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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하는 김대중.
 발언하는 김대중.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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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박정희의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로서 두 인물의 대립과 경쟁은 한국 현대사에 매우 큰 영향을 줬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박정희를 향한 김대중의 도전과 투쟁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적 과제인 근대화를 위한 사상, 이념, 노선 등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며 근본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사실이다.

이익 등의 이해관계 영역이 갈등의 핵심이라면 협상과 조정 등이 작동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런데 정치관, 정체성 등의 관념과 정서적 영역이 갈등의 중핵이 될 경우에는 대립과 충돌 양상이 격렬해지면서 폭력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의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 사이의 대립과 경쟁은 그러한 속성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이에 더해서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선봉장인 김대중은 분단, 안보, 평화 등 남북관계와 외교 문제에 있어서 그 시기 민주화 세력 일반이 갖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그래서 김대중은 보수적 근대화 노선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을 통해 새로운 국가발전을 위한 구체적이면서도 정교한 대안과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있었다.

김대중의 이와 같은 면모는 군사독재 정권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김대중을 제거하려고 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사회와 차단하고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려고 했다. 장기간 동안 이어진 이러한 잔혹한 탄압 속에서도 김대중은 죽지 않고 살아났으며, 굴하지 않고 저항을 지속했다. 끈질긴 김대중의 도전과 투쟁에 의해서 양측 사이의 대립과 경쟁은 매우 격렬하게 이어졌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김대중은 군사독재 정권을 향해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시도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1975년 4월 19일 김대중의 연설 음성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김대중의 대화 제의는 얼핏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면이 있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양측의 갈등은 근본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었고, 김대중은 잔혹한 탄압을 받고 있는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김대중은 왜 그랬을까?
  
유신 시절, 박정희에 두 번 대화를 제안했던 김대중
  
책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표지.
 책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표지.
ⓒ 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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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1975년 4월 19일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대화를 제안했다.
 
"우리 모두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늦기 전에 파국이 오기 전에,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 회복의 용단을. 용단을 내리도록 여러분과 더불어 나는 호소하고 촉구해서 마지않는 바입니다.

또한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 만나자 이겁니다. 어째서 같은 한국 사람인데 그렇게 못 만나느냐 말이에요. 요새 흔히 하는 말로 '김일성이 보고는 맨날 만나자고 하면서 어째서 우리끼리는 안 만나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대통령이 말하는 안보 얘기 우리 충분히 듣겠다 이거예요. 우리가 납득하면 다 협력하겠다 이거예요.

그 대신 우리가 말하는 민주회복이라든지 이런 얘기도 좀 들어라 이거예요. 말해보자. 옛날에는 임금한테도 사간원이라는 게 있어 가지고 대사간 사람들이 말이야, 이 언관들이 맨날 가서 임금한테 '왕 그러면 안 된다'고 말이지. 말했는데. 아 그래, 민주국가에서 우리들이 말이지, 대통령 좀 만나자 해도 못 만나고. 말하려야 할 수 없고, 밖에서 얘기하면 욕한다고 그러고. 국민 선동한다고 하고. 어떻게 해야 좋냐, 이거예요. 개개인이 만나서 얘기 좀 하자, 나 이거 대통령께 제안하고 싶습니다."
 
▲ 김대중의 제의 "박정희 대통령, 만나자 이겁니다... 왜 못 만나느냐" [1975년 김대중의 제안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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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유신 정권 시절 김대중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 최초의 대화 제의였다. 그러나 이날 제의는 성사되지 못했으며 구체적인 진전도 없었다. 그이후 김대중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인해서 1978년 말까지 2년 10개월여 동안 투옥돼 어떠한 대외적인 활동도 불가능했다. 이렇게 석방됐으나 김대중은 가택연금을 당해 정상적인 대외활동이 매우 어려웠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1979년 봄 김대중은 박정희에게 또다시 대화제의를 했다. 이때는 자신과 함께 민주화투쟁을 하던 예춘호, 박종태, 양순직 등을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보내서 자신의 뜻을 전하도록 했다. 이들은 공화당 출신 정치인이었는데 1969년 3선개헌에 반대하면서 박정희 정권과 멀어졌고 이때는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었다.

