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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요?" '후쿠시마의 아이'였던 한 소녀가 던진 이 질문을 기억합니다. 12년이 지나 성인이 되었을 그 소녀는 엄마가 되어 있을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발전소가 있는 마을에 사는 ‘그들’은 안녕할까요? ‘그들’의 삶, 일상, 활동과 목소리를 따라 ‘우리’로 얽힌 사람들, 그 인연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연결될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답을 찾아 원불교환경연대 탈핵기록단이 한 달에 한 번, ‘그들’과 ‘이웃’을 만나러 갑니다. 누군가가 외치는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라는 말들을 곱씹다 보면 어느 지역의 문제, 그들만의 문제라고 덮어두지는 못할 겁니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와 마음을 잠깐만 내주세요.[편집자말]
장영식은 새로운 탈핵운동이란 참회와 고백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것은 현장, 누군가가 살아가는 삶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존중과도 연결된다.   
  
사실 문재인 정권에서 탈원전정책을 실행한 것이 대단하기도 했지만 그 방식을 생각하면 너무 거칠고 단순하게 가지 않았나 생각해요. 핵발전소를 지지하고 찬성하는 집단을 하나같이 '핵마피아'로 낙인찍고 모두 없애 버려야 하는 집단으로만 접근하니, 우리 스스로도 왜 탈핵을 하는지 우리의 삶과 핵발전소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어떤 피해를 받아왔는지를 고민할 시간이나 여유도 없었죠. 그저 낙인 찍고, 피아를 구분해서 핵발전소를 없애자고 말하는 방식이 한편으론 통쾌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사실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잖아요.     

장영식은 당시 고리 핵발전소를 건설했던 1세대 전문가들을 분노로만 접근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분들은 "진짜 애국심"으로 지었다고 하세요. 모든 부품을 외국에서 들어와야 하니까 나사 하나하나를 아끼면서 발전소를 지었을 때 얼마나 보람을 느꼈겠어요. 전기 때문에 산업화를 이루었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 '나쁜 놈들'이라고 하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 "여러분들의 헌신과 수고 때문에 지금의 한국이 있을 수 있었다. 고맙다. 지역사회 주민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충분히 그들의 노고와 희생을 인정하되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고 전환을 요구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 전환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탈원전에 접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분들의 자존심은 살려주면서 전환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존중과 연민, 이해와 사랑은 없고 분노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장영식은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앞으로의 탈핵 운동은 "찬핵 아니면 반핵의 구도로 서로 비판하고, 반대하며 싸우는 모습만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핵발전소가 아닌 대안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등 과거와는 싸우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탈핵 활동가들은 정말 부산에서 강원도까지 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나름으로 기록도 하고, 고민도 하고 정말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송전탑-핵발전소-화력발전소가 7번 국도를 따라 이어져 있고, 우리나라 중앙집중형 에너지시스템의 모순이 고스란히 있거든요. 무엇보다 현장에 직접 가봐야 문제를, 그 속의 구체적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거죠. 그래서 모든 게 연결되어있다는 걸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머리로만 그걸 떠올리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그릴 수 있어야 진정한 이해와 공감이 생기고, 문제에 다가가는 새로운 능력이 생긴다고 봐요. 이거 아니면 저거, 설득의 과정 없이 주입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득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겐 이것이 더 필요한 거죠.

현장을 기록하는 이가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

장영식은 밀양을 기록한 뒤 <밀양아리랑>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는 "차마 눈으로 볼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는 사진가로서의 냉정한 이성을 잃고 울면서 항의하고 항의하면서 셔터를 끊었다. 나로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참혹한 현장이었다"라며 사진 작가로서 현장과의 거리감을 두는 것에 실패하고 분노했던 하루를 기록했다.

현장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기록하고 목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70대 노인들이 경찰과 한전 직원들에게 고착 당하는 모습에 장영식은 분노했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대신 할매들과 함께 싸웠다. 또한 2012년 1월 보라마을 주민 이치우씨가 자신의 논에 용역들이 장비를 들여놓고 공사를 시작하려 하자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이곳을 2012년 8월에 방문했던 장영식은 길에 있던 '이상한 자국'을 오랫동안 응시했고, 그 자국들을 쓰다듬었다. 그는 "이 비극적인 슬픈 자국을 촬영하여 기록으로 남겨두었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부정의한 현장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증언자인 거잖아요, 저는. 그렇다 보니 그분들이 절규하고 고통받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기록하는 거죠 저의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절망과 분노를 네모 프레임에 담을 때도 힘들지만 찍은 사진을 제 작업실에서 현상해서 볼 때 그 순간이 참 두려울 때가 있어요. 타인의 고통을 나는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어떤 순간을 찍을 것인가, 내가 찍은 이 고통스러운 사진을 세상에 내놓을 것인가. 이런 고민이 저에게 주어지는 거죠, 너무나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죠.
 
보라마을 고 이치우님의 분신 자국
 보라마을 고 이치우님의 분신 자국
ⓒ 장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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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고통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일, 기록한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세상에 공개하는 과정에서 장영식은 때로는 트라우마를 겪기도 했다. 그에게 더욱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사진을 요구할 때 장영식은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을 느꼈다.    
 
