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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관고택의 꽃담이 조선후기에 지어진 옛집 살림집 꽃담이라면 정읍 영모재 꽃담은 일제강점기에 중수된 근대기 가옥의 꽃담이다. 꽃담의 연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옛집 살림집에서 보이는 조심스럽고 겸손함은 없다. 한층 대담해지고 과장되어 있다. 비록 근대기 가옥이라도 영모재 꽃담이라 하기에는 '촌스럽게' 화려하다. 무슨 사연이 있는 듯싶다.
  
붉은 벽돌로 괘 문양을 연출한 뒤 6개의 쌍희자를 박아놓았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조성된 꽃담임을 감안해도 대담하다.
▲ 영모재 대문과 꽃담 붉은 벽돌로 괘 문양을 연출한 뒤 6개의 쌍희자를 박아놓았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조성된 꽃담임을 감안해도 대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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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재가 있는 진산마을에 들어서자 음악소리가 흐른다. 너무나 고요한 나머지 봄꽃 터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인데 시골마을에 음악소리라니 생소하다. 영모재 담을 넘어 들리는 바이올린 소리다. 서둘러 대문에 들어서자 영모재 뜰에서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무용가가 보였다. 영모재에 음악과 춤이라, 이때까지 그 사연에 대한 실마리가 될 줄 몰랐다.
  
꽃담을 배경으로 뜰에서 무용가가 춤을 추고 있다. 일반 영모재라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곳은 풍류방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최근 예인들의 방문이 많아지고 있다.
▲ 꽃담과 무용가 꽃담을 배경으로 뜰에서 무용가가 춤을 추고 있다. 일반 영모재라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곳은 풍류방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최근 예인들의 방문이 많아지고 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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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풍류방의 모태, 영모재

정읍 진산동 영모재는 본래 죽산안씨 재실(齋室,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로 건립되었으나 1885년경 광산김씨 김평창(본명 김상태, 1853-1928)이 매입하였다. 김평창은 영모재를 매수한 때부터 재실보다는 풍류방(조선후기 가객(歌客)과 율객(律客)들이 모여서 풍류활동은 전개하던 곳)으로 활용하고 1915년에 대대적인 증개축을 하였다.

김평창의 아버지 김덕흥(1817-1902)이 어머니 현풍곽씨가 사망하자 장지로 여러 곳을 물색하던 중 현 영모재 위쪽 산중턱에 묏자리를 발견하고 영모재를 매수했다 한다. 아버지 덕홍의 향리직을 이어받고 오랫동안 정읍현 향리를 거쳐 전라감영 아전으로 활동하던 김평창이 부를 축적하면서 영모재를 매수한 후 풍류방을 개소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평창은 의식음악을 관장한 정읍현의 호장 출신으로 평소에 판소리나 춤과 같은 기예에 매우 익숙한 국악 애호가였다. 돈과 학식, 실기능력을 고루 갖춘 김평창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지역에 유행하던 풍류방을 모델로 1885년 영모재를 매입하여 풍류방을 연 것이다.

풍류방으로서 영모재는 정읍의 중인과 악기를 연주하는 율객, 가객, 무객, 기생들이 모여 춤과 노래, 그림, 글씨, 시문 등을 향유하는 복합 풍류 공간이었다. 조선말 정읍 예기조합소속 기생들과 일제강점기 정읍권번 소속의 기생들의 기예능(技藝能)을 심사하는 장소였으며 그들의 기예를 연마하는 곳이었다. 요즈음으로 치면 연예기획사 역할을 하였다.

영모재 본채도 이에 맞게 증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재사(齋舍)에서 거주 공간으로 변용된 것이다. 영모재 방은 김평창이 기거하고 그가 지도하던 기녀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제자와 기녀들의 수업 성취도를 평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대청마루는 기생들이 창과 악기 등의 기예를 배우고 연습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장대석 석축과 기단 위에 영모재가 사뿐히 앉아 있다. 풍류를 즐길 수 있게  대청마루와 마당, 뜰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 영모재 정경 장대석 석축과 기단 위에 영모재가 사뿐히 앉아 있다. 풍류를 즐길 수 있게 대청마루와 마당, 뜰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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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방에서 풍류가 벌어질 때면 허기진 동네사람들이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음식을 배불리 얻어먹었다 한다. 김평창은 잔치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을 마당에 모이게 하고 마루에서 엽전을 뿌려 엽전을 줍게 하고 줍지 않거나 적게 주우면 호통을 치며 엽전을 빼앗아 많이 주운 사람에게 나누어주며 부지런해야 잘 산다고 했다 한다.

이 구전이 참말인지 몰라도, 지금도 타지방 사람들의 상여가 동네에 들어올 때면 엄청난 반발을 살 정도인데, 본래 죽산안씨 집성촌인 진산마을에 타성바지(자기와 다른 성을 가진 사람)가 들어와 죽산안씨 재실을 매수했으니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을 것이다.

