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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는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서 많은 참가자들의 '애국충정'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는 노래가 있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로 시작하는 <충성가>라는 곡인데, <충정가>나 <양양가>라는 다른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 노래는 박근혜 정권에서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육군참모총장 출신 남재준이 즐겨 부른 곡이라 해서 또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2013년 12월, '독립군가로 시작, 애국가로 끝낸 국정원 송년회'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 내용을 보면 "인생에 목숨은 초로(草露)와 같고/이씨조선 오백년 양양하도다/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아아 이슬같이 기꺼이 죽으리이다"라는 가사를 전하며 남재준 당시 국가정보원장이 '국정원 간부들과 송년회를 하면서 이 노래를 다함께 여러 차례 불렀다'고 밝혔다. 이어 '이 노래가 남 원장의 대표적 애창곡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정원 간부들도 따라서 즐겨 부르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라는 대목도 눈에 띈다.

많은 이들이 군가로 알고 있고 전 육참총장의 애창곡이라고 하니, <충성가>가 언뜻 의미 있는 군가처럼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충성가>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부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의미 있는 곡이기는 하되, <충성가>의 그 의미는 사실 매우 부정적인 것이었다.

1950년 12월 27일에 발표된 육군본부 훈령 제142호에 의하면, <충성가>는 대표적인 '저속 군가'였다. 전쟁 중인 군의 사기를 드높이기는커녕 도리어 저하시킬 가능성이 짙으므로, 군가로 인정하지 않고 가창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훈령에 앞서 12월 15일에 국방부장관 신성모가 육·해·공군 총참모장에게 보낸 문건에서도 같은 내용이 확인된다.
 
<충성가> 관련 내용이 수록된 <정훈주보> 1950년 12월 22일자.
 <충성가> 관련 내용이 수록된 <정훈주보> 1950년 12월 22일자.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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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군내 금지곡이 수십 년 세월을 보낸 뒤 육참총장의 애창곡으로 둔갑한 셈이니, 역사라는 것이 참으로 얄궂기는 하다. 원칙에 더없이 충실한 군인이었다는 남재준은 <충성가>의 정체를 정말 몰랐던 것일까, 알면서도 굳이 불렀던 것일까.

<충성가>가 1950년 전쟁 발발 당시에 많이 불리다가 금지곡이 되었다는 사실은 자료를 통해 충분히 확인되지만, 그밖에는 이 노래에 관해 정확히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때문에 <충성가>에 관한 다양한 가짜 정보가 지금도 아무런 근거 없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몇 가지만 점검을 해 보도록 하자.

우선 금지 사유가 된 <충성가>의 1950년 당시 가사는 훈령 제142호를 통해 알 수 있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고구려 3천 년 화화(華華)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인생의 목숨은 촛불과 같고/ 이씨 조선 5백 년 화화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요즘 불리는 가사와는 다소 다른 부분이 있지만, 전체 골격은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사실 악보나 음반 같은 매체로 기록되지 않고 구전 중심으로 유통이 되면 어떤 노래든 가사 변이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문제는 <충성가>의 이런 가사와 곡조가 당초 누구의 작품이었는지, 어디서 유래했는지 등을 알 수 없다 보니, 많은 가짜 정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원래 대한제국 시절 군가였던 <충성가>가 대한민국 군가로도 수용되었다는 주장이다. 주장만 있을 뿐, 구체적인 근거는 당연히 아무것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대한제국 때에도 군가가 물론 있기는 했으나, 당시 상황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충성가> 같은 곡은 절대 그 무렵 노래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공식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뀌었는데 군가에서 그대로 '조선' 운운한다는 것이 이상하다. 게다가 '우리 조선'이나 '대조선'도 아닌, 객체로 평가절하해 부르는 '이씨 조선'이 등장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독립신문> 1898년 11월 1일자에 실린 대한제국 군가 한 대목 "우리나라 독립자주 오백년래 처음일세" 같은 표현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신작 군가를 소개하는 <독립신문> 1898년 11월 1일자 기사.
 신작 군가를 소개하는 <독립신문> 1898년 11월 1일자 기사.
ⓒ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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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충성가> 선율은 도저히 대한제국 시절에 불렸다고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미'로 시작해서 '라'로 끝나는 '라-시-도-미' 중심이고, '미'에서 '라'로 올라가거나 '라'에서 '미'로 내려올 때 '파'와 '솔'이 잠시 등장하는 선율이다. 1930~40년대 일본 유행가나 군가에서 많이 사용된 독특한 '라-시-도-미-파' 단조 음계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으므로, <충성가> 곡조는 아무리 올려 잡아도 1920년대 이전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작곡가 금수현이 해방 직후에 만든 음악극 <을불의 고생> 중 한 곡이 <충성가>의 원작이라고도 한다. 을불이 고구려 미천왕의 이름이고, 훈령에서 언급한 <충성가> 가사에도 고구려가 보이므로, 개연성은 나름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을불의 고생> 대본이나 악보 등 관련 자료가 공개된 바 없으므로, 이 또한 아직은 근거 없는 주장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대한제국에서 한 술 더 떠, <충성가>를 조선 후기 12가사와 연결시키는 황당한 주장도 있다. <충성가>의 또 다른 제목 <양양가>와 12가사 중 하나인 <양양가(襄陽歌)>를 혼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일이 따지기도 민망한 특급 가짜 정보이다.

가사 <양양가>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이백의 시에 가락을 붙여 만들어진 곡이며, 잠깐만 들어 보아도 1950년에 군인들이 불렀을 가능성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충성가>의 '이씨 조선 500년 화화하도다' 대목이 '조국의 앞날은 양양하도다'로도 불렸고 그에 따라 붙여진 또 다른 제목이 <양양가>인데, '양양하도다'의 양양은 襄陽이 아니라 洋洋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구분하지 못해 <충성가>를 가사 <양양가>와 관련 있다고 했으니, '베니스의 상인'이 '고추 장수'로 바뀌었다는 수십 년 전 우스개에 필적할 만한 기발한 발상이다.

그밖에 <충성가>의 긍정적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독립군 군가와 연결시키는 주장도 있으나, 여기에도 아직은 아무런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선에서 정리를 하자면, 1920~40년대에 일본 유행가나 군가 선율을 참고해 단계적으로 다듬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1940년대 말에 <충성가>라는 제목으로 널리 불렸고, 1950년 12월에 공식적으로 금지가 되었다는 정도이다. 물론 금수현 자료가 공개된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

군복무 경험이 있는 이들은 알겠지만, 군대에 국방부 공식 인정 군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충성가>처럼 금지된 노래도 비공식 군가로 존재할 수 있고, 취향에 맞는다면 사사로이 듣거나 부르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노래를 정치적인 의도로 이용하고자 아무 근거도 없는 설들을 만들어내고 유포시킨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일 수밖에 없다. 역사 왜곡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본인도 인정한 백선엽의 친일 행적을 장관이 나서서 지워 주는 세상이고 보면, 또 모를 일이긴 하다. 한때의 '저속 군가' <충성가>가 만고의 절창으로 공식 추앙을 받게 될지도.

태그:#충성가, #양양가, #저속 군가, #금지곡, #남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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