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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국민사형투표〉의 한 장면
 드라마 〈국민사형투표〉의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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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누군가가 잔혹한 방식으로 희생되었다. 피해자는 선량한 누군가다. 어린아이일 수도 노인일 수도 있고, 여성일 수도 남성일 수도 있다. 범죄를 저지른 자는 죄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는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범죄가 명백하게 드러나면, 그제야 늘 들어왔던 변명대로 술을 마셔서 혹은 마약을 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며 '심신미약'을 주장한다. 그리고는 반성문을 끊임없이 제출한다. 반성의 대상은 피해자나 그 가족들이 아니라 죗값을 결정할 판사님이다.

이야기의 결말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판결문에 나오는 표현을 따르자면 "범죄의 잔혹성은 인정되나 초범이고 심신미약의 상태에 놓여있었으며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범죄자에게 아주 가벼운 형량이 구형되리라는 것을. 범죄를 다루는 기사·영상 콘텐츠에 댓글을 다는 사람 대다수는 범죄를 둘러싼 여러 쟁점 가운데서도 형량 문제에 가장 분노하는데, 현실이 이쯤 되면 상황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범죄가 제대로 단죄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정의'는 꽤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마음껏 복수해도 돼, 나는 절대 범죄자가 아니니까"

트렌드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는 드라마 제작사들이 요즘 주목하는 주제는 바로 '사회적 정의'다. 그러나 이 정의는 지나치게 좁고 한정적이다. 부정한 것을 제거하는 정의, 즉 정의를 세우기 위한 '복수'다. 복수를 통해 부정한 것이 사라져야 사회적 정의가 유지된다고 믿는 것이다. 복수의 대상은 악마처럼 잔혹한 개인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 드라마에서는 법이 아니라 국민이 전격적으로 범죄자의 생사여탈을 쥐고 죄를 심판하는 〈국민사형투표〉가 진행된다. 누구보다 법의 엄정함을 믿어야 하는 예비 경찰이 범죄자를 처단하기 위해 살인을 불사하는 자경단 〈비질란테〉가 되기도 한다. 화제작이었던 〈더 글로리〉 역시 사회가 지켜주지 못한 피해자가 마침내 자신을 망가뜨린 사람 모두에게 처절한 복수를 이루는 과정을 다뤘다.

하지만 우리가 통쾌한 복수극을 보면서 간과하는 것이 있다.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은 복수를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의 약점을 잡아 협박한다. 이를 위해 불법적으로 정보를 얻어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범죄자의 가족들이 잘못도 없이 고통을 받기도 한다. 매운맛 복수를 신나게 구경하면서 우리는 동은의 부정한 행동에 대해 쉽게 눈을 감는다. 어쩌면 동은은 사회 전체에 복수하는지도 모른다. 복수를 정당화해 정의를 흐트러뜨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법을 어겨서 범죄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법이 정의의 제약이자 족쇄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정의를 세운다는 이유로 범죄가 용인된다면 결국 '부정을 통해 정의를 세운다'는 역설적인 구조가 굳어지게 된다. 이는 곧 사회를 구성하는 기틀이 흔들릴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사적 복수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단순히 상상 속 '사이다' 체험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위태로운 징후로 읽어낼 필요가 있다.

'공적 처벌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처벌 수위에 만족할 수 없다면 개인이 나서야 한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면서 사적 복수는 점차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최근 가장 큰 논쟁거리는 바로 '신상 공개'다.

신상 공개 제도가 시행되면서 특정한 강력범죄나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일부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되고 있지만, 사람들의 바람을 충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언론은 저버릴 수 없는 보도 윤리가 있으니 신상을 공개할 수 없는 범인을 "A씨" 또는 "O씨" 등으로 호명한다. 그러면서도 '알 권리'를 내세워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며 막연한 불안감을 조성한다.

