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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8월 14일 김대중씨가 동교동 자택에서 친지들의 전화를 받고 있다.
 1973년 8월 14일 김대중씨가 동교동 자택에서 친지들의 전화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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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납치사건 관련 김대중의 육성 증언자료 2개를 공개했다. 첫 번째는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직후인 8월 13일 동교동 자택에서 진행한 기자회견 자료다. 일본 도쿄에서 실종된 김대중이 5일 만에 동교동 자택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외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 기자회견이다.

두 번째는 가택연금이 해제된 1973년 10월 26일 며칠 뒤인 10월 말에 <뉴스위크> 동경지국의 버나드 크리셔 기자와 진행한 인터뷰 자료이다. 8월 13일 생환한 김대중은 8월 16일부터 동교동 자택에 연금됐다. 죽을 고비, 투옥, 망명 등과 함께 김대중의 고난사를 상징하는 가택연금의 시작이었다. 이날 시작된 첫 번째 가택연금은 그해 10월 26일까지 70여 일 동안 이어졌다.

김대중납치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크게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이 가택연금을 당해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김대중은 "일체 외부하고는 차단돼서 내 비서나 말하자면 동생들도 여기 출입 못하고.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집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게 되고. 전화도 받지 못하고"라고 증언했다.

이런 상태다 보니 언론의 취재는 불가능했다. 그런 상태에서 70여 일이 지나 10월 26일 김대중에 대한 가택연금이 해제되자 언론의 취재가 가능해졌다. 이때 당시 엄혹한 국내 분위기 탓으로 해외 언론이 주로 취재를 했다. <뉴스위크> 버나드 크리셔 기자와의 인터뷰도 이때 이뤄졌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2개의 자료에는 피해자인 김대중의 육성 증언이 담겨 있다. 특히 이 증언은 사건 발생 직후 및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뤄졌기 때문에 이 사건의 역사적 실체를 파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사건 발생 원인, 납치과정,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게 된 과정,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오게 된 과정 등 피해자만이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 등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김대중,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 과정을 증언하다
  
▲ 죽음의 문턱, 절체절명의 순간 김대중이 한 행동 [1973년 인터뷰 ②]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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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증언은 8월 8일 일본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당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강제로 납치당해 호텔에서 차로 끌려간 이후 여러 곳을 거쳐 이동하다가 큰 배로 옮겨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 이후 수장(水葬)당하기 직전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팔 옆에다가 한 물체가 한 50kg 정도, 돌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걸 딱 달았어요. 그러고 이 팔은 또 저쪽으로 해서 어깨로 해 가지고 뭔 다른 걸 길게 해서 줄을 매었고, 그래서 그 줄을 상당히 길게 매어 놨어요. 그리고 이제 발을 쭉 뻗으니까 이 발을 양쪽으로 묶었는데, 이렇게.

그래서 이제, 그래 이제 발은 이렇게 밧줄로 양쪽을 묶어가지고 그래가지고 이쪽으로 해서 저기다가 아, 역시 무게가 한 50kg가 되는지, 상당히 무거운 무게라 했는데 왜 50kg라고 내가 생각을 하냐면 두 발을, 두 발이 나중에 오래 있으면 아파서 말이야. 조금 이렇게 당기려 해봐도 끄떡을 안 해요 … 그렇게 묶어서. 그래서 저는 이제 거기서 던진다고, 아주 던질 단계인데 뭐 얘기들을 한 걸 보니까 그렇게하면 빠진다고들 하고 말이지. 뭐,

물을 물이 솜이불을 붙여놔야 물이 차니까 안 떠오른다는 얘기도 하고, 그리고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하는게 '후카'란 소리를 해요 후카(ふか,鱶)라는 소리면 그 상어가 잡아먹기 좋게 한다. 그런 얘기 같아요.
 
이는 상어밥이 되도록 한다는 소리다. 온몸이 결박당해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수장시키려는 공작원들의 말을 직접 들어야만 했던 김대중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으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이때 김대중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를 했다고 한다.
 
정말 예수님께 매달렸죠. 살려달라고. 그러면서 내가 기도하면서 좌우간 내 목숨도 물론 내가 아깝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그래도 국민이 나 같은 사람한테 어느 만큼 기대를 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죽고 나면 대신이 없소.

그러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국민을 불쌍히 생각해서라도 나보다 더 좋은 대신이 나올 때까지 내 목숨을 살려달라고. 그러면서 내가 예수님한테 말했어요. '내가 이때까지 예수님을 믿었지만 한 번도 나를 위해서 요구한 일이 없지 않소? 이번이 내가 단 한 번 마지막 요구니까 이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하고 내가 기도를 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기도한 김대중의 심경을 잘 알 수 있는 증언이다. 이때 비행기가 나타났고 그 이후 배 안에서 여러 소란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김대중을 수장하려는 시도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때를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 순간으로 회상했다.
  