마을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1980년 초반까지 정읍기생들이 소리와 춤, 기악을 연주하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한다. 풍류방으로서의 영모재는 격동의 시대를 함께한 호남 초기의 풍류방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최근 이곳을 찾는 예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김춘희교수가 삼짇날 행사를 대비하는 시연을 하고 있다.
▲ 영모재를 방문한 김춘희교수 김춘희교수가 삼짇날 행사를 대비하는 시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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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영모재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무용가를 만났다. 한국무용가로서 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 정읍지부장인 김춘희 교수였다. 4월 22일, 삼짇날을 맞아 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 정읍지부의 발대식을 이곳에서 갖는데 가야금 선율에 맞춰 흥을 돋우는 북춤과 봄 향기 나는 춤, 평양검무의 시연이 있다고 했다.

영모재에 새긴 김평창의 꿈

문화재청이나 정읍시의 공식적인 설명에 영모재가 풍류방이라는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밖으로 알리지는 않았지만 영모재가 풍류방이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는 없다. 오히려 김평창이 애초 풍류방을 개소할 목적으로 영모재를 매수하지 않았나 의심해볼 정도다.

실제로 영모재에서 한 번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게 후손들의 증언이다. 영모재 이름도 단 한번 바꾸지 않았다. 동학혁명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정략적으로 눈속임'을 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재실이라는 이유로 동학혁명 때 해를 입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풍류방의 흔적은 영모재의 주련과 편액, 솟을대문과 본채 벽면의 민화와 시어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김평창은 19세기말 전국에서 유행처럼 번진 중인계층의 길상적 염원과 자신의 풍류적 삶에 대한 즐거움을 풍류방 곳곳에 새겨 놓았다. 기둥과 보가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면과 벽체, 지붕의 합각까지 가만히 놔두지 않고 빼곡히 채워나갔다. 여백의 미는 없다.
  
영모재는 민화 갤러리다. 기둥과 보로 만들어진 벽면에 민화들이 가득하다.
▲ 영모재 대문의 민화 영모재는 민화 갤러리다. 기둥과 보로 만들어진 벽면에 민화들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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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가를 이상향으로 삼은 사대부들이 집안에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그려내듯 돈 많고 기예가 충만하며 향토사회에서의 네트워크까지 완벽하게 갖춘 중인 출신의 김평창은 풍류방 영모재에 중인 출신의 헛헛한 마음을 달래며 자신의 이상을 심어 나아갔다.

영모재 솟을대문 공포와 보, 벽면에 온갖 민화와 문양을 그려 장식했다. 고건축 대문에는 장식을 하지 않는 일반상식을 깬 것이다. 우선 솟을대문 앞쪽 양 기둥 공포 안에 그려진 불사약을 찧고 있는 옥토끼 그림은 풍류방 영모재가 영원히 지켜져 영생불사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이 그림은 토끼와 관련된 불교설화에서 기원한 것이다.

대문 좌우와 위쪽 벽면에는 다양한 내용의 민화와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정병모교수는 '민화가 유행하던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데 당대에 유행하던 벽화를 한자리에서 다 볼 수 있어 집 벽면 자체가 현시대의 갤러리를 연상케 한다'고 했다.
  
사군자 그림은 대문과 본채에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은 대문에 그려진 난초그림이다. 산뜻한 색감으로 오는 이를 홀린다.
▲ 영모재 대문의 민화 사군자 그림은 대문과 본채에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은 대문에 그려진 난초그림이다. 산뜻한 색감으로 오는 이를 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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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唐獅子)와 까치호랑이, 학과 표범은 벽사를 담당하고 두 마리의 학을 타고 피리를 불며 하늘을 나는 남녀신선은 신선계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액자틀마냥 뽀얀 면마다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사군자와 초화(草花)는 장식미와 길상의 의미가 있고 암수 현무와 청룡과 황룡, 암수 해태와 잉어는 음양조화와 함께 장생불사를 기원한다.

길흉화복의 통로로 여기고 있는 대문에 종교와 사상, 이념을 초월하여 벽사와 염원이 듬뿍 담겨있다. 대문채뿐만 아니라 본채 벽면에도 사군자와 연꽃, 쌍희자(囍)를 포함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문양과 그림이 그려져 있다.
 
본채 서쪽벽면에 그려진 연꽃, 쌍희글자(囍) 그림이다. 영모재는 청정한 세계요, 기쁨이 가득한 공간임을 알린다.
▲ 영모재 본채 그림  본채 서쪽벽면에 그려진 연꽃, 쌍희글자(囍) 그림이다. 영모재는 청정한 세계요, 기쁨이 가득한 공간임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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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재가 영원하기를 기원하며 정성을 다해 꾸며 놓은 건물은 영모재 본채다. 육중한 장대석 기단 위에 서 있는 영모재는 활짝 날개를 펴 날아갈 듯한데 그 품새가 육중하면서 가볍다. 둔해보이지만 날렵해 보이는 것은 네 군데 지붕처마를 살짝 치켜세운 활주 덕분이다.

