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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무주군 무풍면의 소재지인 현내리 북리마을에 '왕의 집'이 있다. '명례궁'이다. 정확하게는 조선시대의 행궁으로 99칸 규모였던 '명례궁' 집터라는 역사적 사실과 안내판이 남아있다. 무풍면 소재지 5일장터인 '대덕산장터' 바로 뒤편이 그 임금의 별궁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무풍성당 무풍공소와 여러 채의 여념집 민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명례궁은 구한말 내부대신을 지냈던 민비의 척신 민병석이 지었다. 무주 무풍이라는 지역이 십승지라는 비결에 따랐다는 것이다. 당시 구한말의 어지러운 난세에서 혹시 모를 피난처로 삼으려고 민비에게 상납했다 한다. 그 탓에 무주의 백성들은 큰 고통과 고초를 겪었다. 민병석이 국가에 대납한 상납의 대가로 몇배의 세금을 더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명례궁은 흔적도 없이 무주의 백성들에게 해체, 점유된 건 아닐까.

민비가 살해된 을미사변, 을사보호조약 등의 여파로 명례궁은 임금이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행궁으로써의 기능을 잃고 민간이 관리하다 외지인들에게 매각되었다. 건물 1채는 김천시 월곡마을로 옮겨 정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부는 영동군의 경찰서 건물로 팔려갔다.

나머지는 무풍면 주민들이 점유해 수십 호의 살림집으로 변했다. 그나마 현재는 명례궁 터에는 안내표지판 말고 아무런 흔적도 없다. 일부 건축 자재들은 영동군 양산파출소, 무주군 청년회 등의 창고에 쌓여있다. 지역주민들은 역사적 명소의 복원을 기대하고 있으나 무주군의 계획은 없다. 
 
왕의 집 - 무주 무풍면 북리마을 고종 별궁 ‘명례궁터’
▲ 명례궁터  왕의 집 - 무주 무풍면 북리마을 고종 별궁 ‘명례궁터’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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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에는 '왕의 집' 뒤, '주민 모두의 집'이

'왕의 집' 명례궁터 바로 뒤에는 '주민 모두의 집'이 있다. '북리(北里)마을자치회관'이다. 건축물의 겉모습이 여느 농촌마을에서 흔히 보는 마을회관 답지 않게 이색적이다. '마을자치회관'이라는 당호부터 범상치 않고, 지붕, 처마, 기둥 등도 마치 궁궐과 고택의 구조처럼 한껏 멋을 부렸다. 아마도 북리마을의 역사적 유산인 명례궁이나 진주하씨의 인물들을 모신 사액서원 백산서원의 외관을 떠올리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마을회관'은 마을 주민들의 집회를 위하여 세워진 공공건물을 뜻한다. 그래서 '마을주민 모두의 집'으로서 마을의 중요한 공유재산이다. 우리 마을에는 이장이나 반장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리 조직을 비롯, 개발위원회, 4H클럽, 부녀회, 노인회, 청년회, 동계 등 많은 조직이 있다. 마을회관은 이들 마을조직들이 각종 논의와 결정, 제반 업무와 사업의 집행과 결산 등을 위한 집회장소로 쓰이는 공간이다. 즉, 마을단위의 작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공론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마을회관'의 정확한 발생 시기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마을회관 이전에는 친족 집단의 공유 재산인 정자나 재실, 개인의 사랑방이나 동구(洞口), 정자나무 밑의 넓은 곳이 마을회관의 기능을 대신했을 것이다. 비로소 마을이 공유하는 집회공간이 마련된 것은 조선시대부터 전라도지방에서 모정(茅亭), 다른 지방의 농청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료된다. 아마도 두레라는 노동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두레기금으로 건립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촌락공동체의 집회 장소로서는 물론 마을주민들의 휴식처의 기능도 중요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행정적인 의미와 목적의 마을회관이 세워진 시기는 일제시대부터 현대의 새마을운동에 이르기까지라 할 수 있다. 마을 행정기관이자 주민 전체의 집회장소로서 다분히 행정적 필요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관의 주도 아래, 행정의 예산지원을 받아 자연마을 단위까지 마을회관이 속속, 촘촘히 건립되었다.

