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한국불교사에서 신비와 이적, 불가사의한 부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千佛山) 기슭에 있는 운주사 천불천탑(千佛千塔)은 그 대표적이다.

운주사는 사찰의 이름부터가 雲住寺, 運舟寺, 運柱寺, 雲柱寺 등으로 쓰인다. 대체로 학계나 불교계에서는 雲住寺로 쓰고 있다. 운주사가 여러 가지 한자로 쓰일만큼 천불천탑의 창건 연대와 목적, 창건의 주체, 소실 연대 등이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운주사 천불천탑에 대한 불가사의는 날이 갈수록, 연구가 거듭될수록 신비성이 더해간다.

대초리와 용강면 일대 산등성이와 계곡의 일정한 공간에 1백여 분의 돌부처와 30여 기의 석탑이 여기저기에 널려져 있는 모습은 세계불교 사찰에서 찾아보기 쉽지않은 현상이다.

운주사의 돌부처가 더욱 신비스러운 것은 정통불상의 일반적인 통념을 깨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의 위엄과 자비스러운 모습은 찾기 어렵고 제멋대로 각양각색이다. 파격적이기는 불탑도 마찬가지다. 정통적인 불상과 불탑의 형태가 아닌, 멋대로 새긴 불상이며 멋대로 쌓은 불탑이다. 석불과 석탑의 조각솜씨가 너무나 초솔한, 그래서 이곳이 과연 불교사찰인가 아니면 도교나 무속의 터전인가 헷갈리게 한다.

당초 운주사 주변에는 1천 개의 불사와 1천 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1백여 분의 불상과 20여 기의 석탑만 남아 있다.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이토록 기기묘묘한 불상과 불탑을 세웠을까. 도선(道詵)의 풍수설에서 민중해방설 그리고 외계인설까지 각가지 창건설과 설화가 따르고 있지만 신비성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운주사의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와불(臥佛)이다. 서쪽 능선 천연 암반 위에 고부조로 새겨 놓은 쌍불의 '누운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부처상이 앉거나 서 있는 통념을 깨고 누워 있는 모습이다.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태평성세가 이룩된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천불천탑을 누가 세웠는가를 두고 여러 가지 그럴듯한 설이 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통일신라 말의 선승 도선(道詵)의 건립설이다. 전남 영암 출신으로 풍수설의 대가인 도선은 '비보사탑(裨補寺塔)' 설을 펴왔다.

비보사탑설은 지기(地氣)는 왕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는데, 쇠퇴할 때 그곳에 자리잡은 인간이나 국가는 쇠망하기 마련이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산천의 역처(逆處)나 배처(背處)에 인위적으로 사탑을 건립해 지기를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산천지세에 어긋나게 하거나 비보를 믿지 않고 사원불탑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불행하게 되는 재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비보사탑설은 신라 쇠망의 한 원인을 사원남설에 따른 지덕손실에서 찾아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해주어 고려태조에 의해 신봉되었으며 이후 고려시대를 통해 널리 확산되었다.

고려는 국가적 차원에서 비보사원을 장려하고 보호했으며 <도선비기(道詵秘記)>에 지정된 비보소(秘補所)가 3800개 소에 달했다.

도선이 중국에서 풍수지리설로 명성을 떨치고 돌아온 뒤 전국의 산천을 돌아보고 우리나라는 배(舟)가 운행하는 형세이니 각 지역에 사탑과 불상을 세워 비보진압(裨補鎭壓) 해야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운주사는 배(腹)에 해당되므로 천불천탑을 세워 진압했다는 것이다. 이곳을 진압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운세가 일본으로 흘러가게 되므로 도선이 하룻밤 사이에 도력으로 천불을 세워 사공으로 삼고 천탑을 노로 삼아 비보진압했다는 설이다.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 실린 <도선국사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우리나라 지형은 떠가는 배와 같으니 태백산, 금강산은 그 뱃머리이고 월출산과 영주산(한라산)은 그 배꼬리이다. 부안의 변산은 그 키이며, 영남의 지리산은 그 삿대이고 능주(화순)의 운주(雲株)는 그 뱃구레(船腹)이다. 배가 물 위에 뜨려면 물건으로 그 뱃구레를 눌러주고 앞 뒤에 키와 삿대가 있어 그 가는 것을 어거해야 그런 연후에 솟구쳐 엎어지는 것을 면하고 돌아올 수 있다.

