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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삶은 끊임없는 결단의 연속이었다. 김대중은 확고한 신념, 불굴의 의지, 한 없는 인내를 갖춘 정치가로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위험한 결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5년 2월, 2차 미국 망명을 마치고 귀국한 것도 그런 결단의 한 예이다. 김대중은 1985년 2월 6일 미국을 떠나 일본 나리타에서 1박을 한 후 8일 귀국했다. 그의 귀국은 2.12총선을 불과 나흘 앞두고 이뤄졌다. 그는 총선에서 선명야당인 신민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귀국 시점을 그때로 잡았다.
 
1985년 2월 초 전격 귀국길에 오른 김대중-이희호의 모습. 김대중-이희호가 김포공항에서 입국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1985년 2월 초 전격 귀국길에 오른 김대중-이희호의 모습. 김대중-이희호가 김포공항에서 입국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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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의 귀국을 꺼려했다. 그의 귀국이 민주화운동 세력을 고무시킬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특히 김대중의 귀국 시점이 총선 직전이었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은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의 귀국을 막기 위해 그에 대한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에 김대중을 죽이려고 했고 광주항쟁 당시 민간인을 대규모로 학살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의 신변안전에 대한 우려는 커져만 갔다. 특히 1983년 필리핀의 민주화 세력 지도자인 아키노가 귀국 도중 암살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의 안전 귀국 문제는 국제적인 관심사가 됐다.

미국의 주요 인사들이 김대중의 귀국비행기에 동승하기까지 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서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전두환 정권도 실질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결국 김대중은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행 비행기 탑승,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다. 그런데 이조차도 김대중에게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신변안전을 위협받고 국제적인 사안으로 부각돼 여러 복잡한 논의가 전개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김대중이 귀국 시점을 1985년 2월 초로 잡은 것은 총선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고 이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그는 왜 귀국하려고 했을까? 김대중은 미국 망명 투쟁 기간 중에 여러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향한 위협이 있는 상황 속에서도 왜 귀국하려고 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최근 공개한 1985년 2월 귀국비행기에서 일본 기자들과 진행한 인터뷰와 기자회견 동영상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1985년 2월 6일 미국에서 일본 나리타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진행한 인터뷰와 나리타에서 1박 후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진행한 기자회견 동영상 등 총 12분 57초 분량의 자료를 6개의 주제로 나눠서 공개했다. 이 자료를 보면 김대중은 귀국 목적과 관련해서 평화적인 민주화 이행을 위해서 자신이 정치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이 자료에는 귀국 직전 김대중의 심경이 잘 나와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김대중, 귀국 앞둔 심경을 말하다

먼저 이 자료에는 귀국을 앞둔 김대중이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내용이 있다. 김대중은 1982년 12월 23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출국했기 때문에 2년 1개월 15여일 만에 귀국하게 됐다. 비교적 긴 시간 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감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대중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 "조국 돌아가 기뻐... 그런데 전두환 정부 무리한 태도" [1985년 목숨 건 귀국④]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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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좀 복잡한 기분이에요. 내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기쁘고, 더 이상 행복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나의 기대와는 달리, 정부가 굉장히 무리한 태도를 지금 취하고 있는 것처럼 들었어요.

이런 것은 모처럼 질서 속에서 서로 문제가 없도록 그렇게 저는 국내 동지들에게도 연락하고 있고 저도 그럴 생각인데, 이것은 오히려 정부의 이런 태도는 국민을 자극해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공항으로 오는 길을 봉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항 부근의 여관을 전부 조사해서 저를 마중 나온 사람을 쫓아내거나, 지방에서 올라오는 버스를 세우거나, 저희 집 주변에 11개의 감시 초소를 만들거나 하고, 그리고 수백 명의 민주 지도자들을 지금 연금을 하거나 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대중은 귀국하게 되면 가택연금을 당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김대중은 1973년 8월 13일 납치사건에서 구사일생 끝에 귀가한 이후부터 가택연금을 당하기 시작했다. 가택연금은 김대중의 동교동 집을 사실상 감옥처럼 봉쇄하고 차단하는 것으로서 김대중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였다. 
 
지금 서울 저희 집에서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착착 그런 준비를 하고 있어요. 저희 집 주변에 감시의 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혹은 그 부근의 빌딩에 이른바, 사무소를 설치하거나 그리고 저희 집 주변에 많은 불을 새로 달아서 밤 감시에 대비하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 감옥 안에 있거나, 집 안에 있거나의 차이 말고는 다른 자유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어렵죠. 어렵지만 제가 나라에 있다는 것 자체가 국민들에게 하나의 큰 메시지가 되니까 거기에 의미가 있고. 그리고 만약에 이런 가택연금, 부당한 이런 것들을 강행한다면 이것은 결코 그 국민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그리고 새로운 기대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걸 원치 않으니까 정부가 이성적이었으면 좋겠어요. 근본적으로 말해서 저는 80년에 무고한 죄로 그 사형을 선고 받았고, 그 이후로 5년 가까이 이렇게 저와 저희 가족, 친척, 친구들이 시달렸으니 지금은 한국 정부는 그런 태도를 바꿔서, 좀 더 합리적인, 그리고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있는 그런 태도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식의 태도로 나오면 물론 저도 그에 상응하는 온건한 태도를 취할 생각입니다.
 
▲ 김대중 "자유가 없다... 정부기 이성적이면 좋겠다" [1985년 목숨 건 귀국②]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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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자신이 연금을 당하는 고통을 겪더라도 국내에서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렇듯 김대중은 귀국을 앞둔 자신의 심경을 인터뷰를 통해서 밝혔다.
  