일제시대에는 규모가 큰 마을에 우선적으로 건립되었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행정 단위의 각 리·동별 거의 모든 마을에 마을회관이 건립되었다. 이 시기에 건립된 마을회관은 대부분 마을 입구나 전면에 위치한다. 자치적 집회소로서의 기능과 마을 공동재산의 운영 및 관리 기능, 그리고 마을 행정의 중심으로서 말단 행정적 기능 등을 맡고 있다. 오늘날 농촌마을엔 마을사람이라곤 거의 노인밖에 살아남지 않았으므로 마을회관은 대개 경로당을 겸한다.
 
백성의 집- 무주 북리마을 ‘마을자치회관’
▲ 북리마을자치회관  백성의 집- 무주 북리마을 ‘마을자치회관’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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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양반마을의 집'과 '전라도 농민마을의 집'

경상남도 함양은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로컬브랜딩할만 하다. 그중 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에는 60여채의 고택들이 집적화되어 있다. 그중 '정여창고택'이 대표적이다. 하동 정(鄭)씨 대종가, 정여창 고택, 일두고택으로 불린다.

일두 정여창은 조선조 5현이자 동국 18현으로 불리는 성리학의 대가이다.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죽임을 당했다. 갑자사화로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종가에서 16대째 전승되고 있는 전통 가양주 '솔송주'로도 유명하다.

현재의 정여창 고택은 1570년 정여창 생가터에 신축한 이후 후손들이 여러 번 중건한 것이다. 솟을대문 앞에 놓인 하마비는 집주인의 명망의 크기와 무게를 알려준다. 집의 정문격인 정려문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안채로 가는 일각문이, 오른편으로 넓은 사랑채가 보인다. 대문채는 쪽마루를 두어 좌우 두 칸씩 네 칸의 방을 꾸미고 왼쪽 끝에 사랑 측간을 만들어놓았다.

이 고택의 구조물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사랑채 앞에 놓인 자연석이다. 산, 바위, 물, 나무 등을 자연처럼 조형한 석가산이다. 풍수적인 비보로 쌓는 조산과 달리 규모가 훨씬 작고 관념적이다. 동양 전통의 신선 사상을 나타낸 조형물로서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석가산은 중국 송나라에서 기원하며 백제가 전수한 일본에서는 정원의 골격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정여창 고택은 안채와 아래채, 사랑채와 곳간채 등 독립된 채들로 구성, 폐쇄된 ㅁ자형의 모습을 띤다. 특징적인 점은 10칸이나 되는 곳간채, 채 또는 담장으로 분할된 8개의 독립적인 영역 등이다. 그 집의 구조와 규모로 하동정씨 종가의 권력과 경제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건축 전문가들은 조선 중기 사대부 살림집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평가하는데, 드라마 〈토지〉의 최참판댁의 촬영장소로 쓰였을 정도다.

한편, 전북 정읍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가면 대표적인 '농민의 집'을 살펴볼 수 있다. 엄밀히 따지면 집주인이 농민은 아니었으므로, 농민의 집이라기보다 농촌의 가옥, '농가'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정읍 전봉준 유적(井邑 全琫準 遺蹟)'이라는 안내판을 따라가면 된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이 동학혁명을 일으킬 당시 살았던 집이다. 1980년대초 복원해 대한민국 사적 제293호로 지정되었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의 살림집인 이곳은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전봉준이 갑오년 1894년 1월에 봉기한 후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전봉준의 집은 물론 동학교인의 집은 모두 불질러 버렸다.

앞면 4칸에 옆면 1칸을 덧붙인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된 남향집이다. 남부지역 일반적인 민가구조와 달리 동쪽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 순서의 일(一)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당시 가난한 농민들의 전형적인 농가형태를 관찰할 수 있다.
 
양반의 집 - 함양 개평마을 ‘정여창고택’
▲ 정여창고택  양반의 집 - 함양 개평마을 ‘정여창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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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와 신분과 재료에 따르는 '조선의 집'

한국의 주택, 즉 '마을을 이루는, 사람이 사는 집'은 원시시대의 움집과 귀틀집, 고상식주거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시대 이후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는 규제를 받았다. 권력자 등 상류주택은 기와집, 서민주택은 초가로 구별되는 주택문화가 이때부터 고착됐다. 서민주택, 즉 민가(民家)라는 말은 특정한 전문 건축가의 작업이라기 보다, 그저 마을의 목수들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생활기술로 지은 일반백성들의 집을 통칭하는 것이다.