김대중이 극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
 
▲ 김대중이 말하는 납치사건의 이유 [1973년 인터뷰 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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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버나드 크리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살아날 수 있게 된 원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를 납치한 사람들이 그렇게 참 뭐랄까, 일본이나 해외 여론이 그냥 그렇게 비등할 줄은 몰랐고, 몰랐다는데 그 여론이 너무도 격렬한 반발이 나오는데 당황했다는 게 하나. 또 하나는 여기 많은 국민들은 오히려 일본보다는 말이야, 미국 정부의 참 영향력이 컸다. 이렇게 보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열세 번 조사 한 가운데 저쪽 사람들 만나면 내 인상으로는 말이에요. 만일 나를 죽였을 때 국내에서 대단히 어려운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하는 그런 판단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그 서너 가지가 이유가 아니냐? 이렇게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보고 있어요.
 
인터뷰가 이뤄진 시점은 사건이 발생한 8월 8일에서 80여일 지났기 때문에 그동안 김대중은 여러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개입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대중은 미국의 개입으로 살아돌아올 수 있었다. 미국이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은밀하게 진행되어야할 김대중에 대한 공작이 사건 발생 직후부터 외부에 다 앝려졌기 때문이다.

먼저 납치할 때부터 소란이 발생하여 이들의 범죄행위가 주변에 노출되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공작을 수행해야 하는데 쥐도 알고 새도 알게 되어버렸으니 납치범들은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들은 현장에 너무 많은 증거들을 남겼다. 범죄와 관련된 각종 물품을 챙기지 못했고 심지어 현장에 있던 한 공작원은 지문을 남겨서 나중에 신원이 발각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호텔을 떠날 때 주차비를 내지 않고 도주하듯이 떠나서 범죄에 이용한 차량번호를 노출시키기도 했다.

이 공작의 의도, 목적, 파장 등을 감안하면 믿기 힘들 정도로 허술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이 공작은 너무 위험하고 수행하기 매우 어려웠는데 윗선의 강력한 압박에 의해 무리하게 이뤄지다보니 곳곳에서 여러 한계가 나타난 것이다. 이 공작은 기획단계부터 내부 반발이 심했고 끝까지 이를 반대한 모(某) 인사는 익명으로 김대중 측에 정보를 제공할 정도였다. 그러니 여러 무리수가 나온 것이다.

또한 익명의 제보에 의해서 이러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에 김대중 측은 김대중의 신변안전을 위해 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부터 신변안전에 유의를 했고 일본에 와서는 젊은 한인운동가들을 경호원으로 붙였고 숙소를 수시로 바꿔 김대중의 동선이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건 발생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재일 한인운동가들은 이것이 유신 정권의 소행이라고 일본과 해외 언론에 폭로했다. 그렇다보니 미국이 이 사건의 성격과 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김대중, 다시 죽을 고비가 온다고 해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다
  
▲ 김대중 "신변 위협 때문에 소신을 포기하진 않는다" [1973년 인터뷰 자료 ⑧]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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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이 사건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특히 공작원들이 김대중을 수장하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 한 여러 언행은 그에게 엄청난 공포였을 것이다. 다행히 극적으로 생환했지만 그 충격은 잊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앞으로도 자신에게 여러 위험이 닥칠 수 있지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나는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내 몸의 위험이 없을 수 없다,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위험, 몸의 위험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진 않는다. 그것이 내 소신이에요.

나는 내가 참 국민을 위해서 이 나라 민주주의 위해서 바른 길을 가는 이상은 결코 국민이 나를 도와줄 뿐 아니라, 또 설사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국민이 그 나의 뜻을 말이지, 그대로 발전시킨다 하는 데 대한 내 신념이 있다 그것입니다.

김대중은 이 사건 전에도 두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까지 하게 되자 그는 생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초월하면서 강인한 정신력을 갖게 된 것 같다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내가 6.25 때 공산당한테 잡혀가서 사형장에서 220명 중에서 한 70명 사는 데서 뛰어나와서 살았거든요. 또 지난 재작년 자동차 사고로 내게 자동차를 들이받아갖고 그래서 세 사람이 즉사할 때도 10초에, 참 1초에 10분 1 정도 위기로 살아났고 또 그런 경험이 또 일곱 번 그동안에 형무소 투옥됐고 그런 여러 가지 참 심각한 체험이 나로 하여금 비교적 이런 일에도 정신적으로 지탱해 낼 수 있는 그런 좋은...

이처럼 김대중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경험을 오히려 자신의 정신력을 강화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면서 그는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밝은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준비를 병행했다. 그의 뛰어난 위기관리 리더십, 위기극복 리더십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이번에 공개한 자료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유튜브(클릭)를 통해서 확인 가능하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M3KYQ3ld15HomnMktbePtc7he0Ffwuws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과 중국>(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이며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태그:#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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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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