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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수많은 민간인은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함에도 무참히 희생됐다. 함양군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지리적 여건으로 빨치산이 활동하는 본거지가 되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공비토벌작전 중 빨치산을 도왔다는 명분으로 함양에서는 민간인 학살사건이 자행되었다.

함양군 읍면 민간인 80여 명을 포함해 보도연맹, 연고지가 밝혀지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무고한 희생자가 300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 함양민간인 희생사건 86명, 강정금 상해사건 1명, 부산형무소 사건 16명, 국민보도연맹사건 29명, 적대세력사건 29명, 전주형무소사건 2명, 산청·거창 등 민간인희생사건 2명, 서부경남민간인 희생사건 15명, 전북지역민간인 희생사건 1명 총 181명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으로 명예를 회복한다. 

하지만 70여 년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온 유족들의 설움은 아직도 깊기만 하다. 희생자 유족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그날의 진실이 모두 밝혀지는 날까지 우리는 그들의 기억을 붙잡아 둘 의무를 갖게 됐다. 그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이르다 하기엔 너무 늦었고 늦었다고 하기보단 다행이었다. 아픈 기억을 들추어내야 했던 힘든 작업이었음에도 증언해 준 유족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한다.[편집자말]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전라남도 강진군, 광주시, 목포시, 무안군, 영광군, 영암군, 장흥군, 해남군, 화순군, 경상남도 함양군 등 10개 시군에서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자가 발생했다. 1947년 12월21일부터 1952년 11월23일까지 적대세력 피해자는 74명으로 추정됐다.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사건의 가해주체는 지방좌익과 빨치산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여순사건으로 파생된 구 빨치산과 지방좌익에 의한 희생사건이 발행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부터 인민군 점령기(1950. 7-9월말)에는 분주소에서 활동하던 지방좌익과 인민군에 의한 희생·강제연행 사건이 발생했고 인민군 퇴각(1950. 10월) 이후에는 지발좌익과 인민군 잔병들이 빨치산이 되어 이들에 의한 희생·상해 사건이 발생했다.

총 26개의 사건 중 2건을 제외한 24건이 희생사건이었다. 희생사건 중 1건이 여순사건 이전, 12건이 여순사건 이후부터 한국전쟁 이전 시기, 7건이 한국전쟁 발발 이후부터 인민군 점령기에 발생하였고 4건은 인민군 퇴각 이후 발생했다.

강제연행 사건1건은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의용군으로 강제연행된 사건이었고 상해사건 1건은 인민군 퇴각 이후 발생하였다. 희생자·강제연행된 자·상해자로 확인 또는 추정된 진실규명대상자 53명은 남성이 42명, 여성이 11명이었다.

남성 피해자들은 주로 이장, 면장, 공무원, 의용경찰, 대한청년단원, 우익단체원 등 소위 '우익인사'로 분류되어 희생되었고 여성 피해자의 대부분은 이들의 가족 및 일가 등의 이유로 희생됐다. 그 밖에도 교사, 광부, 철도청 직원 등이 각자의 직업군 안에서 우익활동을 한 이유로 또는 직업군 안의 개인적인 갈등이 이념화되어 희생되기도 하였다. 또한 평범한 다수의 농민들이 이유없이 또는 오해로 빨치산과 지방좌익의 습격을 당했다.

점검 나왔다고 문을 두드리길래 나가보니...
 
함양민간인희생자 유족 박영학씨
 함양민간인희생자 유족 박영학씨
ⓒ 주간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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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학씨의 아버지 형제는 5남매였다. 남자형제 중 막내였던 아버지는 영특해 큰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와세다 대학을 나온 박영학씨 아버지는 대동아지진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그 당시 처녀들은 다 위안부로 끌려가고 하니까 어머니도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열 여덟에 결혼을 하신 거라. 그 당시 외삼촌이 우리 아버지를 맘에 들어 하셔서 중매를 한 거라. 결혼한 사람들은 위안부를 못가니까 외삼촌이 정보를 듣고 우리 어머니를 빨리 결혼 시켰지."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는 정식발령을 받고 한달 만에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편을 잡으셨어. 임시교사를 3개월 정도 하시다가 진주에서 정교사 시험을 보시고 1등을 했어. 발령 받으신지 한 달 만에 죽어버렸어. 빨갱이 놈들한테."

