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 명필름

관련사진보기

 
2024년 1월 6일은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유명한 어록을 많이 남겼다. 김대중은 오랜기간 격동의 현대사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수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후퇴하지 않고 언제나 역사의 길 위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형성된 김대중의 인생철학, 정치철학이 그의 어록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김대중의 어록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한 글은 드물다. 그래서 필자는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그의 어록 20개를 선정하고 이 어록의 성격과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여기에는 기존에 많이 알려진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인생철학, 정치철학이 담긴 것부터 그의 업적과 역사적 기여를 대표할 수 있는 것 중에서 핵심적인 것을 선별해서 정리했다.
  
김대중, 정치와 정치가에 대해서 말하다 
 
"정치인은 상인적 현실감각과 서생적 문제의식을 함께 갖춰야 한다."

김대중은 1960년대 중반 6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이 표현을 사용했다. 이 어록은 김대중이 생각한 바람직한 정치가의 태도와 자질에 대한 것으로서 '행동하는 양심'과 함께 김대중의 어록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김대중은 정치적 실천을 하는 데에 있어 도덕성과 정당성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구체적인 결과도 중요함을 강조했다. 김대중의 관점은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가 바람직한 정치가에게 필요한 윤리로서 강조한 책임윤리와 신념윤리의 조화와 매우 비슷하다. 권위주의 독재 정권이 도덕적 정당성은 외면한 채 결과만을 강조했다고 한다면 재야사회운동 세력은 지사적인 태도로 내면의 도덕성과 행위의 정당성을 우선시하면서 정치적 실천에 수반되는 결과를 간과하는 경향을 보였다. 김대중은 이러한 양 측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어록을 남겼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김대중이 이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75년이다.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화이행을 이룩하고자 한 김대중은 참여와 실천을 강조했다. 속으로 생각만 하지 말고 직접 행동을 해야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이 어록은 김대중이 강조한 자주적 민주화론과 관련이 깊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자력으로 쟁취해야만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기반이 확고하게 형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국민들의 참여를 촉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 어록을 남겼다. 
 
"정치는 진흙탕 속에서 피는 연꽃과 같다."

김대중은 정치는 수많은 인간의 신념, 욕망 등이 얽혀있는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최적의 대안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인식했다. 그 과정은 심해 속에서 빛을 찾는 것처럼 가능성 없는 고난도의 난제처럼 보일 수도 있고, 때론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낮추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고비를 넘기면 새로운 희망의 열매가 생긴다. 정치적 창조는 위와 같은 원리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한 어록이다. 
 
"정치는 국민보다 반보 앞서야 한다."

김대중은 정치가가 갖춰야할 덕목으로서 비전제시능력과 소통능력을 중시했다. 정치가는 현실에만 안주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한다. 또한 정치가는 국민과 함께 자신이 목표로 하는 가치를 현실 속에서 구현해야하기 때문에 사회적 소통능력이 중요하다. 김대중은 정치가는 이 두가지 능력을 고루 갖춰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 어록을 남겼다.
  
고난과 역경의 시간에 대해서 말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 독서 모습.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 독서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관련사진보기

 
"하늘이 그리웠다."

김대중은 5번의 죽을 고비와 6년의 감옥생활을 했다. 이 두 가지는 그의 수난사를 대표한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 중 하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생과 사를 오갈 때 경험하게 되는 불안과 혼돈일 것이다. 또한 자유를 일방적으로 박탈당해 최소한의 인간적인 권리조차 제대로 행사하지 못할 때도 매우 고통스럽다.

김대중은 1977년 12월부터 1년여 동안 감옥병동에 수감된 적이 있었는데 이곳은 사회와 차단된 감옥 내에서도 특별히 더 차단되어 하늘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김대중은 이때를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회상하곤 했다. 당시 김대중의 심정을 알 수 있는 것이 1978년 12월 27일 석방 직후 수감생활을 주제로 일본 아사히신문에 보낸 기고문의 제목이다. 12월 31일에 게재된 이 기고문의 제목은 '하늘이 그리웠다'였다. 당시 김대중의 심경을 알 수 있는 표현이다.
 
"6년 동안의 수감생활은 대학생활이기도 했다."

김대중은 독재 정권에 의해 6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김대중은 정치적인 박해를 받아 투옥된 현실에 좌절하지 않았고 수감생활의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독방에서 일상이 된 고독의 시간을 독서와 글쓰기를 하며 보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방대한 지식을 쌓았고, 지혜를 넓혔으며 인격의 깊이를 더했다. 그래서 그는 6년의 수감생활을 대학생활에 비유하곤 했다. 이는 끊임없는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미래를 개척하고자 한 그의 인생관과 정치관이 반영되어 있는 어록이다.
 
