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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년 동안 같은 공간에서 지냈지만 차분하고 조용한 수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못했다. 떠올리면 교정이 어려운 저시력으로 인해 쉬는 시간에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작은 렌즈를 들고 노트에 이마를 대듯 엎드린 자세로 수업 시간에 마치지 못한 필기를 하던 모습이 남아 있다.

당시 어느 정도의 선행학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입학한 고교 생활에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공부 의욕을 완전히 잃었던 나는 그런 그녀를 '쉬는 시간에도 공부하는 친구'로 여기며 조금은 멀게 느꼈던 것 같다. 

수희를 다시 만난 건 2006년께 성남의 한 중학교에서 국악관현악단 지도교사를 맡아 실기 강사를 구할 무렵이었다. 친한 동기 동창을 통해 마침 같은 지역에서 거문고 실기 강사로 활동하고 있던 수희를 소개받았다. 성인이 돼 조금은 깊어진 시각으로 다시 만난 수희는 생각보다 많은 불편을 스스로 해결하며 지내는 데 익숙해 보였다.

오랜 인연을 통해 그녀의 신체적 어려움을 잘 안다고 믿었던 나조차도 함께 일하다 보면 크고 작은 불편을 짐작하지 못해 자주 미안한 순간이 발생했다. 그럴 때면 수희는 '미안할 거 없어. 누구나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야'라며 되레 나를 다독였다.

반가운 소식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이 경기도 성남시 수내중학교 체육관에서 찾아가는 맞춤형 국악공연을 위해 리허설을 하고 있다.
▲ 공연 전 리허설 중인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모습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이 경기도 성남시 수내중학교 체육관에서 찾아가는 맞춤형 국악공연을 위해 리허설을 하고 있다.
ⓒ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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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가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을 들려줬다.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이라는 단체의 단원으로 활동하게 됐다는 것.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은 시각대신 청각이 남보다 발달한 시각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관직과 녹봉을 주며 궁중 악사로 활약할 수 있게 마련한 세종대왕의 관현맹인 제도에서 유래한다. 일제강점기에 명맥이 끊어졌던 관현맹인 제도가 2011년 3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과 문화체육관광부가 협력한 국가 문화재현 사업의 일환으로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이라는 새 이름으로 재창단 한 것이다.

직장생활에 잘 적응해서 자리 잡은 수희가 몇 년 전 내가 근무하던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해 좋은 공연을 해주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장애이해교육'을 담당한 동료교사에게 그 의사를 전했더니 기쁘게 받아들여 아이들과 교사들 모두 감동하는 뜻깊은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의욕 부진으로 학교생활의 탄력을 잃고 무기력했던 당시 고등학교 1학년 우리 반 한 아이의 소감문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이라 연주의 수준이 높지 않을 줄 알았는데 다양한 국악곡과 퓨전 음악들을 정말 멋지게 연주해 주셨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신체적 어려움 속에서 '도대체 얼마나 노력을 하셨길래 그토록 완성도 높은 공연을 보여준 걸까' 나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해야 할 일을 자주 미루며 게으름을 피운 내가 많이 부끄러웠다. 앞으로 하기 싫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마다 오늘 느낀 감동을 기억하며 꾸준히 노력해야겠다."

얼마 전 현재 근무 중인 수내중학교에서 성남시 목적사업비로 교과 관련 행사비를 지원해준다는 담당 부장의 안내를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시 관현맹인전통예술단에 연락을 해 행사 비용을 문의했다. 

20여 명의 짱짱한 전문 연주자와 스태프 그리고 차량과 음향기기를 동원해 진행하는 행사 비용은 예상보다 저렴했다. '애정하는 단체의 예술가들에게 주는 공연 수당이 너무 박한 건 아닌가' 싶어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단체에 대해 소개해 드리자 취지에 공감하신 교감 선생님의 제안으로 모든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장애인식 개선 교육'을 주제로 한 창의 재량 수업 시간을 활용해 진행하기로 했다.

떼창과 환호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해금 주자가 대중가요 '신호등'을 연주하며 천여 명의 중학생 관객들의 떼창을 이끌고 있다.
▲ 대중가요 "신호등"을 연주하는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해금 주자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해금 주자가 대중가요 '신호등'을 연주하며 천여 명의 중학생 관객들의 떼창을 이끌고 있다.
ⓒ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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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5일, 짧은 동영상을 통한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단체 소개에 이어 전통국악, 창작국악, 대중음악의 국악 버전 연주곡까지 관중의 마음을 세세히 읽은 다채로운 레퍼토리 구성으로 1000여 명의 남여 중학생들의 떼창과 환호 속에서 역시나 즐겁고 감동적인 공연을 보여줬다. 특히 8명의 시각장애인과 5명의 비장애인 단원들이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는 내내 말로 표현하지 못할 깊은 감동이 있었다. 

