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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가 쓴 이 책의 원래 제목은 'Helgoland(헬골란트)'다. 헬골란트는 북해에 있는 외딴 섬으로 '성스러운 섬'이라는 뜻이다. 이 섬은 1925년 여름 24세의 하이젠베르크가 머물며 행렬역학으로 양자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고안해낸 곳이다. 국내에는<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12월 출간되었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 지음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 지음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쌤앤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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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이다. "이 책의 이야기는 하이젠베르크의 아이디어가 싹을 틔운 섬에서 시작하여, 세계 실재의 양자적 구조가 발견됨으로써 제기된 더 큰 질문으로 점차 확장해갑니다." 더 큰 질문, 그리고 새로운 해석. 경이로웠다.

단순히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일 뿐 아니라 전체 세상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해석이다. 현상의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는 실재론의 신념도 허물어진다. 이렇게 자연과학의 새로운 발견은 인문사회 분야와 문화,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뒤흔든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뉴턴은 빛을 입자라고 규정했고, 초기 조건을 알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결정론을 정착시켰다. 실제로 지구는 태양 주위의 궤도를 정확하게 1년에 걸쳐 일주한다. 달은 한 달에 걸쳐 지구를 회전하면서 동시에 지구를 따라 태양 궤도를 일주한다. 태양계 다른 행성들도 마찬가지다.

물리학자들이 처음 원자의 공간을 들여다봤을 때는 그 공간도 태양계와 같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원자핵 주위를 회전하는 전자는 태양계 행성들과 달리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궤도를 이탈하기도 했다(양자도약).

파동으로 운동하다가 관찰하면 입자로 변하고, 하나의 입자가 두 길로 이동하다가 관찰하면 하나의 길로 바뀐다. 하나의 광자가 두 경로에 모두 존재하는데, 관찰하면 한쪽 경로에만 존재한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양자중첩).

관찰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는 실재론에서 관찰해야 알 수 있다는 실증론이 대두한 것이다. 전자의 위치와 속도(운동량)는 '확률'에 의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위치(X)를 예측하면 속도를 알 수 없고, 속도(P)를 예측하면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어느 것을 먼저 측정하느냐에 따라 측정값이 달라진다. XP와 PX의 값이 다르다는 것이다. 거시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핵심은 관찰 행위를 하는 관찰자의 존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찰자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자연에서 벗어나 있는 게 아니다. 결론은 '관계'라는 것이다. 관찰자와 전자의 관계. 이름하여 '양자론의 관계론적 해석'이다.

양자적 대상이 관찰자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대상이 다른 물리적 대상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기술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작용하는 상호작용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세계는 상호작용의 촘촘한 네트워크다. 관찰자도, 나도, 광자나 고양이나 별과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네트워크의 동등한 실체일 따름이다.

닐스 보어가 말했다. "현상이 발생하는 조건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되는 측정기와 원자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그 원자계의 행동과 명확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로벨리는 이것이 이제는 실험실 밖 우주의 모든 물체에 적용되고 있다고 보았다. 대상의 속성은 그 대상이 다른 대상에 작용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물론 인간사회에도 적용된다. 나의 속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 다르게, 대상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 상호작용이 없으면 속성도 없다.

로벨리는 5장에서 보그다노프와 레닌, 그리고 마흐에 대해 평가한다. 레닌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주관적 관념론자요 버클리의 재탕이라느니 하며 혹독하게 공격했던 마흐를, 로벨리는 옹호한다.

양자역학을 개척한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등 양자물리학자들이 그랬듯이, 마흐는 물리학자이면서 철학자였다.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은 마흐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한다. 로벨리에 따르면,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그의 동료였다가 정적이 된 보그다노프와 마흐의 경험비판론 철학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했다고 한다.

레닌은 철저한 유물론의 입장에서 관념론을 대비시킨다. 레닌은 마흐를 비판하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엥겔스의 <반듀링론>을 인용했다. "사유는 어디서 이 근본 원칙(즉 모든 인식의 근본원리)을 끌어오는가? 자기 자신에게서인가? 아니다. ……이 형식은 사유가 자기 자신 내에서가 아니라 오직 외적 세계에서 창조하고 도출한 것이다. ……이것이 사물에 관한 유일한 유물론적 파악이며, 이와 반대로 듀링씨의 개념은 관념론적이며, 사물을 전도시키고 현실세계를 관념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리로 마흐를 비난한다.

로벨리는 이런 소박한 유물론을 비판한다. 우리는 보통 밖으로부터 전달된 시각정보를 뇌의 뉴런 네트워크가 해석해 식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다. 대부분의 신호는 눈에서 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뇌에서 밖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외부를 재현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하고 파악할 수 있는 정보로 수정한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을 수정하려고 노력합니다."

레닌과 로벨리, 누구의 관점이 옳을까? 인간은 구석기시대 이래 생존 본능에 따라 직관적 판단에 익숙해 있다. 위험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판단이 빨라야 생존할 수 있었던 경험이 짧은 경험으로 성급하게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데 익숙하게 된 것이다.

고정관념에 기초한 추론적 판단이라는 휴리스틱(heuristic)에 의존해 예측 가능한 편향(시스템적 오류)이 뇌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렇게 현대과학이 밝혀낸 사실을 고려하면, 인간의 의식은 사회적 존재의 반영이라는 유물론적 사고는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로벨리에 따르면, 마흐와의 논쟁에서 레닌은 이원론자로서 현상을 초월적 주체와 연관된 것으로밖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로벨리는 절대적인 실재의 개념을 부정한다. "실재는 상호작용의 그물망을 짜는 사건들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습니다. '개체'는 이 그물망의 일시적인 매듭에 불과합니다. 개체의 속성은 이러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순간에만 결정되며,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결정됩니다."

이것이 양자물리학이 증명한 실재의 모습이다. 상호작용의 그물망과 얽힌 관계가 없으면 나도 없고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은 맥락 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새로운 세계관이 열리고 있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은이), 김정훈 (옮긴이), 이중원 (감수), 쌤앤파커스(2023)


태그:#양자물리학, #로벨리, #하이젠베르크, #마흐,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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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한일장신대 교수, 전북민언련 공동대표, 민언련 공동대표,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등 역임,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리버럴아츠 미디어연구회 회장, MBC 저널리즘스쿨 강사,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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