022년 대구에서 창립된 '현진건 학교'도 현진건의 고향 사랑 정신을 본받아 2024년부터 매주 토요일 '대구 여행'을 실시하기로 했다. 그 첫 장소로 비슬산을 선택했고, 1월 6일 비슬산을 찾았다. 비슬산부터 가장 먼저 답사하기로 한 까닭은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비슬산의 이름부터 살펴본다.
  
청룡산에서 바라본 비슬산
 청룡산에서 바라본 비슬산
ⓒ 정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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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一然, 1206~1289)은 약 37년간 비슬산에 머물렀다. 21세(1227년) 승과 시험에 장원 급제해 비슬산 대견사 주지로 부임한 이래 43세(1249년)까지 23년, 인흥사와 용천사 등에서 58세(1264년)부터 71세(1277년)까지 14년을 지냈다. 이 긴 세월 동안 일연은 수도에 몰입하는 한편 《삼국유사》 편찬 사료로 활용하기 위해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의 유사(遺事)를 열성적으로 수집했다.

37년이나 비슬산에 머물렀던 일연

70대 중반 이래 일연은 유사에 자신의 생각을 보탠 집필에 들어가 이윽고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삼국유사》는 대한민국 국보(國寶)이다. 이 엄청난 역사서를 일연이 만년에 썼다는 사실은 인간적으로 대단한 교훈을 준다.  
 
빙하기 암괴류가 특징인 비슬산 대견봉-조화봉 사이 원경(대기봉에서 본 풍경)
 빙하기 암괴류가 특징인 비슬산 대견봉-조화봉 사이 원경(대기봉에서 본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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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포산이성(包山二聖)〉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설화 속 '포산(包山)'이 비슬산의 지명 내력에 관한 최초 기록이다. 일연은 포산을 언급하면서 '지역 사람(鄕人)들은 (지금의 비슬산을) "소슬"산(所瑟山)이라 불렀으니 범어(梵語)로 "쌀(包)"이다'라고 기술했다.

지역인들은 이 산을 '소슬산'이라 불렀다

일연의 표현 중 '지금의 비슬산'은 고려 시대에 포산과 비슬산 두 이름이 함께 사용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비슬산(琵瑟山)은 신라 흥덕왕 원년(826)에 도의(道義)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유가사 사적(瑜伽寺寺蹟)〉에 산이 비파[琵瑟]를 닮은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가사 사적〉 자체가 도의의 826년 기록이라는 근거가 없으므로 '산이 비파를 닮아서 비슬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는 전설 수준이다. 산꼭대기 바위가 신선이 비파[琵瑟]를 타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비슬산(琵瑟山)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민간의 회자도 그와 같다.
 
가까이서 본 비슬산 (세계 최장) 빙하기 암괴류 유적
 가까이서 본 비슬산 (세계 최장) 빙하기 암괴류 유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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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견줘 일연의 기록은 비슬산 일대 주민들이 예로부터 '소슬산'으로 불러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해준다. '소슬'은 '솟을'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결과이다. 그렇게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481년)>에 나온다.

'비슬산은 현풍현의 동쪽 5리에 있으며, 성주, 밀양, 창녕에서도 보인다.'라는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50리(20km) 밖 창녕과 75리 밖(30km) 성주와 밀양에서도 보일 만큼 소슬산은 우뚝 '솟은' 산이라는 뜻 아닌가!

주위 30km 밖에서도 보이는 '솟은' 산

전설도 전한다. 아득한 옛날 천지가 개벽할 때 세상천지가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이 상황에 비슬산만 유독 높아서 정상부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 남은 바위에 배를 매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술과 전설은, 비슬산의 '비슬'이 닭 머리 위에 톱니 모양으로 높게 얹혀 있는 붉은 살조각 '닭볏'의 사투리 '닭비슬'에서 유래되었다는 민간어원설과 유사한 인식을 보여준다. 셋 다 비슬산이 우뚝 솟은 산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비슬산 칼바위(조화봉 인근)에 아직 눈이 남아 있다
 비슬산 칼바위(조화봉 인근)에 아직 눈이 남아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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包의 인도말 발음 "쌀"이 우리말 "소슬"과 흡사하다는 점은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한자로 기록을 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소슬(所瑟)"산이 아니라 "포(包)"산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동국여지승람>은 비슬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 포산(苞山)을 소개했다. '쌀' 포(包)를 '덮을' 포(苞)로 바꾸었고, 산이 나무로 덮여(苞) 있다고 소개했다.

비슬산보다는 소슬산이 더 적합한 이름이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 민중이 예로부터 불러온 이름이고, 순 우리말 이름이다. 소재사가 바라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는 '琵瑟山自然休養林' 비석을 "소슬산 자연휴양림"이라 읽으면서 산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태그:#비슬산, #현진건, #포산, #소슬산, #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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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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