박영학씨는 세 살, 동생은 유복자였고 어머니는 스물 두 살이었다.

"빨갱이들이 자기들한테 가입하라고 했는데 안하니까 표적이 된 거지. 몇 번이나 협박편지가 왔더래. 아버지가 신경 쓰지 말라시며 태우셨는데 그런 게 자꾸 날아오니까 우리 어머니가 뭔가 하고 봤더니 가입을 안 하면 박길주 반동분자 언젠가는 쏴 죽인다고 적혀 있더래."

박영학씨 아버지는 아내에겐 안심하라고 했지만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가족과 고향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어머니한테 그러더래. 며칠만 고생해라, 서울이든 부산으로 가자, 그랬는데 그 정보를 누가 찌른 거지."

이곳 기곡마을에서는 일본에서 가라데 선수였던 사람과 박영학씨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

"점검 나왔다고 문을 두드리길래 나가보니 총을 들이밀고 있었다고 해요. 싸리문 앞에 묶어놓고 쏴 죽였어."

돈을 구해오면 살려준다는 말에 어머니가 바로 앞집 집안 어르신께 돈을 구하러 뛰어가는 중에 뒤에서 총소리가 났다.

"두 방인가 심장에 맞았데. 밤새도록 피 흘리다가 새벽에 죽었지. 그 당시에 똑똑한 사람들, 포섭 안 되면 다 죽였어. 참 아까운 사람이지."

사건 당시 세 살이었던 박영학씨는 아버지 얼굴도 기억할 수 없다. 아버지 사건에 대해선 어머니, 큰아버지, 사촌 형들에게 들은 내용이다. 성장하면서 알게 된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나 억울했던 박영학씨는 직접 이 사건을 알아봤다.

젊은 시절 배를 탔던 박영학씨는 배에서 내리는 휴가 때마다 부산 서울 대구로 아버지와 같이 근무했던 분들을 찾아다녔다. 그 당시 돈 1000여 만원 이상 써 가며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하며 기록을 남겼다. 그를 보자 친절하게 얘기해주는 분도 있었지만 "세월이 다 그랬다. 너희 아버지가 운이 없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는 "그래서 이 일을 알아보는 게 참 어렵구나 생각했다. 내가 배를 20년 탔는데 그때만 해도 총각이던 때라 이꼴저꼴 보기 싫어서 캐나다에 그냥 내리려고 했다"며 한탄했다.

"이런 고통을 당한 자녀들을 정부에서 내몰라 하면 안 돼. 47년생들이 이런 가정이 많아요. 칠십이 넘은 내가 이 나이에 혜택 보려는 것도 아니고 너무나 억울하게 죽었으니까. 민간인 학살이며 보도연맹 해서 군인이 죽이고 적대세력이 죽이고 한 사건이 얼마나 많나. 정부에서 세월은 흘렀지만 이렇게 우리처럼 불우하게 큰 가정들이 있다 이런걸 알아주면 좋겠더라고".

* 이 기사는 증언자의 구술을 그대로 살리고자 방언을 사용하였습니다. 구술 내용 중 날짜, 나이, 숫자 등에는 구술자의 기억의 외곡이 있을 수 있으며 전체 내용 또한 증언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기록됐습니다.

유족

■ 이름 : 박영학
■ 희생자와의 관계 : 희생자의 아들
■ 생년월일 : 1947년 4월1일 / 만 76세
■ 성별 : 남
■ 주소 : 함양군 안의면 안의초등길33
■ 직업 / 경력 : 항해사


희생자

■ 이름 : 박길주
■ 생년월일 : 1923년 9월28일
■ 사망일시 : 1949년 2월20일
■ 성별 : 남
■ 결혼여부 : 기혼
■ 주소 : 경남 함양군 안의면 귀곡리 625
■ 직업 / 경력 : 초등학교 교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함양뉴스(주간함양)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함양 민간인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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