이럴 때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유튜브나 SNS다. 이들은 언론의 마지노선을 가뿐히 뛰어넘고 피의자 정보를 빠르게 취합해 신상을 공개한다. 얼핏 보면 마치 공익을 위한 행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상 공개를 통해 알 권리가 충족되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부여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이 신상 공개를 반기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우리는 범죄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언제나 사회 구성원의 위치는 엄격한 구분과 구별을 통해 정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범죄자와 '나' 사이에 엄격한 구분선이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나'와 달리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1)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분노의 땔감으로 무엇을 소비하고 무엇을 얻는가

하지만 범죄자를 향한 사회적인 공분은 수많은 이야기를 눈덩이처럼 불린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무분별한 대중의 분노다. 물론 사회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분노가 필요하다. 형사소송법 개정안(일명 '태완이법')2)이나 아동학대범죄 처벌 특례법 개정안(일명 '정인이법')3)과 같은 경우 분노를 통해 사회 시스템이 부족하나마 일부 바뀐 사례다. 제도의 한계와 문제점도 명확하지만, 분노가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그러나 작가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은 <분노하라>라는 책을 통해서 분노하는 우리가 힘 있는 투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한계를 아주 명확하게 제시한다.

지금은 도에 넘치게 분노하는 일이 자꾸 발생한다. 사람들이 직접 범죄자를 심판하는 것이다. 얼마 전 악성 민원에 시달렸다고 알려진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SNS를 통해 가해 학부모의 신상이 공개되었다. 이후 가해 학부모 영업장에는 근조화환이 배달되고 달걀이 투척되기도 했다. 사건에 분노한 사람들이 직접 처벌을 행사한 것이다. 하지만 법의 테두리에서 처벌받지 않은 자들을 이렇게 사적으로 직접 심판한다면 이후에도 법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이미 법의 테두리를 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대에 세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회자하면서 무가치한 존재가 되길 바랐던 범죄자의 영향력이 오히려 커진다는 점이다. 분노를 자아내기 위해 강력한 서사가 부여될수록 범죄자는 점점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다시 신상 공개를 생각해보자. 피의자 신상이 공개되면 사람들의 호기심이 해소될 것 같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사적 복수, 특히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는 복수의 감정은 땔감이 있어야 타오른다. 또 다른 이야기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야기가 자극적이고 세부적일수록 악인을 처단하는 카타르시스도 극대화된다. 범죄사실이 구체적으로 명시되면서 범죄자는 무조건 제거할 대상이 된다. 급기야 사적 복수를 통해서라도 죗값을 치르게 만들 정당성이 부여된다.

누군가는 "너 또한 같은 상황에 놓이면 사적 복수를 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처벌이 자의적으로 벌어진다면 보편적 정의는 퇴색하고 만다. 누구도 지키지 않는 법이 과연 존재 가치가 있을까? 무법 사회가 과연 존립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회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와치독(watchdog)4)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모든 것을 심판하는 개탈5)이 되어서는 안 된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하나 더 있다. 피해자의 입장이다. 앞서 살폈듯이 사적 복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서사가 없다면 누구도 정의나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피해 사실은 적나라해야 한다. 피해자가 느꼈을 고통이 가혹할수록 우리는 더 쉽게 더 크게 분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이 공론화되길 원할까. 범죄의 특성에 따라서는 피해자의 명예가 실추될 수도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피해자에게 가혹한 잣대를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기나 성범죄를 당한 사람에 대해 '피해를 당할 만했다'는 식으로 뒷말이 돌기도 한다.

대중의 알 권리만큼이나 피해자의 잊혀질 권리 또한 중요하다. 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것은 달리 보면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말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미 이슈가 지나가면 진실 같은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니.

오늘도 범죄 이야기는 여기저기를 떠돌고, 가벼운 처벌로 인한 분노는 또다시 사람들을 움직인다. 그러나 이러한 복수를 통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야말로 고작 잠깐의 가담항설(街談巷說) 6)은 아닐까. 과연 이것을 정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면서 기어코 우리가 얻어내야 하는 것은 진짜 정의, 더 큰 변화여야 한다.

1) 희생제물은 아니지만 죽여도 살해의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이다. 법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를 뜻한다.
2) 살인죄로 법정 최고형이 사형에 해당할 경우 공소시효를 무기한 연장하는 법안
3) 아동을 학대하고 살해한 경우 사형이나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법안
4) 감시인 또는 감시단체
5) 웹툰과 이를 원작으로 하는 동명의 드라마 〈국민사형투표〉에 등장하는 악역. 법의 사각지대를 빠져나간 '무죄의 악마'들을 처단하는 자경단원이다.
6) 길거리나 세상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 세상에 떠도는 뜬소문을 뜻한다.

덧붙이는 글 | 글 한유희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3년 12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태그:#사적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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