긴급 협의 회의가 있던 날이라 공연을 마친 후 잠시 수희의 얼굴을 보고자 출연자 대기실 앞에서 기다렸다. 연주자들의 탈의를 마치고 문이 열렸을 때 수희는 자신 보다 더 불편한 단원의 손을 잡고 의상과 악기를 챙기느라 무척 분주해 보였다. 비장애 연주자와 스태프들도 곳곳에서 소리 없이 시력이 거의 없는 단원들의 눈과 손발이 돼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다음 날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소감을 물었다. 

"저는 장애가 없어도 합주를 할 때면 많은 어려움을 느끼는데 눈이 안보이는 분들이 호흡을 맞춰 합주 하려면 굉장히 어려울 것 같아요. 열심히 연주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시각장애인들의 연주에 실수가 없어서 놀라웠고, 장애가 있어도 기회가 있다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평상시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을 뵌 적이 없는데, 그분들이 연주하는 걸 보면서 편견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기 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구분이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장애가 있다고 해서 그렇게 엄청난 도움이 필요한 존재는 아니구나'라고 느꼈어요."

"이렇게 우리 학교까지 오셔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들려주셔서 감사했어요. 또 판소리 하신 분이 직접 선생님의 몸을 만지며 호흡법이나 발림을 배웠다고 하셨는데, 장애가 있다는 걸 알기 어려울 만큼 동작이 자연스러워서 놀랐고 정말 멋져 보였어요."

"제가 후천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된다고 생각해보면 굉장히 무서울 것 같아요. 시각장애인분들도 그런 두려움이 늘 있을 것 같은데 극복하고 계신 것 자체가 존경스러웠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연주를 하실 때 잘 할 뿐 아니라 즐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발표를 희망하는 아이가 많아 꽤 긴 시간 소감을 나눴음에도 모두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감을 듣는 동안 아이들의 세심하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울컥하기도 했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연의 감동을 다시 떠올리니 참 좋네요. 나는 공연 전 비장애 단원이나 스태프들이 장애인 단원들과 미리 동선을 함께 걸어보고 장애물의 위치를 확인해보는 과정을 지켜보며 연주 이상의 감동을 받았어요.

돌아보니 학창시절에 신체적 어려움을 가진 친구와 같은 반인 적이 꽤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 친구와 어떻게 어울리면 좋은지 알지 못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한켠으로 늘 미안한 마음을 품곤 했어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여러분이 어른이 된 세상은 지금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며 어울려 살기 좋은 세상이 되겠구나'하는 환한 기대감이 생겨요."


나도 마지막으로 소감을 전하며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장애 이해, 백 번의 가르침 보다 한 번의 만남이 더 좋다
 
 연주를 마친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소금 주자가 스텝의 손을 잡고 퇴장하고 있다.
▲ 스텝과 함께 퇴장하는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소금 연주자  연주를 마친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소금 주자가 스텝의 손을 잡고 퇴장하고 있다.
ⓒ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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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규모가 크다 보니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여러 동료들의 수고가 발생해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소감을 나눠보니 거룩한 배움에 참여할 기회를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지막 연주곡 전 무대 세팅 시간 확보를 위해 시각장애인, 이현아 단원이 관객들에게 던진 질문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선천적 장애인이 더 많을까요, 후천적 장애인이 더 많을까요?"

1000여 명의 아이들 대다수가 손을 번쩍 들어 아우성치며 흔드는 가운데 중학교 3학년 한 여학생이 기회를 얻어 당차게 답했다.

"후천적 장애인이요!"

이현아 단원은 "네, 후천적 장애인 맞습니다!" 하고 정답을 확인해 줄 뿐 그 어떤 메시지도 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하나의 질문이 주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길든 짧든 누구나 언젠가는 신체적 약자의 자리에 있게 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장애인과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미래의 우리가 사회 속에서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일이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은 군대, 복지시설, 도서산간지역, 요양원 등 사회적·지리적 소외계층을 위해 다양한 문화 향유의 기회를 주기도 하고, 학교, 사업체, 종교 단체 등을 위한 '찾아가는 맞춤형 장애 인식 개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백 번의 가르침보다 한 번의 만남이 더 귀함에 공감한다면 저마다의 자리에서 관현맹인전통예술단과 함께할 기회를 만들어 보자고 각계 각층의 많은 분들께 적극 권유하고 싶다.  

참고) 관현맹인전통예술단 홈페이지 http://oh-gukak.kr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을 환영하는 경기도 성남시 수내중학교의 전자 게시판.
▲ 경기도 성남시 수내중학교를 찾은 관현맹인전통예술단 환영 포스터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을 환영하는 경기도 성남시 수내중학교의 전자 게시판.
ⓒ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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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관현맹인전통예술단, #찾아가는맞춤형국악공연, #장애인식개선, #시각장애, #실로암시각장복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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