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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요?" '후쿠시마의 아이'였던 한 소녀가 던진 이 질문을 기억합니다. 12년이 지나 성인이 되었을 그 소녀는 엄마가 되어 있을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발전소가 있는 마을에 사는 ‘그들’은 안녕할까요? ‘그들’의 삶, 일상, 활동과 목소리를 따라 ‘우리’로 얽힌 사람들, 그 인연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연결될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답을 찾아 원불교환경연대 탈핵기록단이 한 달에 한 번, ‘그들’과 ‘이웃’을 만나러 갑니다. 누군가가 외치는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라는 말들을 곱씹다 보면 어느 지역의 문제, 그들만의 문제라고 덮어두지는 못할 겁니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와 마음을 잠깐만 내주세요.[편집자말]
교육철학을 공부한 장영식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짧은 교직 생활을 했지만, 1992년에 이를 그만두고 사진에 입문했다. 꽃, 정물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기록하다, 309일 동안 '85호 크레인'에서 농성을 벌였던 김진숙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을 알게 되면서 그의 사진 세계 및 인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후 장영식은 전국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이해하고 고통받는 사람과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에서 살아가고, 고통받으며 또 싸우는 다양한 사람들에 주목한다. 현장에서 자신이 파악한 문제의 본질을 사진과 글로 요약하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장영식의 포토에세이"에 2014년 이후로 약 10년째 전하고 있다.

2014년 밀양, 그곳에서 처음으로 장영식을 만났다. 내가 밀양을 방문했던 이유는 밀양 주민의 송전탑 투쟁과 한 노인의 분신 때문이었다. 송전탑이 들어설 부지에 주민들은 농성장을 만들었고, 시민 연대자들과 카메라를 든 사진작가가 함께 있었다.
큰 키에 모자를 쓰고 별말 없이 무뚝뚝해 보였지만, 카메라를 손에 놓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현장과 사람들을 기록한 이가 장영식이었다. 현장을 목격하고, 사람을 기록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문제를 알리는 그를 약 10년 뒤 '탈핵 잇다'를 통해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번째 인터뷰는 7월 22일, 두 번째 인터뷰는 8월 5일 부산에서 진행했다.

85호 크레인

그가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사진작가가 된 이유는 '사진에 대한 이상한 애틋함' 혹은 '미련' 때문이었다. 장영식은 사진에 관심을 두고 본격적으로 입문하는 다른 작가들처럼 처음에는 정물이나 풍경을 찍다가 현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장영식의 사진과 삶이 완전히 바뀐 것은 2011년, 85호 크레인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현장을 찍기 시작한 것은  2011년 85호 크레인에서 시작해요. 제가 아들하고 우연히 수요미사를 갔는데, 저 높은 크레인에 사람이 있다는 거야. 처음 간 날이 진숙 씨 생일이었는지 학생들이 손자보를 만들고 생일 케이크를 전달하려고 정문까지 갔는데, 떡대 같은 용역 직원들이 그걸 막았어요. '제가 부산에 살면서도,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었다….'라는 반성과 성찰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이후 85호 크레인을 꾸준히 촬영했고, 내려올 때까지 했으니까. 저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의 매일 갔어요.
 
김진숙 지도위원
 김진숙 지도위원
ⓒ 장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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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식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200일이 되어 가던 여름 이후, 약 100일이 넘도록 매일 현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그의 사진과 인생이 어떻게, 왜 바뀌게 된 걸까?
 
지금까지의 사진들은 그냥 유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진에 대한 철학이 바뀌었어요. 사진은 사회적 담론을 만들고, 사회적 약자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진숙 씨의 투쟁을 기록하면서 앞으로 내가 무엇을 찍어야 할지, 어떤 현장을 기록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어요.

2013년 5월의 밀양

장영식의 사진과 인생에 영향을 준 것은 '85호 크레인' 외에도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밀양'이다. 밀양 송전탑 갈등은 대한민국 중앙집중형 에너지 체제의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회 갈등 중 하나이며 '전기는 할매의 눈물을 타고 흐른다'와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라는 상징적인 구호를 남기기도 하였다.
   
2012년부터 밀양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부산에서 단체로 밀양에 갈 기회가 생겨서 처음으로 가 봤죠. 밀양에 집중하게 된 건  2013년 5월부터였어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2013년 5월 22일에 제가 울산에서 온 연대자랑 새벽에 카톡을 주고받으면서 현장에 갔어요.
 
