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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일부터 14일까지 생명평화아시아와 녹색당이 공동주최한 ‘2023 독일 생명평화기행’에 참여했습니다. 베를린, 다하우, 뮌헨, 슈투트가르트, 프라이부르크 등 독일의 에너지 전환과 정치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누겠습니다.[기자말]
독일의 에너지 전환

'아고라 에네르기벤데(Agora Energiewende, 아래 아고라)'는 기후위기 대응 및 에너지 전환 분야에서 세계적인 싱크탱크입니다. 'Agora'는 공공의 광장이란 뜻으로 널리 쓰이는 말이고, 'Energiewende'는 에너지 전환을 뜻하는 독일어입니다. 두 단어를 합친 이름에서 이들의 명확한 사명이 느껴졌습니다. 아고라의 비전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면서도 번영하는 세계 경제 시스템을 이루는 것입니다. 

2012년에 설립해 그 역사는 10여 년 정도 됐지만, 이념적 입장이나 정파적 이해를 배제하고, 실용적인 정치적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수많은 정책을 입안하여 명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10여 명이 일하며 시작했지만, 지금은 약 150여 명의 박사급 에너지 전환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일하고 있는데, 그중에 약 3분의 1은 비독일어권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아고라는 민간 싱크탱크로서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업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거나 위탁 업무를 하지 않는 대신에, 민간 재단과 공공기관의 보조금 등 다양한 재원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2022년 기준으로 아고라의 재정 규모는 약 1440만 유로(약 204억 원) 이상이며, 이 중에서 약 167만 유로(약 23억 원) 이상을 국제 에너지 전환 싱크탱크 네트워크(INETTT)에 가입한 15개국의 파트너 기관에 지원하면서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독일 생명평화기행에서 강연하고 있는 염광희 박사
 독일 생명평화기행에서 강연하고 있는 염광희 박사
ⓒ 박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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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에너지 전환, 성과와 과제

시작하면서 아고라 이야기를 잔뜩 한 이유는, 이번 생명평화기행의 첫 번째 일정으로 만난 분이 아고라에서 한국 담당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염광희 박사이기 때문입니다. 염 박사는 원자력을 공부하고 환경단체에서 일하다가 독일로 유학하여 '재생가능에너지 입지갈등'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독일 베를린자유대 환경정책연구소에서 일하다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 기후환경비서실 행정관으로 일했고, 지금은 아고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날 강의 주제는 '독일의 에너지 전환, 성과와 과제'였습니다. 독일의 에너지 전환의 최대 성과는 완전한 탈핵을 이뤘다는 것입니다. 1998년에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과 녹색당이 적록연정을 구성하면서 탈핵에 합의했고, 2002년에 원자력법 개정하여 독일의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이 집권하자 핵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하기로 했죠. 그런데 2011년 후쿠시마 핵사고가 터지면서 핵발전소 수명 연장 계획 결정은 철회되었습니다. 마침내 2023년 4월 15일에 마지막 핵발전소 3기를 폐쇄하면서 독일은 역사적인 완전 탈핵을 이루었습니다.

독일은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8기의 핵발전소의 가동을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전력 생산량에 차질없이 여전히 전력 생산량이 소비량보다 많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2023년 상반기를 기준으로 재생에너지를 통한 전력 생산이 50% 이상을 감당하고 있는데, 이는 온실가스의 획기적 감축으로 이어져 1990년 대비 약 40%의 온실가스가 줄어들었습니다. 재생에너지의 확대는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졌으며, 2022년 기준으로 약 199억 유로(약 27조 원)을 투자하여 약 238억 유로(약 32조 원)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습니다.

에너지 전환 정책이 환경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과제도 있습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약 두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에너지 가격의 급등은 에너지 전환이 기후 보호뿐만 아니라 에너지 안보 측면도 동시에 만족시키는 대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궁극적인 대안은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줄이면서 동시에 자체적으로 더 많은 재생에너지를 보급하는 것입니다.

시민운동과 정치를 통해 만들어 낸 에너지 전환

독일의 에너지 전환은 어떻게 가능했고, 어떤 성과를 내고 있으며, 앞으로 과제에 대응해나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관한 대답은 시민운동을 통해 제도화된 정치입니다.

