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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이 땅의 민초들은 오래 전부터 지배층의 압제에 시달리면서 '꼭두각시' 놀음의 인형극이나 여러 가지 '탈춤'을 통해 양반들을 놀려대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평상심을 유지해왔다. 갖가지 해학·유머·골계·농담이 생겨났다.

'판소리'도 그 중의 하나다. 예전에는 '소리' 또는 '창(唱)'이라 불렀다. 전래된 이야기를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소리로서 이야기하는 것을 지칭한다.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는 1812년 11월 6일 태어나 72살 때인 1884년 11월 6일 눈을 감았다. 공교롭게도 태어난 날과 사망한 날이 같았다. 더욱 공교로운 것은 그의 아버지 신광흠도 생일과 제삿날이 겹친다는 사실이다.

신재효는 아버지 신광흠과 후실 경주 김씨 사이에 외아들로 전라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선대는 경기도 고양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고창 관아의 관약방(官藥房)을 맡게 되어 이곳에 정착하였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이웃의 천재 소리를 들으며 성장한 그는 관서당에 들어가 이엄 선생에게서 사서삼경을 비롯 제자백가 등을 두루 익혔다. 그러나 중인(中人) 계급의 한계로 과거를 볼 수 없고 벼슬길이 막혔다. 아버지는 고창 관아의 아전이었는데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재능이 있는 청년이 사회진출의 길이 막히게 되면 저항의 길을 걷거나 예술의 세계로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그는 음악에도 각별한 소질이 있어서 오랫 동안 기량을 닦고 능력을 발휘하여 뒷날 국악계에서 판소리의 중흥조라 추앙받게 되었다.

관년(冠年:성년)에 달하기까지 동리는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했으며, 특히 가무 음률에도 정통하여 가곡·창악·속요까지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인 계급에 속하였으므로 아무리 뛰어나는 재주가 있어도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아갈 도리가 없었으니 동리로 하여금 광대 소리에 미치게 하고 마침내 판소리의 중흥조로 우뚝 서게 만든 운명의 굴레, 숙명의 사슬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황원갑, <동리 신재효>, <역사인물 기행>)

아버지가 남긴 여유 있는 재산은 그의 활동에 윤활유의 역할을 해주었다.

신재효는 그의 집을 '동리정사(桐里情舍)'라 이름 붙이고 소리청을 만들었다. '동리'는 그의 아호이다. 그가 소리청을 개설하고는 소리꾼들을 불러들였다. 당시 소리꾼들은 대개 무식하여 판소리의 가사내용을 이해하지도 못 할 뿐만 아니라 음을 제멋대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소리꾼들이 몰려들자, 소리꾼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판소리의 정확한 발음과 뜻을 일러주었다. 물론 그 소리꾼들이 먹고 자는 일, 때로는 경비까지도 그가 대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판소리의 가사가 난잡하기도 하고 근거가 없기도 하여 이에 체계를 세우고 정리 하기도 했다.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변강쇠가>의 가사를 정리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해설한 것이다. 그 당시 판소리 열 두 마당 중에 위의 여섯 마당만 온전히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이이화, <판소리의 아버지 신재효>, <역사인물 이야기>)

신재효의 생애에 아픈 대목이 많았다. 그 중의 하나는 제자요 연인을 빼앗긴 일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여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임진왜란 때 불 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공사 중에 전국의 노래꾼들을 불러 일꾼들에게 들려주었다.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공사가 끝난 후 경회루에서 축하 잔치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신재효의 제자요 연인인 진채선의 '방아타령'이 대원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흥선대원군은 진채선을 운현궁에 두고 수시로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대원군은 미모에 명창인 스물 넷의 진채선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신재효는 제자요 연인인 진채선이 보고 싶어 날밤을 지새웠으나 그리움만 쌓여갔다. 상대는 국왕도 꼼짝 못한다는 흥선대원군이었다. 신재효는 <도리화가(桃李花歌)>를 지어 운현궁으로 보냈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돼서
귀경가세 귀경가세 도리화 귀경가세
도화난 곱게 붉고 휨도 휠사 외얏꽃이
향기 쫓난 세오충은 져때북이 따라가고
보기 죠흔 범나비는 너풀너풀 나라든다
붉은 꽃이 빛을 믿고 흰꽃을 조롱하야
풍전의 반만 웃고 향인하야 자랑하니
요요하고 작작하야 그 아니 경일런가
……….


스승의 애끓는 듯한 <도리화가>에 진채선이 넋을 잃어가자 대원군이 물었고,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대원군은 신재효에게 오위장(五衛將)이란 감투를 내렸다. 무관직이고 실제 벼슬을 받지 않는 정삼품의 당상관이다. 중인 출신에게는 과분한 자리였으나 그는 이런 감투보다 소리를 함께 할 진채선이 소중했지만 그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신재효는 분노를 삭이느라 일에 매달렸고, 그 결과는 우리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신재효는 80여 명의 판소리꾼을 길러냈으며 <광대가>를 지어 판소리 이론을 세웠다. 그도 판소리의 기본인 열두 곡의 대본을 정리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고전 소설인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의 6편의 가사는 고쳐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을 합리적이고 품위 있게 다듬었다.

신재효는 그 와중에 서민층 특유의 발랄한 현실 인식이 약화되기도 했으나 판소리가 신분을 뛰어넘어 민족문학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았다.(하일식, <신재효>,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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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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