현장의 어떤 사람들은 사진작가인 나에게 '선정적인 사진'을 요구했어요. 나는 그런 사진을 찍는 것을 안 좋아했는데 제가 찍은 사진을 보내주면 "선생님, 이런 작품 사진 말고요"라면서 더 주민들의 고통과 절규가 직접적으로 담긴 사진을 요구했다. 그러면 나는 "어...어..." 이러면서 밤새 당혹스러운 거죠.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굉장히 당황, 당혹스러웠어요. 만약 누군가가 분신을 했다. 나는 그럼 그 사진을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겠죠. 그리고 설사 찍었다 하더라도 어느 시점에 공개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다음 날 공개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근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바로 달라고 하니까, 나에게는 그게 너무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거지요. 할매들이, 주민들이 고통받는 사진들을 달라고 하니까, 그래서 때로는 저분들이 '상처를 상처로 갚으려고 하는구나'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물론 그분들은 정말 절박하니까 자극적인 사진을 저에게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런 사진들은 사실 휴대폰으로 얼마든지 찍을 수 있을텐데. 그런 트라우마들이 많죠.

"카메라가 무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영식은 2014년 이후 약 10년 동안 전국의 현장을 방문하여 고통과 아픔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포토에세이>는 장영식이 새롭게 시도한 글쓰기 방식으로 사진과 글로 현장의 문제를 날카롭게 정리하였다. 밀양 송전탑에서 고리 핵발전소에 의해 사라진 골매마을로 확대된 관심과 발걸음이 포토에세이를 통하여 7번 국도로 이어졌다.    
 
7번 국도는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핵발전소랑 송전탑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원도 삼척에는 또 어마어마하게 화력발전소가 있는 거죠. 우리는 강원도 생각하면 청정한 지역으로만 생각하잖아요. 근데 거기에 화력발전소가 집중되어있는 거예요. 아름다운 맹방해변이 파헤쳐지고 그 위에 석탄을 운반하기 위한 선착장이 건설되는데 탈핵과 탈석탄을 선언한 정부에서 이런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죠. 7번 국도는 아름다운 해변으로만 알려졌지만 우리나라의 폭력적인 에너지 체제를 보여주고 있죠. 송전탑, 핵발전소 그리고 화력발전소까지.

불과 2~3년 전만 해도 전국을 다 다니며 현장을 기록했던 장영식은 최근에는 카메라가 좀 무겁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탈진되어서, 텅 빈 정신이 오는 거예요, 갑자기 모든 것이 텅 빈 상태가 오는 거예요. 이 상태를 어떻게 내가, 극복할 것인지 고민 중이에요. 사실 카메라의 절대적인 무게는 그대로지만 왜인지 모르겠지만 좀 무겁게 느껴지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해변에 건설되는 선착장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해변에 건설되는 선착장
ⓒ 장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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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전국을 가진 못할 것 같고 대신 내가 가고 싶은 곳만 가겠다, 그렇게 준비를 하는 거죠. 빨리 핵발전과 생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진작가가 나오면 좋겠는데 한국사회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는 대부분 노동문제에만 집중하니까.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핵발전이나 환경, 생태 문제에도 관심을 두는 작가가 나타나야 하는데 좀 아쉬운 거죠. 사실 거기에 대한 중압감이 좀 많아요. 여전히 친한 활동가들은 저를 감사하게도  "자기들의 든든한 지원자"라고 부르지만, 모르겠어요. 가끔 제가 중압감도 느끼고, 이제는 좀 무겁다라는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들어요.     

매달 두 편 이상의 포토에세이를 쓰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여 그들을 이해하고 기록한다는 것은 에너지와 함께 현장에 대한 이해 및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순간엔 제가 절필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스스로 현장에 대해 이해나 공부가 충분히 되지 않은 채 글을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좀 창피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주기적으로 글만 쓰는 게 아니라 글과 사진을 같이 한다는 것이 너무 빨리 오는 거죠. 예전보다 그 속도가 빠르게 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거기서 오는 트라우마도 있었고. 밤에 혼자서 작업을 하다,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도 있었으니까요.
 

장영식이 세상을 기록하는 법

사진을 모르는 나는 장영식에게 아주 기본적인 것을 물어보았다. 현장에서 그는 과연 몇백, 몇천 장의 사진을 찍을까? 그렇게 찍은 수많은 사진 중 어떤 사진을 무슨 기준으로 고를까? 나의 질문에 카메라가 무겁다고 말하던 장영식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느껴졌다.    
 