2013년 5월 22일 장영식이 농성장에 처음 갔을 때, 그곳을 지키던 주민이 그를 보고 가슴을 치면서 "아이고, 이제 우리 살았다, 우리 살았어"라고 말했는데, 장영식은 그 주민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그 역시 아무런 힘도 없는 사진작가일 뿐인데 왜 할매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그러나 장영식은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주민들이 사진작가의 방문에 그리 좋아했는지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광주를 겪고, 광주를 기억하는 5월에 산골짜기에서 할매들을 고립시킨다는 걸 솔직히 상상도 할 수 없었죠. 30도가 넘는 아주 뜨거운 날씨였는데, 할매 일고여덟 분이 물도 못 마시고, 소변도 못 보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경찰이랑 한전 직원이 못 들어간다고 막더라고요. 기가 막히는 거죠. 그걸 뚫고 현장에 가보니, 한전 직원은 할매들을 고립시키고, 경찰들은 그 광경을 보고도 그냥 점심이나 먹고 물 마시면서 그늘에서 쉬고 있더라고요. 거기서 내가 너무 화가 나서 한전 직원과 경찰에게 "너희들이 인간이냐"고 울부 짖었죠.     

한전과 경찰 20~30여 명은 밀양 주민들을 고착시키기 시작했고, 할매들은 옷을 벗고 똥물을 던지며 저항하다 결국엔 끌려 나왔다. 장영식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2013년 5월의 밀양을 찍었고, 그 사진들을 <부산일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을 통해 알렸다.
 
2014년 6월 11일 밀양 송전탑 행정대집행 직전의 농성장
 2014년 6월 11일 밀양 송전탑 행정대집행 직전의 농성장
ⓒ 장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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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진을 본 시민들은 밀양에서 벌어지는 비민주적인 모습에 사회적인 공분을 느꼈고 더 많은 사람이 밀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어 장영식은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제목의 밀양 송전탑 투쟁 사진전을 2013년 6월 27일부터 28일까지 국회에서 열었다.
 
농성장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것은 철저하게 거리를 둔 채 제 작업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뭔가 인간적으로 할매들과 친해지기까지는 오래 걸렸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경계가 풀리면서, 느슨해진 것도 있지만, 장점도 있더라고요. 지금도 교장 선생님 부부, 덕촌할머니, 동래할머니, 영원한 투사였던 한옥순 할매... 그분들의 목소리들이 지금까지도 쟁쟁하니까. 제가 허투루 살 수 없는 거죠. 아마 밀양은 많은 사람에게 굉장히, 울림이 있었던 것 같아요.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을 오랜 기간 기록하면서 장영식은 사회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무엇을 찍을지 고민했다. 이후 밀양을 만나면서 장영식은 그동안 관심을 두지 못했던 '핵발전소'에 의존하는 우리의 삶과 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희생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

장영식은 "밀양 때문에 우리가 탈핵을 좀 더 성찰하게 되었고, 근본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래서일까. 국내·외의 다양한 현장을 기록한 장영식이지만, 그는 밀양이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밀양을 통해 알게 된, 국가와 한전, 경찰이 지역의 촌로들을 대하는 가혹한 방식, 힘든 현장에서도 연대와 우애를 나누었던 사람들. 무엇보다 장영식은 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주민들의 직관과 통찰력에 많이 놀랐다.

"제가 밀양 이후에 고리 핵발전소가 보이는 골매마을을 기록하기 시작했거든요. 핵발전소는 전혀 몰랐는데, 이 마을을 가게 된 건 밀양 한옥순 할매가 어느 날 저에게 던진 질문 때문이었어요."     
 
하루는 할매가 "송전탑 뒤에 뭐가 있는지 아노?"라고 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핵발전소 잘 몰랐거든요. 그냥 밀양이 아파서 이곳에 왔고 최선을 다해 기록했는데. 좀 충격을 받았어요. 음, 뭐가 있지? 할매가 하는 말이 '이 송전탑 너머에 핵발전소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765kV 송전탑은 핵발전소의 자식'이라는 거예요. 나는 그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어떻게 할매가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송전탑이 핵발전의 자식'이라는 말을. 그래서 내가 약속을 했어요. 밀양 싸움이 끝나면 핵발전소를 꼭 가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2014년 6월 행정대집행이 끝나고, 가을인가 겨울에 처음 갔는데, 가다 보니 조그마한 마을이었는데, 거기선 고리핵발전소 돔이 너무 잘 보이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거기에 간 게 아니고, 우연히 도착한 곳이 알고 보니 골매마을이었어요. 이 마을에 처음 들어갈 때의 음산했던 기억은 꼭 영광핵발전소를 처음 갔을 때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골매마을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한옥순 할매의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밀양 송전탑에서, 고리 핵발전소로 저의 관점도 이렇게 이어지고 확대가 된 셈이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탈핵 잇다 브런치(https://brunch.co.kr/@wcvictory/7#comments)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장영식, #탈핵잇다, #밀양송전타, #85호크레인,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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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수료생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고, 관련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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