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 을 / 잘 넘길 것' -식사법, 김경미
이 시 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삼켜봅니다.

말할 사람도 없지만 말없이 앉았습니다. 지난 일 년을 차근차근 되돌아 밟아갑니다. 그러고 보니 한 해를 잘 살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돌아보면 어느 하나 유순한 계절이 없었습니다. 봄은 가물어서 바스락거렸고 가을은 느닷없이 포근해서 갈팡질팡 했습니다. 장마는 한 달을 꼬박 채웠고 대부분 거친 비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폭우와 폭염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날씨는 그대로 계절이 됩니다. 계절은 정해진 것인 줄로 알고 살아왔는데 이젠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요.

특히 올여름은 괴팍했습니다. 어느 날 뒤란 하천 계단에서 덜컥 마주친 바위에 놀라 물었습니다. "너 왜 여기 있니?" 어른 배게 만한 돌덩이가 계단에 덩그러니 누워 나를 빤히 쳐다봅니다. 폭우에 불어난 물이 어디서부터 데리고 온 것인지 놀랍습니다. 때론 거친 것이 여름답습니다. 한참 그럴 때니까요. 하지만 요즘 날씨는 온 힘을 다해 악다구니를 쓰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습니다.

긴 장마에 집안에서 칩거하고, 뜨거운 햇볕에 두문불출했습니다. 가을을 훔쳐 간 교통사고만큼이나 모두 뜻하지 않은 일이죠. 시골에 살아보니 이처럼 오랜 시간 날씨에 연연한 적이 있었나 싶네요. 이제 '극한' 다음에 쓰일 말이 궁금합니다. 드러나지 않는 편안함 때문에 소중함을 잊고 홀대하니,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설경보 내린 날
 대설경보 내린 날
ⓒ 김은상

관련사진보기

 

밤새 눈 오고 날이 개었습니다. 쌓인 눈에 햇살이 부딪혀 더 밝은 아침입니다. 소복이 쌓여 만든 유려한 굴곡. 반송, 주목, 향나무... 바늘잎나무들에 꽃이 피었습니다. 기다란 고드름은 햇볕에 녹아 방울방울 떨어집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에 떠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멀리 있습니다. 선택한 고독의 댓가지요.

덮인 눈을 갈라 길을 만듭니다. 넉가래에 주욱 밀린 눈덩이가 귀찮은 듯 옆으로 돌아누워 버립니다. '며칠이든 그대로 두고 싶지만, 사람 사는 동네니 네가 비켜다오.' 점심때가 되어 앞집 할머니께서 팥죽을 쑤었다고 가져오셨습니다. "눈 치우느라 고생했네." 눈이 눈과 마주칩니다. '그것 봐라.'

호수도 살얼음에 쉬어가는데 해 저무는 이맘때면 아쉬운 시간만 재빨라집니다. 모두 지워버리려 눈 내렸건만 말라붙은 단풍잎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가지 끝에 매달려 있습니다. 잠시 소강상태인 눈은 오늘 밤 더 쏟아질 예정입니다.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며 체념케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다정인 건지 무정인 건지 내 일거리만 늘어납니다.

정원 한구석 눈더미를 비집고 풀잎 하나가 생뚱맞게 섰습니다. 문득 '어쩌면 나도 뽑혀 나갈 잡초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남몰래 멋진 이야기 하나를 품고 살았던 내 젊은 날의 모습이 아련합니다. 여름날엔 몰랐습니다. 경멸했던 사람들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일이 잦아지고,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고 모두 아는 척 가르치려 드는 날이 올 줄 말이죠. 솎아내기 전 이곳에 깃든 것이 다행이죠.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시골에 온 후론 눈 뜨는 것이 기쁩니다. 예전엔 아침마다 멍하니 갈피를 못 잡곤 했습니다. 살아온 날은 셀 수 있지만 살아갈 날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이 전부일지도 모르죠. 그래서 소중합니다. 반갑게 맞을 수 있다면 잘살고 있는 것이겠죠? 날 저물어 오늘 또한 지난날이 되었지만, 내일에 오늘이 오면, 눈 뜨자마자 또 한 번의 삶, 을 잘 넘길 것 같습니다.
 

태그:#눈꽃, #계절, #날씨, #시골생활, #은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은퇴한 초보 뜨락생활자. 시골 뜨락에 들어앉아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