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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해를 따라 내려가는 버스 여행은 계속되었습니다. 차낙칼레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렸습니다. 버스는 베르가마 터미널에 도착합니다. 나름 큰 유적이 남아 있는 도시라 내리는 사람이 조금은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은 저 혼자입니다. 버스 터미널도 직원 한 명을 제외하곤 텅 비어 있습니다.

그 뒤로 방문한 도시들은 많이들 그랬습니다. 베르가마에 이어서 저는 이즈미르와 셀축을 방문했습니다. 이즈미르는 큰 도시였지만, 베르가마와 셀축은 도시보다는 마을에 가까운 규모였습니다.

일정을 줄이면서 그래도 이름이 익숙한 도시들만을 남겼습니다. 그랬는데도 생각보다 여행자를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넓은 도미토리 방을 이틀 밤 동안 혼자 쓴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성수기가 아니니 그렇겠지만, 동네에 보이는 유일한 외국인 여행자가 되는 기분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베르가마의 골목
 베르가마의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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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방문한 도시들은 고대에는 그리스 문화권에 속했던 도시들입니다. 당시에는 에게 해 인근의 이 지역을 소아시아(Asia Minor)라고 불렀습니다. 덕분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지명을 많이 찾아볼 수 있죠. 이 일대는 기독교의 초기 전파지이기도 해서, 신약성경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곳입니다.

베르가마의 옛 이름은 페르가몬(Pergamon)입니다. 기원전 2세기경에는 소아시아 전역에 영향력을 끼친 패권국가였죠. 문화와 학문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양피지를 뜻하는 영단어 'Parchment'의 어원이 바로 이 '페르가몬'이라는 도시의 이름입니다.

특히 페르가몬에서는 의학이 발달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이후 최고의 의학자로 불리는 갈레노스가 페르가몬 출신의 의사였죠. 갈레노스는 최초로 정맥과 동맥을 구분하고, 판막의 존재를 밝혀낸 의학자였습니다. 갈레노스의 의학은 16세기 르네상스 시대가 오기 전까지, 1400여년 동안 서양 의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즈미르 역시 과거에는 '스미르나(Smyrna)'라는 이름의 도시였죠. 항구 도시로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이즈미르는 19세기까지도 그리스계가 도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그리스계의 영향력이 짙었던 도시입니다.

셀축에는 에페스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한때는 소아시아 해운업의 중심으로 알려졌던 도시죠.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도 중요한 도시입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도 요한이 바로 이곳에서 사망했습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의 '에베소'가 바로 이 에페스입니다.
 
에페스 유적
 에페스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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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깊은 소아시아의 도시들을 며칠 동안 돌아다녔습니다. 덕분에 폐허가 된 그리스와 로마의 유적을 수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에게 해 인근 소아시아는 이제 튀르키예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인의 유적이 남아 있지만, 그리스인은 이제 남아있지 않죠.

튀르크인이 처음으로 이 땅에 들어온 것인 11세기 무렵의 일입니다. 셀주크 튀르크 제국이 세워지고, 이후 룸 술탄국이 뒤를 이으면서 아나톨리아의 튀르크화가 이루어졌죠. 하지만 당시에도 지배 계급이 튀르크인이었을 뿐, 많은 그리스계 인구가 여전히 소아시아와 아나톨리아에 다수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를 넘어 발칸 반도까지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제국이었습니다. 제국의 땅 안에서 그리스계 인구와 튀르크계 인구는 각자의 공동체를 이루고 섞여 살았습니다. 튀르키예 땅에서 지금처럼 그리스계 인구가 줄어든 것은 근대에 들어온 뒤의 일입니다.
 
이즈미르의 유적 앞에서는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즈미르의 유적 앞에서는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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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은 멸망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됩니다.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죠. 그리스는 1차대전에서는 오스만 제국과 싸웠고,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는 튀르키예 공화국과 싸웠습니다. 점령지에서 상대방 민족을 향한 학살도 벌어졌습니다.

결국 1923년, 로잔 조약에서 그리스 왕국과 튀르키예 공화국 사이 인구 교환이 합의됩니다. 그리스 땅에 살고 있는 무슬림을 모두 튀르키예로 보내고, 튀르키예 땅에 살고 있는 기독교도는 모두 그리스로 보낸다는 협정이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120만여 명이 튀르키예에서 그리스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서 튀르키예로도 40만여 명이 추방되었죠. 하루아침에 고향을 떠나 이주한 이들의 생활이 순탄했을 리 없습니다.

재산도 제대로 처분하지 못하고 몰수당한 경우도 있었죠. 추방은 철저히 종교만을 기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그리스어를 모르는 기독교도나, 튀르키예어를 모르는 무슬림의 상황은 더 어려웠을 수밖에 없습니다.
 
페르가몬 아스클레피온 유적
 페르가몬 아스클레피온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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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이제 그리스인의 흔적은 유적으로만 남았습니다. 거대한 기둥은 쓰러져 풀밭에 묻혔고, 벽돌 몇 장만이 겨우 쌓여 도시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천장이 무너진 지하 도시의 물길에는 여전히 얇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꼭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국가가 어디 있을까요.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런 방식이지요. 하지만 수백만의 인구가 국경을 넘어 이주해야 했던 경험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와 폭력의 기억으로 남았을 것도 분명합니다.

도시는 남았지만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이 도시를 만든 사람은 국경을 넘어 갔고, 땅만은 이 자리에 남았습니다. 소와 말을 방목하고 있는 들판을 걸으면 거짓말처럼 폐허가 된 유적이 나타납니다. 들판 한복판에 관광객은 모여 있지만, 풍경의 쓸쓸함은 지울 수 없습니다.
 
에페스 유적 위에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에페스 유적 위에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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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도시도 언젠가 이런 흔적으로만 남을 날이 올까요. 사람은 모두 떠나고, 콘크리트와 벽돌만이 역사를 품고 땅 속에 묻힐 날이 올까요.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사람들의 새로운 문명이 세워질 날이 올까요. 어느 쪽이라도 좋습니다. 다만 저는 가끔, 이 땅을 남기고 떠나간 사람들을 상상할 뿐입니다. 벽돌 위에 비치는 햇빛이 쓸쓸하게 남는 오후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튀르키예, #터키, #페르가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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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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