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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가 출범하거나 경제 활성화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제일 먼저 나오는 목소리가 규제완화이다. 이 주장은 거의 모두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 규제의 조정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분석이나 토론이 힘들다.

아무리 자유경제의 신봉자라 하더라도 금융시장을 자율적으로 조정하는 '시장의 손'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규제·감독이 필요하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금융사고가 생겨 큰 곤란을 겪기 전에는 금융회사, 학계, 언론 등 사회 전반에서 규제가 시장기능을 가로 막는다고 생각하고, 규제완화가 절대선인 양 하는 주장이 넘쳐난다.

2022년 7월 금융위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우리 금융산업에도 BTS와 같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플레이어가 나올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조성하겠다"며 '금융규제 혁신회의'를 출범시켰다. 혁신회의에서는 금융회사의 자회사 투자제한을 개선하는 금산분리 규제조정, 전업주의 규제합리화 등 금융협회 수요조사 등을 통해 파악한 사항을 중심으로 36개 과제를 우선 검토·추진하기로 하였다. 혁신회의는 불가침의 성역 없이 기존 규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금융규제는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키고 소비자를 보호하며 시장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규제혁신은 변화하는 시대 환경에 맞게 규제를 정비하여 금융이 본연의 역할을 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면 규제혁신과 규제완화를 동일시하여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금융시장을 발전시킨다고 오인했던 사례는 너무나 많다.

행동경제학자인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는 "금융제도를 계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계획이 수많은 인간의 결점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규제도 그러한데 우리는 제도 도입 시점에 여러 사항을 면밀히 검토하고 준비하는가? 단지 효율적 시장가설만 맹신하여 덜컥 일을 벌이고 나중 그 뒷수습에 엄청난 비용을 치르는 것은 아닌가?"라고 주장한 바 있다.

무분별한 규제완화에 대해 우려하는 점은

첫째, 단기간에 정책성과를 내려다보면 꼭 필요한 규제, 환경변화에 따라 개선이 필요한 규제 및 규제완화 시 부작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부족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 충분한 검토 없이 추진했던 규제완화가 금융사고를 초래한 중요 원인이었다는 교훈을 잊어버리고 무비판적으로 규제완화를 얘기하는 것이다. 작년 '금융규제 혁신회의' 출범시에도 금융위는 규제혁신 추진 방향만을 발표했을 뿐인데 언론에서는 이를 제도개선이 확정된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초연결된 금융시장에서 위기는 제도의 조그만 결함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만기가 길고 대량으로 판매되는 금융상품의 특성상 규제완화의 부작용이 나중에 발견될 경우 그 회복은 매우 어렵다.

과거 카드 영업규제 완화 뒤 2003년 '카드사태'가, 저축은행 영업 요건 완화 뒤 2011년 '저축은행사태'가 발생했다. 또 증권회사의 계열사 지원 금지 규제가 완화된 후 동양증권이 그룹 계열사의 회사채를 부실 판매했던 2013년 '동양사태'가, 자본시장 육성 목적으로 사모펀드의 진입, 운용, 판매 등 규제가 대폭 완화된 후 2019년 '부실사모펀드사태'가 터졌다. 무분별한 규제완화 조치 이후에는 어김없이 금융사고가 발생해 소비자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동양그룹 유동성 위기 여파로 비교적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동양증권까지 빨간불이 켜졌다. 사진은2013년 9월 24일 오전 서울 을지로 동양증권 본점.
 동양그룹 유동성 위기 여파로 비교적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동양증권까지 빨간불이 켜졌다. 사진은2013년 9월 24일 오전 서울 을지로 동양증권 본점.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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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규제완화의 목표가 금융산업의 규모를 키우고 이익만 증대시키려는 데 치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정부는 금융업을 실물경제의 산업 분야와 동일선에서 성장동력의 하나로 보아 금융업의 규모를 키우고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을 정책목표로 삼을 수 있다. 금융회사도 기업이므로 이윤을 내는 것은 당연하나, 규제완화의 목적이 금융시장의 건전화와 금융 본래의 역할 제고에서 벗어나 매출증가, 이익 제고에만 치중할 경우 그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규제조정의 목표가 금융시장의 또 다른 이해관계자인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규제 합리화보다는 금융회사에 치우친 규제완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작년 '금융규제 혁신회의'의 추진과제 선정도 주로 금융권협회의 수요조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과제를 금융업의 새로운 발전기회 창출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소비자의 부담이 증가하거나 금융거래질서가 불공정해지는 등 사회적 비용을 치를 우려가 있는 것이다.