1973년에 독일 정부는 비일(Wyhl)의 포도밭에 핵발전소를 짓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농민 등이 핵발전소 터를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해 탄압하자 전국적으로 반핵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비일 근처의 대학도시인 프라이부르크 등에서 반대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결국 전국에서 모인 약 3만 명의 시위대가 핵발전소 터를 다시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1975년에 독일 정부는 비일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비일 핵발전소 반대 운동은 독일 '신사회운동'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신사회운동은 곧 '신정치정당'으로 이어졌습니다. 기성정당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녹색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가담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미 1977년부터 녹색 후보들이 지역 의회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1980년 1월에 전국 규모로 녹색당이 출범했습니다. 녹색당은 창당 직후인 1980년 선거에서는 원내 진출에 실패했지만, 1983년 선거에서 5.6%를 득표하여, 마의 5% 진입장벽을 돌파하면서 27명의 의원을 연방의회로 진출시켰습니다. 오랫동안 독일 정치를 지배해왔던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사회민주당(사민당)-자유민주당(자민당)의 3당 체제가 붕괴한 '사건'이었습니다.

1986년 체르노빌 핵사고 이후에 독일의 반핵 여론은 더욱 들끓어 독일 국민의 약 80% 이상이 핵발전소에 반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반핵 여론을 통해 급성장한 녹색당은 더 이상 군소정당이 아니라, 향후 연정의 주요한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98년 선거를 통해 사민당과 녹색당의 적록연정이 출범하면서 핵발전소 폐쇄 합의, 재생에너지법(EEG) 제정, 탄소세 도입, 원자력법 개정 등 굵직굵직한 에너지 전환 정책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독일 녹색당의 역대 선거 결과
 독일 녹색당의 역대 선거 결과
ⓒ 박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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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시민운동이 제도화된 정치로 이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바로 시민의 요구가 정책이 되는 정치 구조 때문입니다. 독일의 선거제도인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시민의 투표 그대로 의회를 구성하게 만듭니다. 덕분에 주권자인 시민들은 내 표가 사표(투표했으나 당선자 배출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버려지는 표)가 될 것을 염려하지 않고 마음껏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지한 정당이, 지지를 받은만큼 의회에 진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보장받는 것이죠.

또한 독일의 통치제도인 '의회중심제(의원내각제)'는 정당들이 연정을 통해 집권하도록 보장함으로써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를 다양한 정책으로 실현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독일 시민들의 탈핵, 에너지 전환, 기후 보호에 대한 요구는 녹색당의 성장뿐만 아니라 기민당과 사민당의 변화까지 끌어내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독일 사회는 모범적으로 에너지 전환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에너지 전환, 한국도 가능하고 가능하게 해야

이미 2022년 기준으로 미국, 중국, 인도, 유럽 등에서 태양광과 육상풍력 단가가 이미 화석연료의 발전단가보다 확연히 낮은 것(IEA, 2022)을 볼 때 재생에너지는 화석연료보다 경제적이기까지 합니다. 또한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침공에 따른 여파에서 보듯이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도 국내에서의 재생에너지 확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비극을 볼 때 위험천만한 핵이 대안이 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독일 자랑만 할 것은 아니니, 한국 이야기를 해야겠죠. 강연을 마치며 염광희 박사는 한국도 태양광과 풍력으로 에너지 소비를 모두 충당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몇 해 전 한국 YWCA 사무실에서 본 구호가 생각났습니다. "위험한 핵 말고 하나님이 주신 햇빛과 바람을 모으자!" 위험천만한 석탄과 핵 말고도 자연이 준 햇빛과 바람을 모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쉽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럴수록 중요한 것이 정치의 역할입니다. 애석하게도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8.1%에 불과하며, 윤석열 정부는 이념적 입장과 정파적 이해 때문에 재생 에너지산업을 규제하고, 석탄과 핵 발전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추세와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독일 정치의 현장에서 탈핵을 끌어낸 주역인 한 원로 정치인을 만난 이야기로 이어가겠습니다. 이 영감님이 한 마디가 제게 큰 영감을 주게 될 것을 이때는 몰랐습니다. <계속>
 
코리아협의회 사무실 앞에서 독일 생명평화기행팀
 코리아협의회 사무실 앞에서 독일 생명평화기행팀
ⓒ 생명평화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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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독일생명평화기행, #생명평화아시아,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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