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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세월호 순직교사 묘소 안내판
 대전현충원 세월호 순직교사 묘소 안내판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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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 30분,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배에는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을 포함해 승객 총 476명이 있었는데요. 이 중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합해 172명에 불과했습니다. 단원고 학생, 교사, 일반인 승객과 선원까지 총 304명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참사 이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이번 사고를 계기로 진정한 안전 대한민국을 만든다면 새로운 역사로 기록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것들과 비정상을 바로잡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저의 모든 명운을 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대형 참사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참사 당시 선원은 배를 버리고 도주했고, 해경은 구조를 방기했습니다. 정작 사람을 구한 이들은 국가가 아닌 선한 마음의 개개인이었습니다. 참사 이후 유가족을 고립시키려는 정치 술수가 난무했습니다. 이런 양상은 이후 다른 참사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반복됐습니다.

대전 현충원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인물이 19명 안장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참사를 막고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대전 현충원 순직공무원 11호부터 20호 묘역에는 참사 당시 희생된 열 분 선생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교사 공무원이 순직으로 인정받아 현충원에 안장된 일은 단원고 선생님이 최초였습니다. 선생님들은 배가 침몰할 당시 자기 자신은 뒤로 하고, 학생을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다 변을 당했습니다.
  
선생님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
 
교사 고창석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1호)
 교사 고창석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1호)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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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직공무원묘역 11호에 고창석 선생님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체육을 가르치던 고창석 선생님은 늘 짧은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체크무늬 넥타이와 감색 정장 그리고 구두 차림으로 출근했습니다. 사람들은 '편하게 운동복으로 출근하지 그러냐'고 묻곤 했지만, 대답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야. 체육도 학문이고, 절대 가볍게 다룰 수 없지."

학생 생활인권부 활동을 하던 고창석 선생님은 남들보다 먼저 출근해서 등교 지도를 도맡았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또치쌤!"이라 밝게 인사했고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안녕, 너 오늘 더 근사하구나", "그래, 오늘도 파이팅하자!"며 격려하곤 했습니다. 일과가 끝난 밤 안산 시내를 뒤져가며 가출 학생을 찾아다닌 이도 고창석 선생님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기 9년 전, 첫 근무지였던 원일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학교 3층 학생 휴게실에서 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화재 소식을 듣고 학생들을 대피시킨 뒤, 소화기를 들고 가장 먼저 달려갔습니다. 선생님은 태권도 사범에 인명구조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 선생님은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분이셨습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고창석 선생님은 담임도 생활 인권부장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학생 지도를 위해 학교에서 동행하기를 원했고 고 선생님은 지시에 따라,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 함께했습니다. "여보 걱정 마. 어젯밤에 안개 때문에 출발이 좀 지연됐었어. 아이들하고 배에서 폭죽놀이를 하고 바빠서 연락이 늦었어. 애들 챙기느라 수고 많지?"라고 아내에게 보낸 메시지가 선생님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되었습니다.

사람 관계를 중시하던 선생님
  
교사 양승진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2호)
 교사 양승진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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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순직공무원묘역 12호에 양승진 선생님이 안장되어 계십니다. 양 선생님은 학교 내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분이었습니다.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서 학교 앞에서 교통 정리를 맡았습니다. 학생들의 안전한 등교를 위해서였습니다.

쓰레기 분리수거도 담당해서 청소를 번쩍번쩍 빛나게 할 정도였습니다. 부임하는 학교마다 상조회장도 여러 번 맡으셨습니다. 양지고에서 상조회장을 맡을 때는 비정규직 기간제교사, 조리사, 행정실 직원까지 상조회에 포함하며 두루두루 화합을 도모하던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취미는 텃밭 가꾸기였습니다. 단원고에서도 학교 뒤 텃밭에 상추, 감자, 쑥갓, 마늘, 상추, 고추 등을 키우셨습니다. 이렇게 키운 작물을 동료 교사나 학생에게 나눠줬고요. 동료 교사들은 선생님을 '아버지처럼 먹을 것을 사 오신 분'으로 회상했습니다. 유도와 씨름으로 단련된 탄탄한 체격이었지만 '풍채에 안 어울리게 자상한 목소리'를 가진 선생님으로 학생들은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양승진 선생님은 천생 선생님이었습니다. 학생들을 직접 대하는 게 좋다며 한사코 여러 승진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매년 스승의 날에 선정되던 교육부장관상 대상자에 올라도 "나는 승진에 관심이 없어. 받으나 안 받으나 내가 변하는 것은 없고, 그 상이 더 필요한 훌륭한 사람이 받았으면 한다"며 손을 저었습니다. 해외 연수 기회도 다른 이에게 양보하는 분이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승진 선생님이 승진에 관심이 없다"며 농담을 건넸지만, 그저 허허 웃고 마는 성격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지킨 교육 철학은 "늘 학생들과 함께하는 스승의 모습을 잃지 말자"였습니다. 평소에 "학생 없이는 교사가 없고, 학생의 미래가 없으면 나라의 미래가 없다"고 자주 이야기하곤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뱃멀미를 심하게 했고 배를 잘 못 탔지만, 막상 수학여행이 다가오자 학생처럼 좋아했습니다. 참사가 발생하고 선생님은 구명조끼를 학생에게 벗어주고, 목이 터져라 '갑판에 나오라'고 외치며 배 안으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죽더라도 학생들 살리고 죽겠다"
 
