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인간이라는 허울을 쓰고 있지만 그 속의 괴물들을 본 적이 있나요? 얼마 전에 한양에서 처참하게 죽은 미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 그 후 망자의 유품을 탐내는 두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답니다.  

"아버님, 어머님....
얼마 전에 한성에서 두창으로 토블레스Taubles씨가 사망한 끔찍한 사건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유품을 제가 수습해 놓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최근 푸트 전 공사가 유품을 자기에게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답니다. 자신이 토블레스 가족의 대리인이라는 거였어요. 아무런 공증도 없이 다짜고짜 그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또한 토블레스 부인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여성도 편지를 보내 왔답니다. 자기에게 유품을 보내 달라는 거였어요. 어린 아들이 한 명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적었더군요. 이들 편지는 단지 망자의 하찮은 물품을 다투고 있을 뿐,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해 조금도 진실된 감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저는 그 여성의 편지에 아무 대꾸를 하지 않을 겁니다. 푸트씨에게는 편지 한 장을 썼지요. 그의 행위와 무지에 무척 놀랐다는 것을 밝혔지요. 유품을 그 두 사람의 편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재판소에 보낼 생각입니다." - 1886.6.4 편지


부폐한 고기덩이를 탐내며 이빨을 드러내는 하이에나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 한편 당시 조선인들에게서 나는 슬픈 역설을 보았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낙오자가 된 그들의 내면 속에서 순수한 인간성을 보았던 것이지요.

지적 호기심과 순박한 심성으로 빛나는, 그리고 고유한 문화전통을 지닌 조선인들은 내게 슬픈 위안을 안겨주었지요. 아, 지상에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나도 모르게  조선인들에게서 동포애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조선은 미국에 대한 순진한 기대에 매달리고 있었는데 정작 미국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요. 그 중간에서 내가 느꼈던 심적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지요. 

"아버님, 어머님,....
우리 미국인들은 조선과 조약을 맺고 공사를 보내는 등 요란한 쇼를 벌였고 저는 제 능력 닿는 데까지 힘을 쏟았지요. 하지만 저는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미국이 수수방관함으로써 이 가련한 조선이 그간 누려온 독립과 평화마저 잃고 외세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저를 괴롭힙니다. .... 조선의 관리들이 저를 찾아와 미국 정부의 도움을 간청할 때에 제 눈에서 눈물이 나는 일이 많았답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도울 능력이 있고 또 그렇게 하면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할 텐데, 우리 정부는 벽창호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앞 길을 열어주라' 이 말을 저는 좌우명으로 삼고 힘이 닿는데 까지 그렇게 살려고 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단념하려고 애쓰는 중이지요." - 1886.5.14 편지


조선을 단념하려고 애썼지만 맘대로 되지는 않더군요. 조선의 자주독립을 박탈하여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청나라의 흉계만큼은 두고 볼 수 없었으니까요. 그리하여 나는 조선에서 청나라와 맞서게 되었습니다.

1886년 봄 청나라는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미국인 판사 데니를 파견하였습니다. 데니를 통해 조선을 움직이려 했던 것이지요. 하필이면 미국인을 고른 것은 아마도 중국인 특유의 이이제이의 술책이었을 겁니다.

눈엣가시 조지 포크를 같은 미국인으로 하여금 견제하려는. 중국의 간계대로 데니가 청나라 편에 선다면 조선은 급속히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지요. 나는 그런 상황만큼은 막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얼마 전에 청나라가 데니 판사를 조선에 고문으로 파견하였답니다. 조선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을 말입니다. 그는 어제 제물포에 도착했고 오늘 이곳 한양에 왔답니다.
그에게 거처를 구할 때까지 같이 지내자고 청했답니다. 다행히 그러자고 하더군요. 그를 묵게 하고 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저로서는 매우 수고로운 일이고 비용도 많이 들 겁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 1886.3.29 편지


데니를 보기 좋게 내가 선점해 버린 것입니다. 허를 찔렸다고 여긴 청나라 측은 데니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또다른 계책을 시도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한양에 온 데니 판사는 비록 청나라가 초빙하여 이곳에 부임했지만, 그에 대한 청나라의 태도가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청나라가 그에 맞서고 국왕은 그를 환영하고 있는 기묘한 형국이랍니다. 청국인들은 데니에게 온갖 애로를 겪게 함으로써 조선을 혐오하게 하려는 방책을 택하였답니다. 그러나 데니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오히려 자신을 해쳤을 뿐이지요. 이렇게 되도록 제가 한몫을 톡톡히 하였답니다. ... 데니 판사는 공사관에서 저와 함께 지내고 있답니다. 제가 그를 장악한 셈이지요. 그렇게 되자 조선인들은 무척 좋아하고 중국인들은 아주 싫어한답니다. 저는 데니에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식을 심어주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효과가 있어 기쁘군요." - 1886. 4.24 편지


그 해 봄이 무르익어 갈 때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 협정을 맺으려 했습니다. 조선 내에서 종교 활동의 자유를 원했던 프랑스는 종교자유 조항을 조약에 넣고자 했고 조선인들은 이에 완강히 맞서 애로에 봉착했습니다. 그 새를 놓칠새라 청나라가 방해 공작에 나섰습니다. 나는 조약의 성사를 위해 팔을 걷어부쳤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프랑스는 이제 막 조선과 조약을 맺었답니다. 청나라 측이 비열한 방해 공작을 벌였고 한때 화를 참지 못한 프랑스 공사가 조선을 떠날 뻔 하였답니다. 청나라가 원했던 바였지요. 그 시점에서 저는 국왕을 알현하였답니다. 그 결과 청나라의 반대가 제압되고 조약이 체결되었답니다. 청나라 측은 저를 눈엣가시로 여긴답니다. 원세개는 본국 정부에 전보를 보내 저와 데니를 힐난했다고 합니다. 그는 제가 아주 나쁜 놈이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게 더 나쁜 놈이 되고 싶습니다."
- 1886.6.4 편지


내가 7.1부터 두 달 간 한양을 떠나 있는 사이에 원세개가 반격을 가했더군요. 그 자는 고종 임금에게 통치권을 넘기라고 협박했습니다. 왕에게 러시아의 속국이 되려 한다고 힐난하면서 7만 5천 명의 군사를 불러들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실로 안하무인이었다고 합니다. 청나라가 국왕을 제거하려 한다고 여긴 백성들 사이에서는 동요가 일었답니다. 

나의 부재중에 조선 정부는 네 명의 조선 관리를 체포하여 참수형을 내렸답니다. 국왕의 가장 충실한 개화파 일꾼들을 체포한 것은 필시 원세개가 국왕의 손발을 묶기 위한 저의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중 두 사람은 나와 특별한 동지였지요. 한 명은 1884년 나와 동고동락했던 전양묵Chon Yang-muk이었구요. 다행히 데니가 국왕을 알현하여 요청한 덕에 참수형이 시행되지는 않았다고 하더군요.   

"아버님, 어머님...
제가 한양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런 소동을 방지할 수 있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저는 청나라의 술수를 잘 알고 또한 조선인들의 일하는 방식을 아니까요. 이곳의 외국인들과 몇몇 조선인들은 그 소란은 전적으로 제 탓이라고 말하는군요. 제가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 1886. 9.10 편지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조지포크, #원세개, #고종, #한불수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