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
음식에 있어서 대한민국 전역이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날이 있다. 바로 추석이다. 평소에는 빵을 즐기느라 찾지도 않던 깨 가득 송편을 먹고, 초콜릿 대신 강정과 약과를 집어 들고, 바나나 파인애플 말고 사과 배를 간택한다. 밥상에는 도라지, 고사리 등의 나물과 각양 각종의 전이 올라가는데, 그야말로 추석은 음식에 있어서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는 독립기념일이라 할 만하다.
명절 상차림의 이 고결하고 순결한 민족적 형식미에 화룡점정 역할을 하는 건 역시 술이다. 조상님들의 전통을 제대로 받든다면 우리 땅에서 키운 햅쌀로 정성스럽게 빚은 우리 술을 상에 올려야겠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곡주보다는 포도 향이 감도는 와인을 너무 좋아합니다.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밥상 차림새의 민족적 형식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와인을 마시고 싶다는 개인적 욕구를 충족하는 절충안을 모색하다가 도출한 결론은 '한국 와인'이었다. 우리 땅에서 재배한 포도로 우리나라 사람이 정성껏 빚은 술이라면, 그것이 설령 곡주는 아니더라도 조상님들께서 용인해주시지 않겠는가.
고민인 것은 그동안 몇 차례 경험했던 한국 와인들이 대체로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슷한 가격대의 외국 와인과 비교해서 맛과 향이 아쉬웠다. 마음 깊은 곳에 고여 있는 애국심을 다섯 두레박 이상 길어 올리지 않는다면 굳이 구입해서 마시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국 와인을 폭넓게 마셔 본 건 아니지만 몇 번 마신 와인들이 모두 아쉬웠으니 선뜻 새로운 와인을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물론 첫술에 배부르겠는가. 삼성이나 현대 같은 기업이 처음부터 반도체와 자동차를 잘 만든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구매 여부를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다만 기대어 볼 만한 하나의 가능성은 존재했다. 지금까지 마시고 아쉬움을 느꼈던 한국 와인은 모두 레드와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속는 셈 치고 화이트와인을 시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으로 요리조리 검색하다가 마음이 동하는 한국 와인 시음기를 발견했다. 글쓴이는 2022년 7월 코엑스에서 열린 주류&와인 박람회에서 '라라'라는 한국 화이트와인을 맛보고 머릿속에 바로 느낌표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이번 추석엔 국내산 와인
예상을 뛰어넘는 좋은 인상을 받아 일부러 한 병 구매해서 집에 와서 또 마셨다는데, 한국 와인이라서 긍정적인 리뷰를 쓴 게 아니라 진짜 맛있어서 그렇다고 당구장 표시(※)까지 넣어가며 강조했다.
업체 제공이 아닌 내돈내산 후기이고 다양한 국가의 와인에 대해 꾸준히 리뷰를 남긴 블로그라서 더욱 신뢰가 갔다. 그렇게 후기에 낚여 충청북도 영동군에 위치한 산막와이너리에서 만든 '라라'를 구매하게 되었다. 가격은 25,000원이며 전통주로 분류되어서인지 인터넷 주문이 가능했다.
9월 11일에 주문하고 결제했는데 9월 13일이 되어도 여전히 상품준비중이어서 착오가 있나 싶어 와이너리에 직접 전화로 문의했다. 마침 포도 수확이 바쁜 시기라서 주문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발송한단다. 전화 문의 바로 다음 날인 9월 14일에 집에 택배가 도착했다. 하여튼 나도 참 성질머리 급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포장을 여니 안내 책자가 들어있었다. 한국 최초로 세계 최대규모 국제 와인 대회에서 품질을 인정받았으며,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철저하게 배제한 친환경농법으로 포도를 재배하고 있단다.