저는 현장에서 후회 없이 셔터를 누르라고 말해요. 아끼지 말고 가져간 메모리 카드를 가득 담을 수 있을 만큼 찍으라고 말하죠. "자기가 가져간 메모리는 다 써라. 치열하게 고민해서 찍고, 와서 고민해서 고르고." 물론 저는 125기가를 가져가지만, 그걸 다 찍는 건 굉장히 힘들거든요. 그냥 최선을 다해서 찍어보는 거죠. 근데 어떤 사람은 '오늘 나는 찍을 게 없더라'고 말하면서 10장 정도만 찍었대요. 물론 그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게 잘 이해는 안 되죠. 저는 현장에 가면 처음에는 전체적인 배경도 보고 들어갔다가 더 깊이 들어가고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고, 그런 거리(감)가 필요해요. 그러다 집중할 때는 뭐 정신없지. 사진을 찍는데 어떤 곳에서는 정말 정신없는 곳이 있어요. 완전히 클라이맥스처럼. 그 어떤 것도 양보할 수 없는. 그때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찍거든. 완전히 몰입한 거지. 깊이 들어가거든. 일단 들어가서 찍는 거지, 그럴 때가 있어요. 경찰이 막든, 누가 막든 전 들어가죠. 근데 전 연사로 안 찍고, 단사로 찍으니까. 어떤 사람은 연사로 찍는데 저는 그걸 이해 못 하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장을 어떻게 찍고 남길 것이냐도, 그걸 연사로 찍냐, 한 컷 한 컷 단사로 찍느냐도 굉장히 중요한 고민거리죠 저에게는.

장영식은 항상 현장 가기 전날 사진기를 꼼꼼히 점검한다. 배터리와 메모리카드를 점검하고 멀리 가는 날엔 a/s 센터에 가서 사진기랑 렌즈까지 한 번 더 확인하고 현장에 간다. 그런 그에게 사진기는 무엇을 의미할까?
 
저는 사진기를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나의 벗으로 생각하죠. 운명적인 만남으로 보기 때문에 그 벗에게 내가 소홀할 수 없는 거죠. 내가 찍고 싶은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주는 게 얼마나 고마워. 내 마음과 내 관점과 교감하는 그대로 사진에 드러날 경우엔 정말 고맙죠. 그래서 어떨 때는 사진기를 보고  "고맙다, 수고했다" 그러거든요. 이게 나한테는 단순한 기계나 도구가 아닌 거죠. 이런 마음이나 교감 없이는 결과물이 안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는 거죠. 또 내가 미리 계획하고 '오늘 이런 사진을 찍겠다'라고 계획하고 가면 그런 사진이 안 나와요. 오늘은 무엇을 찍어야겠다가 아니라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라는 생각만 가지고 가죠.     

그렇다면 장영식은 단순한 도구나 기계가 아닌 '벗'인 카메라가 찍은 수많은 사진 중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까? 혹은 무엇은 왜 선택되지 않을까?
    
그냥 교감이죠. 특별히 어떤 게 좋다기보다는 무언가 내가 찍었을 때의 느낌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충족해주면 그게 바로 좋은 사진이고. 그게 아니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 거죠. 근데 그래도 세 번은 봐요. 감정이 안 오면, 그냥 이건 좋은 사진일 뿐이지 느낌이 있는 사진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죠.

부르심에 대한 응답

마지막으로 현장을 방문하여 기록하는 것이 그의 종교와 관련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그런 것도 많죠. 자꾸 이끌림이 있는 거죠"라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아담, 너 어디에 있느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들리는 '부르심'에 이끌려 현장으로 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갔을 때  70~80% 갈 때마다 어떤 일들이 발생했어요. 슬픈 이야기지만. 그런 일이 많았어요.     

부르심에 대한 응답. 사진기를 들고 현장을 방문하여 누군가의 삶과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그에게 또 다른 방식의 소통과 이해였다.
 
사진작가 장영식
 사진작가 장영식
ⓒ 장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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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를 들고 산길을 걷고, 골목길을 걷는 것이 그냥 걷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도 하나의 소통이거든요. 자연과 세상과 인간을 더 이해하기 위해 현장을 찾는 것 같아요. 근데 네모 프레임만 보고 가면 정작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안 보이잖아요. 마을의 역사를 느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네모 프레임만 쫓는 거죠.    

사진의 70%는 발이 찍는다고 생각해요. 현장에 가면 조그마한 골목길을 걷고, 공기를 느끼고, 바람의 소중함을 느끼죠. 그리고 항상 질문하죠. "너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이 아담에게 이런 질문을 했는데. 그래서 항상 고민하죠. 난 어디에 있지, 난 무엇을 기록해야 할지에 대해. 그래서 나의 사진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해요. 인위적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잘 안 되고 내 마음이 이끌리고 갔을 때 내가 작업했던 내용은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하죠. 그 부르심과 응답의 관계를 잘 생각해봐야죠.     

장영식의 사진과 글, 인터뷰를 통해 나의 안락한 삶을 위해 핵발전소, 송전탑, 화력발전소로 고통받아야 했던 수많은 '유민'들을 떠올렸고, 그들의 굴곡진 그러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이해하려 했다. 더 많은 영식이 현장과 사람들을 기록하고 현상 너머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때 비로소 장영식은 무거웠던 짐들을 내려놓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가 아끼는 벗과 함께 현장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탈핵 잇다 브런치(https://brunch.co.kr/@wcvictory/7#comments)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장영식, #탈핵잇다, #고리핵발전소, #골매마을, #밀양송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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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수료생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고, 관련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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