예춘호 등은 차지철을 알고 있어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었는데, 결국 차지철의 거부로 김대중-박정희 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만약 이때 회담이 성사됐다면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 이처럼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대화를 꾸준히 시도했다. 투쟁을 하면서도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김대중은 왜 박정희와의 대화를 시도했을까?
  
김대중이 대화를 통해서 문제해결을 시도한 것은 평화적인 방식으로 민주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본인의 정치적 신념과 관련이 있다. 김대중은 폭력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문제점을 되돌아보면서 평화적인 방식으로 민주화를 이뤄내야만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안정적으로 착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대중은 특정 계기에 의해 유리한 정치적 국면이 형성된다고 해도 민주화 이행을 이뤄낼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견고하게 뒷받침되어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기반이 약하면 언제든지 역습을 당해 민주주의의 꽃이 시들고 뿌리가 뽑혀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사회적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 민주화 세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판단했다. 아무리 독재권력이라고 해도 그 통치기간 동안에 형성된 지지기반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타도와 배제 일변도로만 나갈 경우에는 부정적인 영향이 너무 크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이해를 넓히고 강화해야만 민주화 이행을 위한 강력한 동력이 형성될 수 있다고 봤다. 또한 이렇게 될 때 독재권력의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고 태도전환을 유도해 평화적인 방식의 민주화 이행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이와 함께 지속적으로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대화의 시작은 상대에 대한 인정... 그 배경은 바로 '용기'

대화의 시작은 상대에 대한 인정이다. 상대를 무시하고 부정하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의 가장 강력한 도전자이자 경쟁자였으며 그로 인해 엄청난 탄압을 받고 있던 김대중은 어땠을까? 박정희에게 대화를 제의한 이 연설에서도 확인되듯이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역할에 대해서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 "외국과 경제협력을 하더라도 우리 자주독립 중심으로 해야" [1975년 김대중의 제안④]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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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집권 14년 동안에 우리가 세계로 수출이 뻗어나갔고, 많은 기업체가 건설되고, 많은 근대적 산업이 육성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면 된다는 우리 국민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입니다. 군인 출신으로서의 추진력과 또 우리나라 우수한 관료들의 그 행정 능력. 그리고 우리 국민의 세계 우수한 이 노동력의 질을 이용해서 한 이 14년의 경험은 우리에게 귀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노선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날 연설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그 건설의 결과는 말이 아니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경제 건설이라는 것은 나라가 자주독립하고 국민이 다 잘살자는 데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건설하다 보니까 지금은 이 나라는 완전히 외국의 예속 경제가 되어버렸고, 이 나라의 국민 생산은 몇 사람 호주머니에 들어간 특권 경제가 되어버렸다 이것이에요."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노선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대중참여경제론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의 내용과 성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폄훼하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볼 것은 인정하는 객관적이면서도 통큰 정치가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줬다.

이러한 김대중의 사상과 실천은 현 시점에도 주는 함의가 매우 크다. 지금은 다르고 차이가 있으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이 너무 쉽게 발견된다. 심지어 일부러 실제 간극보다 더 괴리가 있는 것으로 자극하고 선전하는 글자 그대로 '나쁜 정치'가 횡행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큰 문제다. 다르고 차이가 있다면 극단적으로 대립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김대중은 차이에 의한 차별을 해소하려고 했으며 존재하는 갈등을 최대한 봉합해서 사회적 연대와 통합을 이뤄내고자 했던 정치가였다. 이와 같은 그의 비전과 실천은 박정희에 대한 대화제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는 현 시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 이번에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1975년 4.19 연설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유튜브 채널(클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M3KYQ3ld15GF8qtQcd038yf_o9cl-bDX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과 중국>(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이며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태그:#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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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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