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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해를 헤아리는 기준으로 서기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 기준에는 서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기 2023년인 올해는, 따라서 기준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연도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이승만 정부 당시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단기(檀紀)를 적용하면 올해는 2023년이 아니라 4356년이 되는 것이다.

만국 공통으로 쓰이는 서기와 다른 독자적 기년법을 가지고 있는 곳은 한국 외에도 여럿이 있다.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에도 비슷한 예가 있는데, 일본의 경우 그것을 황기(皇紀)라 표현한다.

단기가 단군기원을 뜻하는 것처럼 황기는 천황기원을 뜻하며, 일본의 단군 격이라 할 수 있는 초대 천황 신무(神武)가 즉위했다는 해를 기준으로 잡는다. 서기 2023년은 한국에서 단기 4356년인 동시에 일본에서는 황기 2683년이다.

단기든 황기든 지금은 한일 두 나라 모두 일상에서 잘 쓰지 않지만, 과거에는 양상이 다소 달랐다. 식민지에서 벗어난 독립국가의 자긍심을 표현하는 방편으로 한국이 단기를 사용했던 것처럼, 과거 일본에서는 제국의 유구한 역사를 과시하는 의도로 황기를 강조했다.

그런 와중에 1940년, 즉 황기 2600년을 맞게 되었고, 마침 끝자리가 깔끔하게 떨어진 그해에 대대적인 캠페인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결국 개최되지 못하기는 했지만, 일본이 1940년 하계올림픽(도쿄)과 동계올림픽(삿포로)을 나란히 열기로 했던 것도 황기 2600년과 관련이 있다.

황기 2600년 캠페인의 핵심 화두는 '신체제'였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해를 맞아 사회 각 분야를 일신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는데, 사실 이는 일본의 전시체제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사이 전쟁이 날로 확대되어 가는 와중에 황기 2600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체제가 강조된 당시 분위기에서는 식민지 조선 또한 열외가 될 수 없었다. 거의 모든 분야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의 흔적이 보이며, 대중음악에서도 대략 두 가지 면으로 전에 없던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하나는 '국민 문화 향상'을 위한 협회가 조직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대중가요에 일본어 가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조선연예협회 결성 소식을 전한 <매일신보> 기사
 조선연예협회 결성 소식을 전한 <매일신보> 기사
ⓒ 매일신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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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의 건전한 발달과 연예인의 실질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조선연예협회는 1941년 1월에 결성되었다. 해가 지나기는 했지만 그 배경에 황기 2600년 캠페인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조선연예협회 결성을 전후해 다른 분야에서도 1940년 12월 조선연극협회, 1941년 1월 조선음악협회, 2월 조선영화협회가 잇달아 만들어졌다. 대중음악은 당시 '예술성 있는 음악'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음악협회가 아닌 연예협회로 편성되었으나, 전통음악은 음악협회의 일원이 되었다.

나름의 목적과 명분이 있기는 했지만, 각종 협회들은 결국 해당 분야 예술가들에 대한 인적 통제를 행사하는 조직으로 활용되었다.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는 1942년 7월에 조선연극문화협회로 통합되었고, 협회 회원들에 대한 시험(실기와 사상)과 증명서(이른바 기예증) 발급을 통해 실질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기예증을 받지 못하면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언제든 징병이나 징용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일본어 가사는 협회 조직보다 앞서 1940년 8월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간단한 일본어 단어와 구절은 이미 1930년대부터 대중가요 가사에서 확인이 되나, 한 절 단위 이상으로 일본어 가사가 만들어지기는 1940년이 처음이었다. 이는 분명 신체제 캠페인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일본어 가사를 만들고 부른 작가와 가수의 존재와도 무관치 않다.

기존 연구에서는 1940년에 처음 등장한 일본어 가사의 예로 <남인수 걸작집> 음반에 수록된 <애수의 세레나데>(8월 발매), <불어라 쌍고동>(11월 발매), <무너진 오작교>(12월 발매) 등 세 건이 거론된 바 있다.

