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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떠나 지역의 마을로 귀농, 자발적 하방을 선택하는 도시민들은 일단 용감하다. 하지만 아무리 용감한 도시민이라도, 외지인으로서, 이주민 처지로 낯선 지역의 마을에 평범한 주민으로 정착, 안착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당장 먹고사는 생업 등 경제적 문제도 크지만, 그보다 먼저 마을 주민으로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문제, 즉 일상의 생활 환경과 생활 방식에 적응하는 게 어렵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듯, 마을에 가면 그 마을의 법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뜻하는 법이란 일반적인 실정법이나 성문법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마을의 설촌 이래 수백 년에서 수십 년 동안 그 마을의 원주민들끼리 만들고 지켜온 일종의 약속 같은 것들이다. 법보다 더 견고하게 고착되고 마을 주민 서로를 연결하는 일종의 고유 관습, 전통 의례, 생활 문화 등이다.

 
마을주민 스스로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는 제주도 어촌마을의 마을공원.
▲ 월정리 공원  마을주민 스스로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는 제주도 어촌마을의 마을공원.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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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마을공동체 사업을 열심히 벌이는 마을의 경우에는 자치규약의 형태로 성문화된 사례도 흔하다. 그러나 법이 있다고 법치사회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듯, 마을에 서로 약속한 자치규약 매뉴얼이 있다고 해서 마을 내부에 갈등과 분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법을 지키지 않거나 같은 법조항을 두고도 해석을 달리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듯, 마을의 규약도 아무렇지 않게 어기거나 마을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귀농인들의 동향을 살피다 보면 '마을발전기금' 문제로 시끄러운 마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마을로 귀농해 들어오려는 이주민들에게 마을에서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을 요구하는 경우다. 만일 마을발전기금을 내지 않고 버티면 마을주민으로 인정이 되지 않으니 마을총회 참석은 고사하고 투명인간이나 왕따 취급을 받기도 한다. 행정에 민원을 제기하면 마을 자체적으로 제정한 마을자치규약이니 행정은 관여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답변만 돌아온다는 것이다.

 
태안군 어촌마을 어민들이 어촌계 중심으로 관리하는 마을공동어장.
▲ 태안 공동어장  태안군 어촌마을 어민들이 어촌계 중심으로 관리하는 마을공동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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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치규약은 강제법 아닌 약속일 뿐
 
마을에서 마을발전기금을 요구하는 합리적 논거가 있다면 마을자치규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마을자치규약은 조선시대 향약과 같이 서로 다른 문화 속에 살다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 간에 올바른 질서를 만들기 위해 제정하는 자치규범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을자치규약은 강제성이나 구속력을 가진 법이 아니라 마을주민들 상호 간의 약속일 뿐이다.
 
따라서 마을발전기금 납부를 요구할 법적인 권리는 애초부터 그 마을의 이장뿐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없다. 마을 구성원에게 공동체 생활 유지를 위해 공동으로 조성하는 자발적 분담금의 성격 정도로 규정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법적인 강제성도 없는 자치규약이 외주인인 귀농인들에게는 원주민들의 텃세로 비친다. 책정한 금액은 적정한지, 기금은 어떻게 사용되는지 규정부터 명확지 않으니 믿음이 가지 않는다. 반면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이주민들이 마을의 공동자산을 이용하는 등 혜택만 받는 무임승차자라고 비판할 수 있다. 자치규약의 해석과 적용기준은 원주민들과 이주민들의 갈등과 분쟁이 시작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태안군 등 일부 어촌마을에서는 어업공동수익금을 마을연금으로 배분한다.
▲ 태안군 어촌마을  태안군 등 일부 어촌마을에서는 어업공동수익금을 마을연금으로 배분한다.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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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마을자치규약'은 더욱 필요하다. 그것도 입장에 따라 해석과 적용이 애매할 소지가 없는 '표준화된 마을자치규약'을 마을마다 갖추어야 한다. 가령, 마을발전기금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정의부터, 해당하는 이주민의 적용 기준, 기금의 사용처와 공개 의무, 회계 처리 방법 등이 명확히 체계화, 성문화된 수준이라야 한다.
 