우리 전통가옥의 건축적 특징은, 목조건축물에 온돌과 마루를 결합한 형태구조를 들 수 있다. 또 풍수지리설을 기초로 한 자연친화적 집터를 선정했다는 점이다. 건축재료, 주택형식 등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획기적으로 변화, 연립주택과 아파트 등 집합주택이 이때부터 등장했다. 재료도 나무에서 시멘트와 벽돌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 전통가옥은 서양식이나 일본식과 구별되도록 한옥(韓屋)으로 불렸다.

무엇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집터 위에 집을 앉히는 배치계획은 풍수지리에 입각했다. 이른바 풍수지리의 양택론에서는 집을 앉히는 좌향(坐向), 집이 향하는 방위로써 향이 생긴다. 이같은 배치와 평면에 영향을 준 것은 기후적인 원인과 영향때문으로 볼 수 있다. 춥고 긴 겨울을 지낼 안방 등 온돌방, 더운 여름을 견딜 마루방과 대청, 그리고 부엌 등의 결합방식에 따라 민가의 평면형태가 지역별로 분류되었다. 함경도지방형, 평안도지방형, 중부지방형, 서울지방형, 남부지방형, 그리고 제주도형으로 크게 나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주택의 배치와 평면에 있어 그 규모는 신분제도에 따라 규제, 대군(大君) 60칸부터 서민 10칸까지 차등을 두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주택의 배치 및 평면 등 구조는 정치, 신분, 경제, 민간신앙, 기후 등 다양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 결정되었다. 이에따라 민도리집양식은 농촌주택과 서울의 서민주택, 중인과 이교의 주택, 양반집 등에 널리 쓰였고, 익공식은 양반집, 특히 지방에 건축된 양반집에 주로 쓰였다.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본 거류민의 수적 증가와 서양인의 거주로 일본식 주택과 양식주택들이 다수 건축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양식주택은 1884년 인천에 건립된 세창양행의 사택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에 의하여 건축된 일본식(和式) 주택도 급증, 1921년 중 건축된 일본식 집이 875동에 이르렀다고 한다.

해방 후, 보건사회부가 주최한 전국주택현상설계공모에서 농촌주택설계(농촌형 자조주택)는 가족 6인, 대지 100평, 건평 9평, 논 1,000평, 밭 600평, 소 1두, 돼지 2마리, 닭 10마리, 변소는 옥외에 설치하되 주건물 9평에 포함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요구했다.

이처럼 우리 농촌의 전통적인 농가주택 종류는, 지붕재료와 형태에 따라 기와집, 초가집, 굴참나무의 굵은 껍질로 지붕을 얹은 굴피집, 200년 이상 자란 붉은 소나무 토막을 길이로 세워 놓고 쐐기를 박아 쳐서 잘라낸 널쪽으로 지붕을 이는 너와집, 억새로 지붕을 이은 투막(우데기)집, 들이나 산에서 나는 억새풀인 새풀을 엮은 샛집 또는 갈집, 지붕 용마루의 양쪽에 공기의 유통을 위하여 구멍을 낸 까치구멍집 등이 있다.

벽체 종류에 따라서는, 판과 판 사이에 흙을 넣에 단단하게 다지거나, 판대기 양쪽에 흙을 쌓는 토담집, 둥굴이 나무를 가로 세로 우물 정자 모양으로 쌓아 올리는 귀틀집 등이 있다. 최근에는 가축용 사료로 쓰기 위해 직육면체로 짚단을 압축해 묶어 놓은, 볏짚, 밀짚, 보리짚 등 짚(straw)으로 성형한 스트로베일로 벽체를 쌓는 생태건축방식도 등장했다.

마을은 주로 시골에서 사람이 사는 집들이 모인 곳을 뜻한다. 시대와 지역과 규모와 형태를 불문하고, 왕이나 대통령도, 양반이나 고위관료도, 농민이나 재벌도, 그리고 백성이나 일반시민들도 매한가지로 '집에 사는 사람'이기는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누구나 다. 그저 마을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농민의 집 - 정읍 조소마을 ‘전봉준장군 고택(유적)’
▲ 전봉준고택  농민의 집 - 정읍 조소마을 ‘전봉준장군 고택(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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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마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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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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