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비밀처럼 텃밭 비닐 터널에서 배추를 꺼내옵니다. 팔팔 끓는 물에 육수 티백을 넣어 우려내고 된장과 고춧가루를 풀어 국물을 만듭니다. 칼날로 툭툭 쳐낸 배춧잎을 양파, 대파와 함께 냄비 한가득 채워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푹 끓여냅니다. 갓 지은 쌀밥 옆에 뜨끈한 배춧국 한 사발, 모락거리는 김 사이로 눈 덮인 마당이 어른거립니다.
 
텃밭이 준 것을 잘 간수하는 방법
 텃밭이 준 것을 잘 간수하는 방법
ⓒ 김은상

관련사진보기

 
데크에 걸어놓은 시래기가 바람에 흔들립니다. 채반에 널린 무채는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말랭이가 되어갑니다. 붉은 고추와 애호박은 바싹 말라 언제든 불러달라며 냉장고에 들어갔고, 곶감은 어느새 거무스름해졌습니다. 시선을 거두고 빼곡한 배추속대를 쌈장에 살짝 찍어 와삭 베어 뭅니다. 입 안에서 푸득 거리던 날것의 생기가 달콤 짭짜름한 장으로 천천히 녹아듭니다.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며 주말농장을 한 8년 정도 일궜습니다. 작은 씨앗을 심어놓으면 쑥 자라 이런저런 채소를 내놓는 것이 신기하더군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거저 얻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길러 먹는 재미에 푹 빠졌었죠.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옛말에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고'라는 말이 있죠. 몇 가지 즐거움이 더 늘었습니다.

보는 즐거움

텃밭 정원은 맛있는 꽃밭입니다. 머위와 대파, 산마늘꽃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향해 풍선껌을 붑니다. 고수와 부추, 바질꽃은 베갯잇을 뚫고 나온 솜털처럼 하늘거리고, 콩꽃은 날개를 활짝 편 배추흰나비가 됩니다. 아스파라거스는 왕겨, 호박은 스머프 모자, 고구마는 보랏빛 나팔, 감자의 꽃은 리넨블라우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미안하지만 옥수수꽃은 살찐 구더기, 방울토마토꽃은 젖은 (냄새까지) 행주... 아무튼 가지가지 배 터지게 피어납니다.

건강해지는 즐거움

은퇴 후 여가 활동으로 텃밭만 한 것이 있을까요? 먹고 보고 가꾸는 활동이 한 군데 어우러져 매일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햇볕과 하늘을 자주 보고 호기심과 미소가 늘어납니다. 다른 운동과 달리 뒤풀이가 요리로 이어집니다. 결실을 이웃과 나누니 소통하는 통로가 됩니다. 게다가 사계절 변화하는 텃밭에서 일하는 내 모습은 뚜렷한 추억으로 남게 됩니다.

계절을 먹습니다

끓는 소금물에 시금치를 살짝 데쳐서 간 마늘, 참기름, 참깨가루에 버무립니다. 마지막에 국간장과 액젓으로 간을 맞춥니다. 봄에 먹는 시금치나물입니다. 국수를 삶아 반쯤 얼린 냉면육수에 담가줍니다. 오이와 아삭이고추를 채 썰어 고명으로 얹고 깨를 듬뿍 갈아 넣습니다. 여름엔 시원한 냉국수죠.

가을 무는 수분이 많고 달짝지근합니다. 채 썰어 소금에 살짝 절인 무와 양파를 익혀 들기름을 뿌려 먹습니다. 건강한 사찰 음식의 맛입니다. 한겨울 이슥한 밤, 난로 속 장작이 벌겋게 타오르면 잊고 지낸 고구마를 불러냅니다. 달콤한 군고구마 냄새에, 후후 불며 껍질을 까는 동안에 이미 입안에서 녹아내립니다.
  
텃밭 정원에서 배웁니다

텃밭은 치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정원은 외부 시선을 궁금해 하지만 텃밭 정원은 바깥의 눈길엔 아랑곳없습니다. 꽃 피고 벌, 나비 날아들어도 그저 덤덤하게 채소를 키웁니다. 꽃들도 수수한 모습입니다. 열매까지 주는데도 말이죠. 덕분에 나는 내가 먹는 것의 출처를 알고, 그것을 먹을 사람을 떠올리는 기쁨을 간직하며, 겸손한 마음가짐을 배웁니다.

텃밭 농부도 농부, 농사를 짓습니다. 짓는다는 말은 아무 데나 붙이지 않죠.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습니다. 그런 걸 보면 지금 쓰는 글도, 농사도, 의식주만큼 중요한 것일 터, 기꺼이 밤새고, 손에 흙을 묻힙니다. 또 한 번의 계절과 새해에 대한 기대를 갖습니다.

태그:#텃밭, #정원, #키친가든, #시골살이, #전원생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은퇴한 초보 뜨락생활자. 시골 뜨락에 들어앉아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