이에 사탑과 불상을 건립하여 그것을 진압하게 되었다. 특히 운주사 아래로 서리서리 구부러져 내려와 솟구친 곳에 따로 천불 천탑을 설치해 놓은 것은 그것으로 뱃구레를 채우려는 것이고, 금강산과 월출산에 더욱 정성을 들여 절을 지은 것도 그것으로써 머리와 꼬리를 무겁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다른 도선 창건설은 다음과 같다. "도선이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고, 선복(船腹)에 해당하는 호남땅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곳에 천불천탑을 하루낮 하루밤 사이의 도력으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이 설을 뒷받침 하듯이 절에서 가까운 춘양면에는 돛대봉이 있는데, 돛대봉에 돛을 달고 절에서 노를 젖는 형세라 한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누가 세웠는가는 도선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전한다. △통일신라 말에는 능주지방의 호족세력이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박경식), △역시 통일신라 말 능주지방에 이주해온 이민족 집단에 의해 개창되었다는 설(신영훈) △운주사의 인근 쌍봉사에 주지로 있던 고려 무인정권기의 실권자 최항이 속세로 돌아오기 전에 몽고 침략을 물리칠 염원에서 세웠을 것이라는 설(최완수), △미륵의 혁명사상을 믿는 천민들과 노비들이 들어와 천불천탑과 사찰을 짓고 미륵공동체 사회를 열었다는 설(박태순) △불교사원이 아닌 도교사원으로 건립했다는 주장(신영훈) △불교사찰이 아니라 범자(梵字) 옴마니반에홈이 새겨진 숫막새와 암막새가 발굴되었다는 점이 들어 밀교사원이라는 설(고유섭) △민간신앙의 기복처라는 설(문경화) △불교사원이 아니라 천민과 노비들의 해방구역으로 세계역상 유례가 드문 중세시대 노예의 자유민, 자치구역의 역사적 유지라는 설(힐트만) △백제 유민들이 백제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창건했다는 설(강형구) △고려시대의 명승 혜명이 건립했다는 설(동국여지지) △칠성바위를 보고 칠성신앙과 관련된 민간의 기복처러 보는 민간신앙설 등 다양하다.

이밖에도 △이형(異形)의 석탑과 석불의 형태를 들어 외계인이 조성했다는 외계인 내왕설 △고려시대 몽골 침략시 몽고인이 건설했다는 설 △역성혁명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이곳으로 숨어든 반역집단이 조성하였다는 설까지 추가된다.

문학소설에는 황석영이 <장길산>에서 관군에 패한 장길산이 능주로 숨어들어 와서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가설이 있고, 이재운은 소설 <토정비결>에서 황진이의 미모에 빠진 지족선사가 속죄의 마음으로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픽션을 제시하고, 박혜강은 소설 <운주별곡>에서 고려 무인시대 노비 만적 일당이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노비 해방을 기원했을 것이란 상상력을 동원했다.

과연 운주사에 천기(千基)의 석불과 석탑이 있었느냐는 의문도 따른다. 불교에서 천(千)은 무량무수(無量無數)의 여래를 나타내고, 과거·현재·미래 삼세(三世)의 삼천불 가운데 현세의 천불(千佛)은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가득한" 개념을 가진 상징적 의미로만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천탑을 세운 시기와 관련하여 양식기법이 13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최씨 무인정권시기 몽고침략에 시달릴 때로 추정한다. 몽고 침략기에 팔만대장경을 경판하여 신불(神佛)의 힘을 빌려 침략군을 격퇴시키고자 했던 시기와 비슷하다. 불상은 진경시대의 기법을 보이고 있어 조선조 영조 후반기 내지 정조 시대의 조성인 듯하다는 주장이다.(최완수)

"운주사의 돌부처는 하나하나 뜯어보면 한결같이 못생겨서 부처의 위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수가 없다. 코 입은 물론 신체 비례도 제대로 맞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정통불상이 지닌 도상에서 크게 어긋난 파격적인 형식미를 띤다. 석탑도 마찬가지이다…. 정형이 깨진 파격미, 힘이 실린 도전적 단순미, 친근하면서도 우습게만 느껴지는 토속적인 해학미와 아울러 그것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집단적으로 배치된 점이 운주사 불적의 신선한 감명이며 특별한 매력이다."(이태호)

운주사 천불천탑의 신비와 불가사의는 한국불교와 과학이 풀어야할 과제이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