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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인류역사는 오랫동안 남성 위주의 세상이었다. 동서가 다르지 않았다. 남녀평등론은 근래의 산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고대사회보다 근세(조선왕조)에서 더욱 심하였다. 주자학의 영향 때문이었다. 심지어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여, 7살이 되면 남녀가 한 자리에 앉는 것까지 금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의정원이 10개 조의 임시헌장을 채택했다. 제3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평등으로 함"이라고 명시함으로써 법적으로 남녀평등을 선언했다. 임시정부 의정원에는 27년 동안 여성의원이 7명이나 선임되었다. 헌법에 남녀평등이 명시된 것은 유럽의 핀란드에 이어 두 번째에 이른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고구려시대 제25대 평강왕(재위 559~590)의 딸 평강공주(平岡公主)가 남녀평등을 실천한 첫 여성이 아닐까 싶다. 공주의 신분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미천한 계층의 '바보온달'과 혼인한 것이다. 오늘에도 고위권력자나 재벌의 딸이 자진해서 거지나 실직 청년과 결혼하는 일이 성사되기 어렵듯이 황차 전통사회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어렸을 때 울기를 잘 하여 너무 시끄럽게 굴므로 아버님 평강왕께서 매양 달래는 말로, 우는 아기는 크더라도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은 즉 바보온달에게나 주겠다 하였다. 온달은 못나고 가난하며 해진 옷에다 헌 신짝을 끌고 여기저기 다니며 밥을 빌어서 늙은 맹모(盲母)를 봉양할새, 바보라는 별호까지 얻은 우스운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비록 겉은 못생겼으나 속은 아주 훌륭하였다.

공주의 방년이 16세가 되매 종반(宗班)인 상부 고씨(上部高氏)와 통혼의 말이 있었다. 이때 공주가 평강왕께 조용히 여짜오되,

"대왕께서 항상 저를 온달의 아내로 주겠다 하시더니 이제 왜 변개하십니까, 필부도 두 말을 못 하거든 하물며 지존(至尊)이 오리까."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이없어 잠잠하고 계시더니 필경 입을 열어 공주더러 이르시되,
"일시 희언(戱言)으로 그리 한 것을 너는 참말로 알았더냐. 너의 마음대로 하려거든 아예 내 눈에 보이지 말라"하고 크게 책망하였다. 그러나 신의를 존중하고 공주는 이미 굳게 결심한 바 있어 부왕의 책망함을 불고하고 보석 팔찌 수십 매를 몸에 지니고 슬그머니 구중궁문 밖을 나왔다.(문일평, <평강공주>)

쫓겨난, 아니 자진해서 출궁한 공주는 바보온달을 찾아나섰다. '바보'가 유명했던지 쉽게 사는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공주가 찾아간 온달의 집은 반쯤반 남아 언제 쓸어질지 모르는 초가집이었고, 온달의 어머니는 앞을 못 보았고 온달은 먹을 것이 없어 도토리를 따가지고 올 정도였다."(장도빈, <온달장군>)

공주가 온달에게 찾아온 사연을 말하고 자기와 혼인하기를 간청하였다. 온달의 어머니는 비록 맹인이지만 나타난 여성에게서 풍기는 귀인의 자태에 놀라고, 온달 역시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옛 이야기에 나오는 대로 여우가 자기를 잡아먹기 위해 공주로 변신했을 것이라 믿었다.

어머니가 정중히 불가함을 말하였다. "당신 같은 귀부인이 어찌하여 크게 모자란 내 아들과 혼인할 수 있겠소? 날이 저물기 전에 어서 돌아가세요." 이에 공주가 대답하기를 "부부가 마음만 합친다면 잘 살 수 있는 것인데 부귀나 가난함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를 며느리로 받아주십시오."

합방이 이루어지고 부부가 되었다. 공주는 시어머니를 온갖 정성을 다해 모시는 한편 남편이 자존심을 상하지 않도록 무예를 익히도록 하였다. 온달은 세상에 알려진 대로 천치 바보가 아니었다. 인성이 맑고 재능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였다.
 
KBS2 월화드라마 <달이 뜨는 강>의 한 장면
 KBS2 월화드라마 <달이 뜨는 강>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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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고구려·백제·신라 3국간에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 그치지 않는 전국시대였다. 북쪽에서는 북주(北周)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내의 애정어린 성원과 남편의 자신감 회복으로 온달은 몇 해가 지나지 않아 학문과 각급 무예를 두루 갖춘 장수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임금이 병사들을 대동하고 대동강 동쪽 산림에서 멧돼지와 사슴을 잡아 천제를 지낸다는 소문이 들렸다.

가장 많이 잡는 사람은 큰 상을 내리고 병사로 임관한다는 것이다. 온달이 그동안 닦고 익힌 무술을 발휘하여 1등에 올랐다. 그 자리에서 온달은 왕에게 엎드려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평강왕은 말에서 내려 사위를 껴안고 공주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였다.

얼마 후 북주의 왕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범했다. 온달장군은 참전하여 맨 앞에서 적군을 무찔렀다. 고구려군대는 힘을 얻어 싸우고 개선했다. 왕이 감동하여 1등 공신으로 삼고 대형(大兄)이란 벼슬을 내렸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온달은 영양왕 때 신라에 빼앗긴 영토 회복전에 나섰다. 출전에 앞서 "지난날에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의 땅을 탈환하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단양 온달성)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평양성에서 장사를 지낼 때 관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껴안으며 "생사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가세요." 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는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데, 평원대왕은 장안성에다 엄청나게 큰 새로운 대궐을 짓고 평양 시가지를 화려하게 꾸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때 평양에 있던 호수는 21만 508호(戶)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 특히 호화찬란한 궁궐생활 속에서 자라난 대고구려국의 공주가 한낱 촌부인 온달과 결혼하여, 말을 사주고 무예를 연습시켜 나라의 큰 간성(干城)이 되게 했던 것은, 그녀가 얼마나 훌륭한 부인이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그의 고고한 품격은 고구려인의 정직하고 질박하며 강건한 기풍을 더욱 증진시키게 해주었던 것이다.(장도빈, 앞의 책)

평강공주의 행위는 그때 이미 고구려에서 신분질서가 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시라는 평가도 있다.

온달부부는 자아실현을 위해서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면서, 옳은 사고와 바른 생활로 고된 삶을 꿈꾸듯 살아온 사람들이다. 꿈의 실현에는 성실한 마음과 올바른 사고가 으뜸이다. 바로 이들은 그러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고, 또 개척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창조적인 인간상을 구현하고자 했다.(윤경수, <온달전의 현대적 고찰>)
 
KBS2 월화드라마 <달이 뜨는 강>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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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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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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