책자에는 여덟 가지 와인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에 내가 구입한 '라라'는 청수 품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알코올 도수는 12%인데 제품의 후면 라벨에 '알코올 도수를 맞추기 위해 설탕을 추가하였으나 잔당은 거의 없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아마도 포도의 당도가 알코올 도수 12%가 나올 만큼 받쳐주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시음기에서 칭찬 일색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차례상에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검증을 위한 사전 테스트에 돌입했다. 추석 밥상과 비슷한 느낌을 내기 위해서 평소에는 잘 가지도 않는 현대백화점 목동점을 방문해 송편, 전, 나물 등을 구매했다.
토요일 저녁 온 가족이 식탁에 앉아서 간만에 백화점 음식을 벌여 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냉큼 송편과 절편 떡부터 집어 든다. 평소라면 일단 안주부터 먹은 후 한 잔 마시기 시작하겠지만, 오늘은 한국 화이트와인에 대한 호기심에서 와인 잔부터 손이 갔다. 차분하게 스월링을 한 후 잔 안에 모인 와인 향을 백 미터 전력 질주 후에나 있을 법한 혼신의 들숨으로 한껏 들이켰다.
오잉? 굉장히 반갑고 아련한 의외의 향이 후강을 가득 채운다. 소싯적 청포도 알을 떼어내 손에 즙을 묻혀가며 먹을 때 코에서 감돌던 바로 그 냄새다. 명명백백한 청포도 향이 강하게 응축되어 강렬하게 폐부로 들어오는데, 그 순간 큼직한 청포도 사탕이 떠올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향이다.
그동안 수많은 화이트와인을 마셔봤지만, 토종 한국인에게 이렇게나 강렬한 노스텔지어를 느끼게 한 녀석은 처음이다. 와인이라는 이국적 형식의 음식에서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가 감지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헛웃음 비슷한 웃음이 나왔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농가에선 외면, 양조장에선 환영
식탁 건너편에서 한 모금 마시던 아내가 불쑥 말을 건넨다.
"예전에 마셨던 국산 레드와인보다 훨씬 낫네."
"기대 이상이야. 상당히 괜찮네."
"향기만 맡아서는 달콤한 느낌인데 입에서는 단맛이 하나도 없어. 코와 입에서 각각 느낌이 완전히 달라서 흥미롭네."
"옛날에 먹던 큰 눈깔사탕있잖아. 청포도 맛 나는 것 말이야. 그 향이 나니까 참 재밌어. 근데 인공적인 느낌이 아니고 자연스러워."
"코에서는 향기가 화려화려 달콤달콤한데, 입에서는 한 나라의 공주에게서 느껴질 법한 기품있고 도도한 차가움이 느껴져."
아내의 표현처럼 입에서는 차분한 느낌이 강하다. 그렇다고 심심하거나 재미없는 게 아니라 단아한 차분함이랄까. 적당하게 기분 좋은 신맛에 밸런스도 좋고 음식과의 궁합도 무난하다.
눈이 확 떠지는 시너지가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나물, 전, 송편 등과도 특별히 거슬리는 것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일부러 김치를 먹고 나서 마셨는데도 별다른 위화감이 없다. 그냥 집밥 먹으면서 반주로 마셔도 괜찮겠다 싶은 정도다.
이렇게 느낌이 좋다 보니 청수라는 품종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원래는 씨 없는 식용 청포도를 만들기 위해 농촌진흥청이 육종한 포도란다. 식감도 좋고 향도 강하며 추위에도 잘 견디고 열매도 잘 맺혀서 장점이 많았다.
하지만 수확기에 포도알 떨어짐 현상이 너무 심해서 상품성이 떨어져서 농가에서 외면 받았는데, 양조용으로 사용되면서 다시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어쩐지 기존 와인에서 느낄 수 없었던 식용포도의 향기가 강하게 감지된다 했더니 그러한 사연이 있었구나. 이 와인을 마시며 '네가 여기서 왜 나와!'라는 느낌을 받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추석 밥상의 민족적 형식을 헤치지 않는 동시에 굳이 애국심에 기대지 않고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와인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외국 와인의 아류가 아닌 한국 와인만의 개성을 갖고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이것 참 제대로구나. 우야튼 술 있는 한가위만큼은, 위 증즐가 대평성대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