최근 들어 강원도 평창군, 경남 고성군, 충북 옥천군, 충남 당진시 등 각 지자체들이 속속 표준안을 제정하고 마을에 배포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복잡하고 다변화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힌 원주민과 귀농·귀촌인 간의 갈등, 마을대표 선정 절차의 공정성 결여, 마을 재산관리 및 회계운영의 불투명성 등에 따른 내부 갈등 및 법적인 분쟁을 방지하려는 목적이다.

마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행정 등 외부 힘에 의존하지 않고 주민 스스로의 자정 노력으로 조화롭게 풀어가기 위해서는 내부 합의를 통한 규칙 마련이 상책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설사 기존에 제정된 규약이 있더라도 시대의 변화에 부합하지 않게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해서 사실상 사문화되고 있는 문제도 놓치지 않았다.

마을자치규약 표준안에는 마을회원 권리와 의무, 임원 구성 및 선출, 총회 및 마을회 등 각종 회의 절차, 회계 및 마을 공동재산 관리 규정 등 마을 단위 자치조직 운영에 필요한 투명성과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항목들이 담겨 있다.
 
홍성 홍동면 마을주민들의 <햇살배움터마을교육사회적협동조합>이 방과후청소년을 위해 운영하는 ‘ㅋㅋ만화방’
▲ 홍동 만화방  홍성 홍동면 마을주민들의 <햇살배움터마을교육사회적협동조합>이 방과후청소년을 위해 운영하는 ‘ㅋㅋ만화방’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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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치규약은 마을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관련 조사 연구자료에 따르면 귀농인 등이 마을 이주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여유자금 부족, 생활 불편 등과 같은 경제적·환경적 요인이 단연 크다. 한편 그에 못지않게 '지역 주민과의 갈등'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도시민 유치를 구호로만 부르짖는 해당 지자체는 마을발전기금 등 원주민과 이주민의 갈등 민원에서 '관리 권한이 없다'는 핑계로 뒷짐을 지고 있거나 빠져나갈 사안이 아닌 상황인 것이다.

우리 마을자치규약의 역사는 길고 깊다. 오늘날 지역개발사업을 하면서 용역업체들이 급조한 컨설팅의 단순한 성과물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유농지와 공유지인 산림천택은 모두 마을공동체 등 고유의 지역 생태계에 통합돼 있었다. 향약의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을 다시 떠올리면 된다. 바로 마을자치규약이 지향하는 대로, 마을공동체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인간관계와 집단의 안정적 지속을 위한 기본 원칙이자 방향과 다름없다.
 
특히 상부상조는 농촌사회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기본 실천 덕목이었다. 동물에서 인간까지, 과거에서 현재까지, 농촌이든 도시든 일상적으로 유용했다. 나아가 윤리적으로 인간성이 고양되는 실천 덕목이라는 보편성까지 발휘하고 있다.
 
향약과 더불어 동계(洞契)는 마을의 공동재산 관리, 동제(洞祭), 농업협동(두레), 공동작업, 상호부조 등을 행하는 자치조직이었다. 농민의 기초적 생활단위인 마을(자연촌)을 범위로 소규모화하면서 동계는 마을 주민의 일상생활이 더욱 긴밀하게 결합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 전통마을공동체는 향약과 동계 등 자발적 규약의 실천을 통해 마을 주변의 산과 숲, 강과 바다의 이용에 관한 공동체의 관습과 규율을 제정하고 축적하고 적용했다.
 
무엇보다, 마을공동체 내지 결사체에서 협력과 상호부조는 반드시 규율과 강제와 함께 작동되었다. 벌, 불이익 등 규율이나 강제가 없는 공동체는 무의미하거나 존재할 수 없는 비현실이다. 만일 아직도 그런 마을공동체가 있다고 한다면, 한낱 윤리적 과대망상이나 낭만적인 이데올로기에 빠져있는 건 아닌지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그:#마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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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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