국가부도의 위기를 극복하고 복지국가, 지식정보강국, 문화강국을 만들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관련사진보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발전시켜야 한다."

김대중은 1997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국민과 전세계를 향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개발독재 시대의 국가발전전략의 패러다임적 전환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임과 동시에 이것의 구체적인 정책기조를 밝힌 것이다. 또한 이 표현은 한국의 민주화 세력이 경제분야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비전과 전략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어록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김대중은 1997년 12월 18일 15대 대선에서 천신만고 끝에 당선되었지만 단 하루도 여유있게 당선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나라는 국가부도위기에 몰려서 IMF로부터 긴급금융지원을 요청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12월 3일 IMF와 합의를 했지만 국제금융시장은 한국경제의 앞날을 불신했고 결국 대선이 있던 12월 18일에는 외환보유고가 39억4천만 달러까지 줄어들어서 국가부도를 피하기 힘들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은 경제 상황을 보고받고 충격을 받아서 국가부도사태를 막기 위해서 조속한 자금지원과 단기외채상환연기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때 김대중은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상황이 너무 어렵다보니 걱정에 밤에 잠을 제대로 자기 힘들 정도였던 것이다. 김대중은 오랜 기간 수많은 위기를 경험했기 일반적으로 볼 때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때는 산전수전 다 겪은 김대중조차도 불안감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이 어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그만큼 어려운 난제를 김대중이 해결했다는 사실을 이 어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중경제는 복지사회의 실현을 이념으로 한다."

김대중은 1960년대부터 개발독재에 의한 권위주의적 산업화 전략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주적 경제발전 철학을 담은 자신의 정책구상인 '대중경제'을 제시했다. 대중경제는 산업간, 지역간, 도농간, 계층간 불균형에 따른 양극화를 해소하는 균형발전 전략이며 복지사회를 지향했다. 이와 같은 경제발전구상을 갖고 있던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이후 사회복지에 대한 패러다임적 전환을 이뤄내서 한국이 복지국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김대중의 이 어록은 그가 복지국가실현에 대한 신념을 1960년대부터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김대중은 사형수로 있던 1981년 1월 지식정보화 사회의 도래와 이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보통신기술 발전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초래하여 지식정보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진단하고, 우리나라가 산업화에는 뒤쳐졌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고 강조했다.

결국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정보통신인프라 구축 및 콘텐츠 개발, 전자정부 출범, 디지털경제로의 전환 등에 있어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의 산업화가 선진국을 추격하고 그의 경험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면 정보화는 선진국을 선도하고 그의 모범사례(role-model)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어록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문화에 있어 정부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아야 한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이후 기존 정부의 문화정책기조를 전면 전환하여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김대중 정부는 문화예술인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개선을 했고 전폭적인 예산지원을 통해 문화콘텐츠 분야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오늘날 한류가 전세계적인 현상이 될 수 있는 문화강국의 힘이 김대중 정부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김대중이 남긴 이 어록은 한국이 문화강국이 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김대중, 진정한 통합에 대해서 말하다
 
1975년 4월 19일 씨알의소리 창간5주년 김대중의 특별강연 당시 모습.
 1975년 4월 19일 씨알의소리 창간5주년 김대중의 특별강연 당시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관련사진보기

 
"용서만이 진정한 대화와 화해의 길이다. 정치의 안정은 용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로 용서하며 대화와 화해를 이루어 나갈 때 이 민족의 고질이자 현재까지 우리의 불행의 최대의 원인인 증오와 보복의 정치는 종장을 고하게 될 것이다."

김대중은 1980년 사형수로 있을 때 옥중일기를 작성했는데 그 첫 번째 주제가 용서였다. 이 표현은 이 일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김대중은 용서를 통한 화해, 관용, 통합의 정치를 실현한 정치가였다. 정치지도자급 정치인 중에서 통합을 강조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실제 통합을 위한 실천을 하고 여기에 성공한 인물은 단연 김대중이다.

김대중은 과거사 문제 해법에 있어서 '진실은 명확히 밝힌다',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함과 동시에 충분한 보상을 한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하지않고 용서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김대중은 '진상규명과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전제하고 가해자에 대해 용서를 해서 통합을 지향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서 도덕적, 정치적, 역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대중의 이 어록은 이러한 의미를 갖고 있다.
 
"제주도민은 4.3의 비극을 겪었습니다. 나는 제주인의 한과 고통과 희망을 같이 하겠습니다."