교사 박육근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3호)
 교사 박육근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3호)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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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진 선생님 옆 13호 묘역에는 미술을 가르치던 박육근 선생님이 잠들어 계십니다. 박육근 선생님은 상담하는 교사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틈나는 대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눴고요. 교정 곳곳, 관사에서 학생들과 함께했습니다. 선생님이 숙직하는 날에 학생들은 학교로 찾아와 밤새도록 인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박육근 선생님은 좋은 아빠와 남편이 되고자 했습니다. 가사 노동을 늘 함께했고요. 아이들을 씻기고 기저귀 갈아주었습니다. 자전거에 아이들을 태우고 들판을 달렸고, 산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미술 전시회가 열리면 온 가족이 함께 보러 갔습니다. 선생님은 가족에게 작품과 뒷이야기까지 직접 설명하는 자상한 아버지였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의 자존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학내 갈등 상황에 가해 학생이라 하더라도 해결 과정에서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교육 차원에서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게 선생님이 가진 지론이었습니다. 문제아나 나쁜 학생이 따로 있지 않다고 늘 강조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과 상담할 때 자주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뭔 줄 알아? 넌 꽤 괜찮은 녀석이라는 거야." 박육근 선생님이 담임을 맡았을 때 그는 상담일지를 만들었습니다. 학생 한 명 한 명 사정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학교생활 적응을 어려워하는 학생은 끝까지 믿고 기다렸습니다. 학생들은 눈에 띄게 변화했습니다.

선생님은 세월호 침몰 당시 4층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아이들을 탈출시키고 갑판 출입구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이내 "죽더라도 학생들을 살리고 내가 먼저 죽겠다"고 외치고 다시 물이 가득한 선내로 들어가셨습니다.
  
전화 한 통에 뛰어내려간 소녀
 
교사 유니나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4호)
 교사 유니나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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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나 선생님은 순직공무원묘역 14호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2학년 1반 담임이었으며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니나'라는 이름은 스페인어로 소녀라는 뜻입니다. 어린 니나는 고집이 셌다고 합니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 성격이었고요. 학창 시절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임용시험도 한 번에 합격할 만큼 공부를 잘했습니다. 경상대 사범대학 일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처음 발령받은 곳이 바로 단원고였습니다.

장학금을 많이 받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모범생만은 아니었습니다. 성격이 쾌활했고 털털했는데요. 오죽하면 친구 사이에 별명이 형님을 뜻하는 일본어 '아니키'였습니다. 가족에게는 살뜰한 딸이었습니다. 단원고로 발령나기 전 유니나 선생님은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요. 신작이 개봉할 때마다 부모님에게 영화를 소개하며 초대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친구 같은 딸이기도 했습니다.

참사가 발생했을 때 선생님은 탈출이 쉬운 5층 객실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1반 학생들을 찾아 빨리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난간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화가 한 통 걸려 옵니다. 식당에 다친 학생이 있다는 전화였습니다. 빨리 와달라는 전화에 선생님은 3층으로 뛰어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 나오지 못했습니다. 2학년 1반은 총 19명 학생이 구조되었습니다. 10개 반을 통틀어 가장 많은 학생이 구조된 반이었습니다.

유니나 선생님은 참사가 발생한 지 54일 만에 세월호 3층 식당 의자 아래에서 발견됩니다. 자기 구명조끼는 다른 학생에게 벗어주어 발견 당시 선생님은 구명복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수첩에 적힌 다짐
 
교사 전수영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5호)
 교사 전수영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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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2반 담임을 맡은 전수영 선생님은 국어 과목을 담당했습니다. 순직공무원 묘역 15호에 모셔져 있습니다. 1989년 전수영 선생님이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육아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가야! 너는 마음이 착하고, 어려운 세상에 선한 빛이 되어야 한다. 주변의 어려움을 도와줄 수 있는 마음으로 생활하거라.' 어린 수영은 부모님 뜻대로 자라났습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수영을 항상 웃고 책임감이 강하며 다정했던 친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수영이는 말동무도 해주고 이것저것 학교생활도 많이 도와주는 배려심 깊은 친구였습니다.', '네가 정말 부러운 건 항상 웃어서야. 공부할 때도, 질문할 때도 하상 웃으면서 받아줘서 고마워. 커서 선생님 하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한 수영은 희망대로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2013년 2월 전수영 선생님은 SNS에 '항상 학생을 생각하는 선생님이 되겠습니다'라고 다짐을 적었습니다. 그 문구는 수첩과 노트에도 적혀있었습니다. 노트에는 수업한 내용과 학생들 반응, 칭찬한 학생과 수업 평가까지 빼곡하게 적혀있었고요. 학생들에게 주기 위한 간식도 늘 함께였습니다.

전수영 선생님이 맡은 반에 한 학생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꿈이었습니다. 화장하고 등교할 때 선도부에 지적받는 일이 있었는데, 전수영 선생님은 훌륭한 아티스트가 될 거라 학생을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선도부를 찾아가 장래 희망을 이야기하며, 각별히 부탁까지 남길 만큼 학생 입장에 서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참사 당시 어머니와 통화에서 "애들은 입혔어요. 구조대가 온대. 얼른 끊어"가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 <우리 애기들을 살려야 해요> (경기도교육청 약전작가단, 2016, 굿플러스북) 2
- 4.16 기억저장소 (http://www.416memory.org/)


태그:#대전현충원, #세월호참사, #교사, #순직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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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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