활주초석 팔각 면에 주역의 팔괘문양을 새겼고 초석 위에 팔각 장초석을 세웠다. 장초석 끄트머리 화반부분에 상서로운 꽃모양을 양각해 놓고 활주의 나무기둥 맨 꼭대기에는 화사한 연분홍 연꽃을 조각해 장식했다.
  
팔각초석은 팔괘가 음각되어 있고 그 위에 세워진 장초석 상단 부분은 꽃잎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 활주초석 팔각초석은 팔괘가 음각되어 있고 그 위에 세워진 장초석 상단 부분은 꽃잎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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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은 팔괘와 꽃잎, 연꽃이 수놓아진 기둥이 마치 우주를 떠받치고 있듯 이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을 떠받들고 있다는 것을 내비친 것이다. 동시에 자신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 존귀한 존재가 된다고 믿는다.

기쁨 두 배, 쌍희자 화방벽 꽃담

대문채 정면을 붉게 물들인 화방벽 꽃담은 집주인의 이상과 이념, 염원을 바깥세상에 알리고 있다. 자료사진으로 1970년대에도 꽃담의 존재를 확인하였으나 정확히 언제 꽃담이 조성되었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백 없이 빼곡하게 꾸며진 영모재를 감안하면 누구의 미적 심성에서 나왔든 화방벽을 꽃담으로 꽉 채우려는 미적 발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집이 지어진 시기와 성격에 따라 각각 어울리는 꽃담이 존재한다. 풍류방으로서 영모재에 어울리게 촌스러운 정도로 화려하다.
▲ 대문채 화방벽 꽃담 집이 지어진 시기와 성격에 따라 각각 어울리는 꽃담이 존재한다. 풍류방으로서 영모재에 어울리게 촌스러운 정도로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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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쌓기로 꽃담을 구현해 놓았는데 그 장면이 감동적이다. 벽돌을 세로로 가로로 번갈아 쌓아 괘(卦) 모양을 연출한 점은 영모재 활주의 팔괘와 궤를 같이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벽돌쌓기에 대해 경탄하며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벽돌 쌓는 법은 한번은 세로로 한번은 가로로 배열하여 마치 주역의 감괘(坎卦 ☵)와 이괘(離卦 ☲)모양을 저절로 이루고 그 사이 간격은 석회를 종이처럼 얇게 하여 겨우 붙을 정도로만 때워서 봉합한 흔적이 실처럼 얇다."

이와 같은 내용이 <임원경제지>에도 나온다. "한번은 세로로 쌓고 한번은 가로로 쌓으므로 저절로 감리(坎離)의 괘 모양을 이룬다. 점선형태의 문양이 가로세로로 어긋나게 차곡차곡 쌓은 모습으로 감(☵)과 리(☲)의 문양을 나타낸다"고 했다.

<임원경제지>의 저자 서유구는 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북학파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가장 많이 인용했다고 하는데 <열하일기> 중 벽돌쌓기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았나 싶다.
  
벽돌을 가로와 세로로 번갈아 쌓아 괘 모양을 연출하였다.
▲ 대문채 꽃담 세부 벽돌을 가로와 세로로 번갈아 쌓아 괘 모양을 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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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로 가로세로 번갈아 쌓고 면회하여 하얀색 바탕에 붉은 색이 돋보이게 했다. 이곳은 풍류방이라 선언하듯 솟을대문 좌우에 각각 세 개의 큼지막한 쌍희자를 6개나 박아놓았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쌓은 꽃담이라 옛집에서 보이는 겸손함은 없다. 과장되고 대담하여 촌스러운 정도로 화려하다. 촌스럽게 보여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게다.

쌍희무늬는 대문채 화방벽에 이어 대문 안 벽면과 영모재 벽체에도 새겼다. 대문 밖에서 대문을 거쳐 영모재에 이르는 동선에 모두 쌍희를 넣어 이 공간은 기쁨으로 가득한 공간임을 세상에 밝히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정읍 풍류방과 정읍 진산동 영모재에 관련한 내용은 <정읍 지역 풍류방 연구 : 정읍진산동영모재를 중심으로(전북대학교석사학위 논문, 이용찬, 2016>과 <정읍 진산동 영모재 기록화보고서(문화재청, 2012)>를 참고하였습니다.


태그:#정읍진산동영모재꽃담, #영모재 꽃담, #풍류방, #풍류방 꽃담, #정읍 진산동 영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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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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