김대중은 1987년 11월 30일 제주 유세에서 제주 4.3사건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를 공약했다. 이는 제주 4.3사건에 대한 최초의 공론화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이때만해도 제주4.3은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될 정도로 철저하에 역사 속으로 묻혀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매우 용감하게도 이 사안에 대한 정치적 공론화를 시도한 것이다.

특히 김대중은 1980년 내란음모조작사건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고 군사독재 정권의 지독한 음해공작을 오랜 기간 당해서 많은 국민들이 그를 사상적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주4.3을 공론화한다는 것은 표 계산만 한다면 매우 불리한 일이었다.

이러한 의지를 갖고 있던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이후 제주4.3특별법을 제정했다. 그래서 제주 4.3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 등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어록은 김대중이 진정한 통합을 위해서 현대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에서 포용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대중-이희호' 문패"

김대중은 1964년경 동교동 자택 대문에 자신과 부인 이희호의 문패를 함께 걸었다. 김대중-이희호. 이는 그가 글과 말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실천, 퍼포먼스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 자체가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기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넣었다.

김대중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여성인권신장과 양성평등에 있어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정치가였다. 1948년 제헌헌법에 남녀평등의 원칙이 반영되어 보통선거에 의해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었으나 1958년 제정된 민법의 친족상속편에서 남녀평등의 원칙에 위배되는 내용이 다수포함될 정도로 여성의 사회경제적 권리는 약했다. 당시 남녀차별, 남존여비의 사회문화적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리고 참정권은 보장돼 투표는 자유롭게 했지만 여성정치인의 정계진출은 매우 어려웠다.

김대중은 1989년 가족법 개정부터 재임시기 각종 법제도 개혁을 통해 여성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권리 신장에 큰 공헌을 했다. 1964년 그의 집 대문 앞에 걸린 김대중-이희호 문패, 이 어록은 여성인권신장과 양성평등에 대한 그의 철학과 의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미래와 외교에 대해서 말하다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위한 가장 최적의 방안은 3단계 통일론이다."

김대중은 1971년 대선을 앞두고 3단계 평화통일론을 제시했다. 이는 북한과의 평화적 공존의 기반 위에서 평화적 교류를 통해 평화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으로서 상호 인정 및 공존에 기반을 둔 단계적 통일방안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어록에는 평화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과 전략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는 작은 나라이지만, 지정학적으로는 굉장히 크고 중요한 나라이다."

김대중은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예민한 성격을 갖고 있어서 외교를 잘해야만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고 국가의 이익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대중은 외교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외교를 매우 중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우리의 역사를 보면 외교에 취약점이 많다고 지적했으며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리고 김대중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의 처지를 두고 지정학적 저주라고 하는 패배주의적이고 숙명론적 관점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보았다. 김대중은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불리한 여건이 긍정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관점의 전환을 강조했다. 이 어록은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서 김대중의 진취적인 인식과 태도를 알 수 있게 한다.
 
"도랑에 든 소가 양쪽 언덕의 풀을 뜯어 먹는다."

이 표현은 위에서 언급한 지정학적 저주를 지정학적 축복으로 만들 수 있고, 그렇게 해야한다는 김대중의 인식이 구체적인 사례로서 나타난 어록이다. 김대중은 우리나라의 미래에 있어 미국과의 동맹이 가장 중요하고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과의 우호관계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김대중은 1동맹 3우호 관계가 한국 외교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어록은 김대중 외교의 실용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인생과 역사에 대해서 말하다
 
말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말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관련사진보기

 
"현미경처럼 치밀하게 보고 망원경처럼 멀리봐야 한다.

김대중은 거시적인 안목과 미시적인 전략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표현을 사용했다. 이것은 정치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서 필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어록은 입체적이면서도 종합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김대중의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한순간 빛나는 일은 우연과 운에 의해서 나타나고 얻을 수 있지만, 기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거대한 성과는 피눈물나는 노력과 오랜 인내의 과정을 거쳐야만 이룩할 수 있다는 점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대중은 이 표현을 1998년 10월 일본 방문 중 일본 국회에서 한 연설에서 사용했는데, 한국의 민주화는 기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성과이며 이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썼다. 이 어록은 그의 별칭인 인동초와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김대중이 2009년 1월에 쓴 일기의 내용이다. 김대중이 유언으로 남긴 말은 아니지만 그의 인생관, 정치관이 가장 잘 함축된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은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삶을 낙관적인 자세로 대하고 의지와 용기를 갖고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대중은 그런 자세로 힘들고 어려운 날들을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으며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으로 불가능해보였던 여러 난제들을 하나둘씩 해결했다. 그래서 그는 유능한 정치가,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 어록에는 이와 같은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와 회고가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과 중국>(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이며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태그:#김대중
댓글2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