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주짓수
 주짓수
ⓒ 게티이미지뱅크

관련사진보기

 
주짓수를 한 지 1년 반이 됐다. 빳빳하던 도복도 세월과 함께 물러져 부들부들해졌다. 회사 동료 손에 이끌려 도장 문을 열던 지난해 봄. 도장을 가득 채운 시큰한 땀 냄새와 관장님의 뱀 문신에 기겁해 도망치듯 도장을 나온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그랄로 칭칭 감긴 띠를 둘러매고 신입 도원들을 맞이하는 친절한 고인물이 됐다.

안전하기 위해 도장을 찾는 사람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겨하는 내게 주짓수는 아주 매력적인 운동이다. 영업을 한 번 해보자면 일단 새하얀 도복부터 훅킹 요소다. 155cm의 왜소한 체형인 나도 도복을 입으면 듬직해진 것 같은 착시를 준다. 

주짓수는 체급에 상관없이 누구와도 겨룰 수 있는 스포츠다. 물론 마동석 같은 체급과 겨룬다면 이길 가능성은 0에 수렴하겠지만. 실제 주짓수에서 배우는 기술들도 힘을 사용하기보단 자신의 팔다리를 최대한 활용해 상대를 제압한다.

나는 배운 지 6개월이 됐을 때부터 스파링에서 탭 받는 일(상대가 제압당했을 시 기술 중지를 원한다는 표시)이 조금씩 늘었다. 째깐한 체격으로 이룬 장족의 발전이었다.

젊은 층 비중이 높은 만큼 도장 분위기도 활기차다. 스파링할 땐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만 경기를 마치면 누구하나 얼굴 붉히지 않고 수고했다며 손을 맞잡는다. 수업이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시원한 맥주 한 잔 걸치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물론 단점이 없진 않다. 몸과 몸이 부딪치는 운동이라 부상도 잦다. 멍이 대표적이다. 다리는 물론 팔, 어깨, 목 등 여럿 든다. 멍이 예쁘게라도 생기면 모를까. 손가락이 도복자락을 움켜쥐던 부위만 듬성듬성 생긴다.

나는 피부가 연한 편이라 심할 때는 종아리 전체가 검푸른 멍으로 뒤덮힌다. 다른 도원들의 경우 입술이 터지거나 손가락이 골절되기도 한다. 어깨가 탈골돼 2달 간 치료를 받은 이도 있었다.

그래도 장점이 단점을 상쇄하니 운동 권태기가 찾아와도 주짓수 만큼은 포기하지 않는다. 멍은 사라지면 그만이니 말이다. 하면 할수록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해지는 운동, 주짓수. 20대 중반의 나를 성장시킨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요샌 반갑게도 도장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일주일에 한 두명은 뉴페이스로 꼭 등장한다. 예전보다 여성과 청소년들도 많이 늘었다. 그런데 주짓수를 왜 배우냐는 질문을 드리면 다들 대답이 비슷하다. "안전하기 위해서." 즉, 생존하기 위해서다. 

그 대답은 퍽 슬프고 아팠다. 그저 주짓수란 종목을 즐기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이 곳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떤 여성 도원은 신림역 칼부림 사건 이후 호신술을 배우기 위해 도장을 찾았다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 역시 주짓수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 변했다. 이전에는 그저 재밌기에 즐겼다면, 요즘은 내가 주짓수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안도감을 느낀다. 

최근 잇따라 일어난 흉악 범죄 때문만은 아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카페나 식당에 갔을 때도 안도감을 느낀다. 누군가 날 위협하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란 위험한 안도는 아니었다. 죽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방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란 잔인한 기대였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주짓수
 주짓수
ⓒ 게티이미지뱅크

관련사진보기

 
모두가 묻는다. 무엇을 어떻게 더 해야 안전해질 수 있는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는지. 그 답이 없다는 걸 알기에 도장을 찾는다. 간절하게 배우고 곱씹어 기억한다. 

주짓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여느 스포츠가 그렇듯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과거에 제압당할 것 같으면 상대편의 도복을 쉽게 놔버리곤 했던 내게 관장님이 자주 했던 말도 그랬다. "아직 스파링 안 끝났잖아. 끝까지 잡아야지." 

안전도 그렇다. 일상의 안전은 이미 금이 가고 깨지기 시작했다. 등산로, 쇼핑몰, 심지어 길거리에서조차 삶을 위협받는다. 온라인 상에서도 '무정부상태', '각자도생'이란 씁쓸한 단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등 안전은 여느 때보다 불신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상대방의 도복을 꽉 잡고 끝까지 놓지 않는 마음처럼 안전을 되찾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개인들은 호신용품을 챙기거나 호신술을 배우는 등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사각지대 CCTV 구축과 안전 인력을 더욱 배치하는 등 지역별 안전 시스템 구축에 서둘러야 한다. 또, 경찰들이 빠르게 현장 검거할 수 있도록 공권력을 강화하고 가해자들의 처벌 수위를 높여 향후 나타날 잠재적 가해자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

무너진 안전이 하루아침에 예전처럼 돌아갈 순 없겠지만, 허점을 차근차근 메워가다보면 소중한 사람들을 힘 없이 떠나보내는 일은 줄여나갈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누구든 죽지 않고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거리를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퇴근 후 도복 끈을 꽉 동여 맨다. 도장으로 향하는 걸음은 사뭇 진지해진다. 이번주는 신규 도원들에게 먼저 다가가 기술을 알려줄 요량이다. 과거에 내가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스파링 종료를 알리는 알림음이 울릴 때까지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는 걸 알려줘야지.

태그:#주짓수, #안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