세 건 모두 공교롭게도 가수 남인수가 녹음했고, <불어라 쌍고동>과 <무너진 오작교>는 작사가 조명암이 일본어 가사를 썼다. 남인수는 가수 데뷔 이전에 일본에서 공장 노동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조명암은 1940년 당시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일본어 가사에 나름 적임자(?)들이 참여했던 셈이다.
 
일본어 가사가 등장하는 <사나이 비련> 음반 딱지
 일본어 가사가 등장하는 <사나이 비련> 음반 딱지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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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위 세 건보다 발표 시기가 앞서는 일본어 가사 자료가 최근 하나 더 새롭게 발굴이 됐다.

<남인수 걸작집>은 1940년 8월 19일에 첫 광고가 등장하는데, 약간 앞서는 8월 9일에 광고가 나온 <사나이 비련> 역시 3절 가사가 일본어임이 확인된 것이다. 광고로 확인할 수 있는 발매뿐만 아니라, <사나이 비련>은 6월 7일에 녹음된 <남인수 걸작집>(녹음번호 K1525~1526)보다 녹음도 더 먼저 이루어졌다(녹음번호 K1514).
 
何故よ 夜明けの鐘が鳴るまで(왜일까, 날이 새는 종이 울리기까지)
柱にもたれて 泣き明かせ(기둥에 기대어 울며 새네)
風を織る手に離す手に(바람을 짜는 손에 풀어내는 손에)
熱い涙の溜がする(뜨거운 눈물의 한숨만 나오네)
<사나이 비련> 3절 가사.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부 강태웅 교수 채록·번역

<사나이 비련> 또한 작사자는 조명암이지만, 녹음한 이는 남인수가 아니라 신인가수 봉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데뷔하는 신인에게 일본어 가사 표현이라는 부담스러운 과제가 주어진 데에는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40년 5월에 열린 오케레코드 콩쿠르에서 당선되어 대중가요 가수가 된 봉일은 앞서 일본 음악학교에 유학을 가서 성악을 전공하고 돌아온 바리톤 가수였고, 당연히 일본어 가창에 매우 능숙했기 때문이다.

본명이 김상련인 봉일은 오케레코드 콩쿠르보다 먼저 1940년 3월 도쿄에서 열린 신인소개음악회에 출연했고, 5월에는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일보사 주최 신인음악회에도 참가했다. 불과 며칠 간격으로 같은 장소에서 열린 오케레코드 콩쿠르와 조선일보사 신인음악회에 겹치기(?) 출연을 했던 셈인데, 김상련의 최종 선택은 성악가가 아닌 대중가요 가수 봉일로 데뷔하는 것이었다.

안정적인 가창과 능숙한 일본어 가사 표현으로 데뷔곡 <사나이 비련>을 발표한 봉일은, 그러나 대중가요 가수 활동을 그리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몇 달 뒤 <항구의 골통대>라는 곡을 하나 더 음반으로 발표한 이후 그의 노래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무대에서도 역시 봉일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41년 이후로는 사실상 가수 활동을 접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수 봉일이나 작사가 조명암이 어떤 이유로 일본어 가사를 부르고 만들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은근한 압력이 있었을 수도 있고, 뭔가 주목받고 싶다는 개인의 공명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본어 가사가 처음 등장하는 <사나이 비련>이 만들어진 시기가 문제의 황기 2600년, 신체제 열기가 한창 뜨거웠던 때라는 점이다. 역사적 현상이 개인의 행위와 아울러 사회적 조건의 산물일 수밖에 없음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최초 사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사나이 비련>에 앞서는 일본어 가사가 발견될 가능성은 그래서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것이 1940년 이전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세태가 조성한 배경이 그리 허술하지는 않은 법이다.

덧붙이는 글 | <사나이 비련> 노래 듣기 https://youtu.be/-mMTo-8PQRY


태그:#사나이 비련, #일본어 가사, #신체제, #조명암, #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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