목숨 건 귀국, 평화적인 민주화 이행을 위한 결단

김대중이 귀국하기로 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민주화운동 내의 극단주의의 발호를 막아 평화적인 민주화이행을 이뤄내기 위해서였다.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사건의 충격과 분노로 인해 민주화운동 세력 내에서 극단적인 노선을 내세우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김대중은 미국 망명 기간 중에 이 점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 "사회·경제적 불평등, 그러나..." 급진주의 경계한 김대중 [1985년 목숨 건 귀국③]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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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런 조짐이 싹트고 있어요, 그리고 이 가까운 장래에 민주화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오래 지속된 독재, 정치의 부패,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인 그 불공평. 여기에 불만과 의문을 느끼는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 노동자, 지식인,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의 독재 지원에 대해서 반발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급진주의가 확산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제 말이 조금이라도 과장이 없다는 건 이미 미국 문화원 두세 곳에 방화가 났잖아요? 미국 국기가 타버린 적이 몇 번 있죠? 그걸 봐도 결코 제 말이 부당하지 않다는 건 알잖아요. 예를 들면 학생들이 굉장히 급진주의화 될 거라고 여러 번 발표했잖아요? 이건 결코 저 혼자만의 과장이 아니에요. 지금은 그런 단계는 아니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느껴집니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와 같은 상황에 미리 대응하기 위한 것이 나의 귀국의 큰 목적 중 하나입니다.

김대중은 군사독재는 갈수록 심화되고 민주화의 전망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서 극단주의와 급진주의가 발생하게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민주화운동세력이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대중운동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급진주의 노선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그래서 김대중은 극단주의가 발호하지 않도록 절망과 좌절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노선에 따르도록 정치력을 발휘하려고 했다. 그와 함께 김대중은 전두환 정권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대화를 강조했다.
 
▲ 김대중의 제안 "대화는 정치적 입장 달라도 할 수 있는 것" [1985년 목숨 건 귀국⑥]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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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라는 것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대화하고 있잖아요. 제2차 대전 때 히틀러와 싸우기 위해서,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소련과 미국은 얼마든지 협력했습니다. 그러니까 민주회복을 위해서 대화하는 것이지, 그게 꼭 김종필씨라든지 전두환씨가 우리와 같은 동지 사이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정부 쪽도 대화는 말이죠, 우리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에요. 대화하는 것이 정부에도 좋거든요. 안정이 있다. 그렇게 안정이 있어야 남북대화도 성공하고 올림픽도 성공하거든요.

무엇보다 전두환씨가 우리와 화해하고, 그리고 그 정권을 잡을 때는 저런 식으로 굉장히 안 좋은 태도를 취했지만. 정권을 넘겨줄 때는 좀 더 국민이 납득하는 태도로 넘겨주면 전두환씨와 그 정권 관계자의 장래도 좋거든요. 그래서 대화는 결코 우리에게만 일방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호 이익입니다. 그러나 싫으면 어쩔 수 없죠. 대신 사태는 악화됩니다.
 
김대중은 다섯 번의 죽을고비에서 알 수 있듯이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가장 강력한 투쟁을 전개한 민주지도자였다. 이렇게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그의 민주화 이행의 방법론은 온건하고 평화적이었다. 외유내강형 노선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정도다.

정치인에게 '대화'란?... 김대중 "입장 달라도 얼마든 할 수 있는 것"

여기서도 보면 김대중은 전두환 정권과의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대중은 유신 시절에도 박정희 정권과의 대화를 시도했었다. 김대중이 이렇게 한 이유는 민주화이행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 그리고 목적에 이르기까지 평화를 핵심적인 원칙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 우리 역사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 화해, 관용, 통합의 정신이 넘치는 평화로운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와 평화는 상통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민주화를 위해서 비평화적 수단 사용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평화구축을 위해 비민주적 수단 사용을 고려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확산과 발전이 평화구축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인식한 민주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또한 김대중은 민주화이행의 성공을 위한 전략적인 관점에서도 평화를 강조했다. 김대중은 군사독재정권의 강고한 탄압을 받고 있는 한국의 민주세력이 민주화의 길을 열고 정권교체까지 이룩해 민주화 이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다수파 대중노선을 걸어야 한다고 봤다. 이를 위해서는 비폭력, 비용공, 비반미 등 3비 노선에 근거한 온건 평화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김대중은 민주화이행에 있어 평화의 중요성을 원칙과 전략 두 가지 측면에서 강조했었다. 이러한 내용을 이번에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김대중의 일본어 인터뷰, 언론자유 없던 국내 현실 보여주는 한 단면
      
1985년 2월 초 전격 귀국길에 오른 김대중-이희호의 모습. 사진은 비행기 안에서 촬영된 것.
 1985년 2월 초 전격 귀국길에 오른 김대중-이희호의 모습. 사진은 비행기 안에서 촬영된 것.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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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 인터뷰와 기자회견이 일본어로 진행됐다는 사실에 대해서 짚고자 한다. 김대중의 귀국은 보도 가치가 매우 큰 초특급 뉴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많은 언론사의 취재와 보도가 이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대중의 귀국은 국제적인 사안이기도 해서 미국과 일본의 언론에서는 크게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취재와 보도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동영상 자료도 그런 과정 속에서 생산된 것이다.

그런데 실제 더 큰 관심을 가져야하는 국내 언론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지 못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독재 정권에 의해 언론의 자유가 크게 침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 귀국에 대한 제대로 된 취재와 보도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에 관한 자료가 매우 적다.

그렇게 볼 때 일본어로 진행된 이 자료는 국내에서 확인하기 매우 어려운 김대중 귀국 관련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이 자료는 언론 자유가 없던 당시 한국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 이번에 공개한 동영상 자료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유튜브 채널(클릭)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M3KYQ3ld15G4BwG4Pg8UhbO_km6GD8QB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과 중국>(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이며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태그:#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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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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