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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찬 바람이 매서운 2월 중순.

이순신 장군은 목포의 고하도에서 강진현의 고금도로 진을 옮기고 시름에 잠겨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 잠시 꿈결을 거닐었다. 

″장군, 가리포진 첨사 이영남입니다.″

″장군을 생각하여 얼마 전 담근 백일주가 잘 익어서 조금 가져왔습니다. 시위를 당기시기 전 목이라도 축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 참으로 고맙네..."

평소 휘하의 참모들과 술을 즐겨 마시던 장군은 가리포 첨사 이영남이 건네ㅌ준 술을 마시려는 순간 스산함에 추위를 느끼며 눈을 뜨니 꿈이었다.
 
은행나무에서 바라본 약산면 활목
 은행나무에서 바라본 약산면 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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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 16일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431년이 되는 해이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막바지인 1592년 2월 17일 진영을 목포의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옮기고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정유년에 재침범한 왜군들이 보급로의 차단과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쳐 이제 전쟁은 막바지 소강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고금도 덕동에 진을 치고 머물자 3월부터 명나라 수군들이 속속들이 도착하였고, 7월에는 수군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마지막 수군을 거느리고 고금진에 도착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조명연합수군이 탄생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호국의 성지 고금도를 지키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으니 윤동마을의 사장(射場)나무인 수령 480여 년의 은행나무이다. 지난 1982년 나무 주변이 산림유전자보호구역으로 편입되고 보호수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20여 미터이고, 흉고가 4미터이다.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평소 활쏘기를 밥 먹듯이 하였던 이순신 장군은 이 나무 아래에서 휘하의 군관들과 화살을 쏘았다고 구전되고 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활을 쏘면 보통 10순(1순은 화살 5발)을 쏘는 경우가 많이 기록되고 있다. 

휘하의 첨사나 부사 등이 장군을 찾아왔을 때 회의를 마치거나 대화가 끝나면 반드시 활을 쏘았다. 음주 후에도 5순 정도의 활을 쏜 기록으로 보아 고금진에서의 군영 생활이 길지 않았음에도, 이순신 장군은 이 은행나무 아래서 수없이 많은 활을 쏘았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수군 7000여 명, 명나라수군 5000여 명으로 조명연합수군 연합함대를 편성하고 훈련에 들어갔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머물던 순천 신성포의 왜교성(倭橋城)으로 7월에 출진(出陣)하여 같은 해 11월 노량(오늘날의 남해군)에서 왜군들을 무찌르고 전쟁을 마쳤다. 

윤동의 은행나무 아래서 궁술을 연마했던 이순신 장군은 애석하게도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적병이 쏜 유탄에 맞아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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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에서 북쪽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사적 제114호 완도묘당도이충무공유적(莞島廟堂島李忠武公遺蹟) 충무사(忠武祀)가 있다. 

충무사는 원래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도독 진린이 관왕묘(關王廟)로 건립하였으나 1791년 (정조 15년)탄보묘(誕報廟)로 사액묘우(賜額廟宇)가 되었으며 1953년 충무사(忠武祀)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덕동마을에는 고금진의 군영이 복원되고 있다. 이와 발맞추어 이순신 장군의 혼이 살아있는 윤동의 은행나무 역시 주변 정비가 절실히 요구된다.

망덕산(望德山) 아래 사장터에 올라서면 마치 장군의 활 시위소리가 바람에 휘날린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하나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 윤동마을의 은행나무는 몹시도 푸대접받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많은 은행나무 가운데 이렇게 훌륭한 역사성을 가진 나무가 많지 않은데 주변은 쓰레기와 잡목으로 뒤엉켜 있고, 윗가지는 전정을 당하여 마치 한그루의 분재처럼 보인다. 하루 시급히 주변이 정비되고 외과 수술을 거쳐 민족의 혼이 살아있는 나무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태그:#완도신문, #이순신, #충무공,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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