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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한국의 대표적 민족종교의 하나인 원불교는 다른 민족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교조의 이적과 투철한 민족사상에서 발원한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은 1891년 5월 5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출생했다.

소태산은 궁벽한 산골 마을에서 '찬란한 한줄기 빛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아버지 박성삼과 어머니 유씨의 힘을 빌어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제주도에서 민란이 발생하고, 일본어선 수십 척이 제주도에 상륙하여 살인 약탈을 자행하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동학도들이 삼례집회를 개최하는 등 국정이 소연하던 시기였다.

소태산이 세 살 때 갑오농민 혁명이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네 살 때에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졌으며 을미의병이 전개되었다.
<원불교 입문서>에 따르면 '하나의 진리를 밝힌 새 부처님'으로 받드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소태산은 아호이고, 중빈은 이름, 대종사는 제자들이 부르는 칭호이다. 어릴적 이름은 진섭(珍燮)이고, 자라서는 처화(處化)였다.

소태산이 자랄적에는 국가 정세가 어려웠지만 정신적인 분야에서는 새로운 물결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천주교가 들어오자, 이에 대응하면서 전래의 고유신앙의 비결을 결부시켜, 개벽이라는 대운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민중의 염원에 힘입어, 몇 갈래 신생 종파가 생겨났다. 수운 최제우의 인시천(人是天), 증산 강일순의 후천개벽, 소태산 박중빈의 일원상(一圓相) 사상이 경쟁적으로 창도되기에 이르렀다.

원불교에서는 이 무렵 선지자들의 후천개벽의 순서를 날이 새는 것에 비유하여 "수운의 행적은 밝으려 하매 그 다음 소식을 알린 것이며, 소태산은 날이 밝으매 그 일을 시작하신 것이라 주장한다. 또 "일년 농사에 비유하자면 수운은 해동이 되어 농사지을 준비를 하라 하신 것이요, 증산은 능력의 전후를 일러 준 것이고, 소태산 박중빈께서는 직접 농사법을 지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태산의 어린 시절은 유별났다. 궁벽한 산골이라 달리 교육기관이 있을 리 없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렇다고 따로 선생을 불러다 한학을 공부할 처지도 아니었다. 교육이라고 해야 이웃 마을의 한문 서당에 다닌 것이 전부였다.

부친을 따라 종중의 시향제에 참석했던 소태산은 산신(山神)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을 뒷산에 올라 마당바위 위에서 5년간이나 기도에 정성을 드렸다 대낮에도 인적이 끊긴 곳에서 밤낮을 잊고 눈·비를 가리지 않고 더위와 추위를 견디며 기도를 하였다.

15살 때 부모의 뜻에 따라 이웃 마을 양하운과 결혼한다. 결혼을 하고도 살림은 부인에게 맡기고 기도에만 열중했다. 연희봉 봉우리에 움막을 짓고 수행에 전념했다. 몇 년이나 계속되는 입정(入定)이었다.

그런 소태산에게 혹독한 시련이 찾아온다. 제대로 먹지도 활동하지도 않고 기도에만 열중한 나머지 병마가 찾아든 것이다. 해소증으로 심한 기침을 하게 되고 온 몸에 검붉은 종기가 생겨 고름이 되어 엉겨붙었다. 피골이 상접하여 행색은 마치 해골과 같이 변해 갔다. 가족의 걱정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 사람들도 폐인 취급을 하게 되었다. 인근에서는 나병에 걸렸다는 악소문까지 나돌았다. 온몸에 고름이 엉겨붙은 모습을 지켜 본 사람들이 나병 환자로 오인하게 된 것이다.

육신만 병으로 시달린 것이 아니었다. 정신이 드는가 하면 꺼지고 분별이 있다가도 없어지는 등 혼미와 혼돈의 상태가 지속되었다. 부인은 남편의 회복을 위하여 수많은 날을 뒷바라지 했다.

소태산은 5년간의 고행 끝에 26살이 되던 1916년 4월 28일,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노루목 대각터에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청풍월상시만상자연명'(淸風月上時 萬像自然明, 맑은 바람에 검은 구름이 걷히고 달이 떠오르니 만물은 자연히 드러나도다). 이 시는 그가 대각을 이루면서 읊은 것이다. "만유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이름을 지었도다"-의 '대각일성(大覺一聲)'이었다.

소태산은 대각 후부터 외모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질병이 없어지고 건강이 회복되었다. 어려서부터 건장했던 그는 대각 이후에 육체적 건강에 정신적 득도가 함께 하면서 키 180cm, 몸무게 90kg의 우람한 체구에 얼굴은 보름달같이 훤하고 피부는 맑으며 눈은 청량했다. 목소리는 우렁차고 성격은 대범하여 시퍼런 기상이 육신을 감돌았다. <원불교전서>는 그 달라진 모습을 "보는 이들 누구나 정신이 황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태산이 곧 새 교단을 열 의사를 밝히자 인근에서 4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 8명을 교단 건설의 일꾼으로 뽑고, 이 제자들로 '10인 1단'의 단을 조직했다.

새로운 교단을 창설한 소태산은 '저축조합'을 만들어 여러가지 생활개선운동을 폈다. "우리의 생명 보호에 별다른 필요가 없는 술과 담배를 끊자. 과거에 매일 얼마 가량 소비되는가를 환산해서 그 소비대금을 저축하자. 의복이며 음식도 최대한 절약하자. 과거의 노는 날도 최대한 축소하여 일을 더 하고 그 수익금을 저축하자. 부인에게 부탁하여 끼니마다 보은미를 저축하자"는 운동이었다.

대부분의 종교·종파가 피안이나 유토피아를 찾는데 비해 원불교는 생활개선을 통해 현실적인 삶의 복락을 누리고자 했다. 새 교단 설립의 기초가 저축조합으로 마련되면서 일본에 숯을 팔아 돈을 모으고 이것을 기금으로 간척사업을 벌였다. 일본에 나라를 잃고 농민들은 농토를 빼앗겨 혹심한 가난에 직면해 있으니 농민이 사는 길은 버려진 땅 갯벌을 막아 간척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척사업을 벌여 영광에 면적 4만1천89평의 새 농토를 만들었다.

소태산은 이 간척사업으로 총독부 경찰에 연행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의 자금을 지원받지 않았는가, 위조지폐를 만들지 않았는가를 집중 조사당했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생활개선운동과 간척사업을 하는 한편 1921년 변산의 월명암에서 수도에 정진하면서 교리 초안에 주력한다. 여기서 그는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창도했다. "일원(一圓)은 우주만유의 본원이고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안(心眼)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며,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이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이며 언어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다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十方三界)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모유(眞空妙有)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립(無時鑛粒)에 은현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원불교의 교리를 선포한 소태산은 전통적인 불교와는 크게 달리 불교의 현대화·생활화를 주창하여 신앙의 대상을 불상이 아닌 법신불(法身佛)의 일원상(一圓相, 'ㅇ'으로 표현)으로 삼고, 시주·동냥·불공 등을 폐지하는 대신, 각자 적당한 직업에 종사하여 교화사업을 시행한다는 생활불교철학을 내세웠다. 소태산은 1943년 52살로 열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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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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