치열한 금융시장의 경쟁에서 규제영역은 금융회사가 생존을 위해서, 이익창출을 위해서도 최우선적으로 대응하는 부분이다. 금융시장 참가자는 규제가 완화된 지점을 집요하게 찾아 이익을 추구한다.
 
SG(소시에테제네랄)증권발 폭락 사태와 관련해 주가조작을 주도한 의혹을 받는 투자컨설팅업체 H사 라덕연 대표가 5월 11일 오전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SG(소시에테제네랄)증권발 폭락 사태와 관련해 주가조작을 주도한 의혹을 받는 투자컨설팅업체 H사 라덕연 대표가 5월 11일 오전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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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차액결제거래(CFD) 관련 주가폭락 사태도 2019년 자본시장법 시행령의 '개인 전문 투자요건'을 완화한 것과도 연관성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부실사모펀드 사태에서도 자본시장의 육성이라는 정책목표는 좋았지만, 시장참가자의 이익 추구 욕망은 규제의 약한 고리만을 찾을 뿐이다.
      
이와 같이 과거 규제완화로 인한 시장의 실패 사례에서 우리는 규제가 완화된 이후 제도의 부작용에 대한 대응이 철저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실사모펀드 사태가 터지기 전에도 여러 사모펀드의 판매과정에 부실징후가 있었으나 적시 대응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 시장 실패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아프지만, 한번 엉크러진 제도를 바로 세우기는 결코 쉽지 않다.

무분별한 규제완화와 반대로 금융 환경변화에 둔감해 규제가 정비되지 않아 시장이 실패할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종래의 관성에 의한 경로의존성으로 현실에 맞는 규제 조정을 하지 않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될 일이다. 가상자산, AI 등 종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규율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합리적 규제조정은 시의성 있게 추진되어야 한다. 실효성 있는 정책을 위해서는 변화의 흐름을 잘 좇아야 한다.

따라서 규제를 도입하거나 완화할 때에는 첫째, 금융회사의 내부통제 시스템 또는 시장 참가자 등에 의한 자율적 외부 감시체제가 작동하는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그에 대한 사전조치가 필요하고, 둘째, 규제조정 후 제도의 정착과정에 대한 사후 모니터링이 중요하며, 셋째, 그에 따른 규제의 재조정이 유기적으로 잘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원래 의도했던 정책목표를 이룰 수 있다.

규제는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다. 금융규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금융사고가 발생하고, 반대로 규제가 지나치게 엄격하면 혁신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키는 건전성 규제와 금융거래 질서 및 소비자보호를 위한 감독역량은 강화하면서, 시장상황을 면밀히 관찰해 규제를 변혁시키는 '조화로운 금융규제 혁신'이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일은 경계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금융혁신도 규제가 균형선을 지킬 때 이루어질 것이다.

태그:#금융 규제완화, #금융 규제혁신, #규제완화의 페해, #규제의 조정, #규제 모니터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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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에서 30 여년을 근무하고 부원장보를 마지막으로 퇴직했습니다. 건전하고 공정한 금융질서 확립과 금융소비자보호라는 조직의 존재이유와 내 본성, 가치추구와의 어울림이 커 업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올바른 금융시장을 위한 고민을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이 글이 금융업의 공정성제고를 위한 생산적 논의의 장이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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