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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수언론상 심사위원회 고승우 위원장(민주언론운동연합 전 이사장, 왼쪽 두 번째)과 원희복 심사위원(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 오른쪽 세 번째), 이계환 심사위원(통일뉴스 발행인, 오른쪽 두 번째) 등이 김자동 회장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조용수언론상 심사위원회 고승우 위원장(민주언론운동연합 전 이사장, 왼쪽 두 번째)과 원희복 심사위원(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 오른쪽 세 번째), 이계환 심사위원(통일뉴스 발행인, 오른쪽 두 번째) 등이 김자동 회장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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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여러 달 동안 병환에 계셨지만 막상 별세하심에 가슴 먹먹하다. 백기완 선생·한승헌 변호사에 이어 민족·민주진영의 큰 어른들이 떠나면서 빈 자리가 너무 넓고 깊다. 다시 독거미 발이 스멀거리는 데 홀연히 떠나신 분들의 존재감이 새삼 도드라진다.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겹치는 4차산업혁명기에 미·중의 패권다툼과 남북의 불화가 극심하여 언제 이땅으로 불똥이 튈지 모르는 위중한 시기여서 이 분야에 전문가였던 김자동 선생의 부재는 더욱 가슴 아리게 한다.

선생의 개인사는 한국현대사의 한 축이고, 가족사는 대한제국에서 시작되는 우리 근현대사의 압축이며 독립운동의 정사에 속한다. 〈한겨레〉부고 기사의 제목대로 "파란의 한국사 겪어낸 '임정의 아들이자 마지막 증언자'"였다. 임시정부의 '아들'이라 해서 손색이 없고 후반생의 과제로 삼았던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짓는 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마지막 증언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1936년 여름 김자동 회장의 아버지 김의한이 장시성 우낭현의 쑨원기념 중산도서관 관장으로 일할 때 도서관 앞에서 찍은 사진. 앞줄 왼쪽 넷째가 어머니 정정화, 다음이 아버지 김의한이다. 그 앞 소년이 김자동 회장
▲ 쑨원기념 중산도서관  1936년 여름 김자동 회장의 아버지 김의한이 장시성 우낭현의 쑨원기념 중산도서관 관장으로 일할 때 도서관 앞에서 찍은 사진. 앞줄 왼쪽 넷째가 어머니 정정화, 다음이 아버지 김의한이다. 그 앞 소년이 김자동 회장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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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귀국하여 학업을 마치고 언론계에 투신한 선생은 얄타회담의 특종기사 등으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소속 언론사의 논조와 방향이 정도가 아님을 알고, 4월혁명으로 창간한 진보언론 〈민족일보〉에 입사했다.

5.16쿠데타를 주동한 박정희가 미국에 자신의 좌익전력의 세탁용으로 조용수 사장과 〈민족일보〉를 제물로 삼았다. 통한을 삼키며 언론계를 떠난 후 베트남과 중국의 여러 지역에 방직기계 공장을 세워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선생은 사업가의 길을 접고 역사의 길에 나섰다. 임시정부와 할아버지, 부모님의 못다한 역할, 그리고 조용수 사장과 〈민족일보〉의 누명을 벗기는 작업이었다. 축약하면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민주언론의 정맥을 지키는 일이다. 영·중어에 능했던 터라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금서의 딱지가 붙은 〈한국전쟁의 기원〉, 〈레닌의 회상〉, 〈모택동 전기〉 등을 번역했다. 지식인 사회의 지평을 넓히고자 해서였다. 박해가 심했으나 극복했다. 
 
(충칭<중국>=연합뉴스) 배재만 기자 =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6일 오전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김자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등 독립유공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충칭<중국>=연합뉴스) 배재만 기자 =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6일 오전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김자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등 독립유공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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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사)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창설하여 임정의 정신을 잊고자 분투했다. 이명박근혜정권이 학기(學妓)들을 앞세워 임정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이른바 '이승만의 건국절'을 내세우며 국정교과서 편찬을 감행할 때 학술회의와 집회를 통해 저지에 앞장섰다. 평소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이지만 원칙에는 강직한 모습 그대로였다. 

선생은 2005년부터 독립운동가 후손 및 학생들로 '독립정신답사단'을 결성하여 매년 한 차례씩 중국·일본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해왔다. 필자는 강사진의 일원으로 참가하면서 늙어도 낡지 않고 여전히 생기찬 모습으로 활동하는 선생을 지켜봤다. 특히 산제비도 날지 못한다는 중국 타이항산의 조선의용대(군)의 혈투현장과 윤봉길의사 유해를 방치한 일본 현장에서 묵연히 흐느끼시던 선생의 모습은 두고두고 가슴을 저리게 했다.

〈민족일보〉 영인본을 제작하고 조용수 사장의 명예회복을 이뤄냈으며 〈한겨레〉 창간을 지원하고, 임정의 법통을 지켜낸 열정은 한 시대의 상식인으로 수행한 기여이다. 때마다 시대를 읽어내는 통찰력으로 아무나 하기 어려운 과제를 스스로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온 결실이었다. 

그 정도의 가문·경력 그리고 능력이면 권부에 기웃대거나, 실제로 각종 유혹이 따랐는데도 구지레한 처신 없이 '역사의 길'을 올곧게 걸으셨다. 94년의 생애가 당당하고 떳떳했기에 따르는 후학이 많았고, 힘들었던 과제를 성취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유해 봉환과 서훈문제가 남아 있지만 이는 후학들의 과제가 되었다.

긴 세월 세찬 풍파에도 흔들림 없이 민족·민주·통일의 길목을 지켜오신 김자동 선생, 뜻은 대쪽같이 바르고 학식과 행동이 청정했던 어른, 이제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민족일보〉의 참언론인들을 두루 만나셨을까. 몰상식이 지배했던 혹독한 시대에 비루함을 보이지 않고 올바름이라는 '상식인'의 길을 택하신 생애였다. 평안한 영생을 기원하면서……. (주석 1)
 
평양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 아버지 묘비 앞에 선 김자동 회장 부부. 묘비 앞에 남에서 가져간 어머니 사진이 놓여있다.
 평양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 아버지 묘비 앞에 선 김자동 회장 부부. 묘비 앞에 남에서 가져간 어머니 사진이 놓여있다.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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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각계의 지도적 인사들을 지켜보았다. 더러는 만나기도 하고   조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정세와 시국의 변천에 따라 변신하는 인물, 초심은 괜찮았는데 중도에 굴절되거나, 아예 딴 길을 택한 인사도 적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말한다.

"인간 얼마나 위대한 걸작인가, 이성(理性)은 고귀하고   능력은 무한하고 행동은 천사와 같고 이해는 신과 같다. 세계의 미요 만물의 영장이다."

꽃에 향기가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다.

"인격이란 지(知) 정(情) 의(義)의 세  작용이 하나의 질서 속에 조화 통일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인격은 의식의 횡적 통일인 동시에 또한 종적 통일이다."(안병욱, <행복의 미학>)
 
아버지 김의한 선생, 어머니 정정화 여사와 김자동
 아버지 김의한 선생, 어머니 정정화 여사와 김자동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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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해방→분단→전쟁→백색독재→4.19혁명→군사독재→산업화→민주화의 가파른 도정에서 많은 인물(인재)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물 중에는 이성적 인격자도 있고 몰상식의 비인격자도 많다. 이성적 인물은 정도를 택하고, 몰상식의 인물은 패도를 넘나든다. 상식의 인물은 이타(利他)에 강하고 몰상식의 인물은 자리(自利)에 능하다. 다시 세상은 몰상식이 지배하는 세태가 되었다. 새삼 김자동 선생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그래서 그의 평전을 쓰게 되었다.


주석
1> 김삼웅, <오마이뉴스>, 2022년 9월 1일, 부분 보완.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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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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