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봉자 엄마, 여기 막걸리 한 주전자 달랑께" 남편의 재촉에 구복순은 막걸리 갖다주랴, 그릇에 김치를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때아닌 막걸리 잔치에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남편 박세열이 서울에서 열린 '여운형 서거 1주년 기념식'에 갔다가 임실역에 오자마자 임실경찰서로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며칠 지다가 나왔기 때문이다. 1948년 7월 하순 유난히도 별빛이 밝았던 한여름 밤에 막걸리 잔치가 벌어졌다. 
 
박봉자의 어머니 구복순
 박봉자의 어머니 구복순
 

"동무를 조직부장에 임명하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후인 1950년 7월 임실군 인민위원회 사무실에서 임실군 여성동맹(여맹) 결성식이 열렸다. 여맹 조직부장 완장을 찬 구복순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는 여성동맹이 무얼 하는 단체인지, 조직부장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어림짐작되지 않았다. 다만 1년 6개월 전인 1948년 12월 1일 임실경찰서로 간 남편 박세열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학살된 일과 그런 남편의 한을 갚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날 임실군 여맹 위원장 감투를 쓴 박금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4년 전 1946년 11월 중순 임실역 근처에서 열린 남편 문병학의 장례식에서 연신 눈물을 찍어내며 목쉰 소리를 냈다.

"제 남편은 왜정 때 일본 경찰에 쫓기며 감옥생활을 하다 해방이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왔어요. 국민학교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부른 게 엊그제 같은데 남편은 이 자리에 사진으로만 남았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누가 내 남편에게 총부리를 들이댔나요!"

문병학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하다 전주형무소에 수감됐고 이후 탈옥사건 때 미국 총격으로 사망했다. 남편을 잃은 구복순과 박금옥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같이 서울로 쌀장사를 다녔다. 그전에는 집에서 살림만 하느라 임실읍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녀들로서는 상전벽해였다. 더군다나 임실군 여성동맹 간부 감투를 썼으니 말이다.

남편 잃은 한을 지닌 구복순·박금옥 

인민군 군복을 입은 예쁜 이모들이 가르쳐주는 노래는 뭐든지 재미 있었다. 열한 살 소녀 박봉자(구복순의 딸)는 뜻도 모르면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엄마 구복순은 인공 시절 너무 바빠 자주 집을 비웠다. 북한식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교육과 전선에 보낼 의복과 식량을 모으는 일 때문이었다. 그러다 가을 바람에 땀을 식힐 즈음 회문산 자락으로 피해야 하는 일이 생겨났다. UN군이 진주함에 따라 인민군은 후퇴를 택했다. 

구복순은 임실군당 사람들과 함께 전북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로 옮겨갔다. 회문산 자락에 위치한 이곳에 임실군당 유격대도 둥지를 틀었다. 유격대는 삼계면 면장을 지냈던 부유층 인물부터 보도연맹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민청원과 여맹원들로 간부급이 구성되었고, 대원들은 인근 주민이 대부분이었다.(양경인,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은행나무)

구복순과 여맹위원장 박금옥은 학정리 남촌마을에서 재봉틀 발판을 부지런히 밟았다. 빨치산 전투복과 발싸개를 만들어 연락병을 통해 회문산으로 올려보냈다. 솔가지를 꺾어 솦잎으로 천을 염색하기도 했다. 물론 여자들도 급박할 때는 보초 경계 임무를 맡거나 전투에도 참여했다.

인민군이 물러나고 UN군이 진주하자 박봉자는 엄마와 떨어져 할아버지, 할머니, 동생들과 함께 임실군 신평면 명당골로 피난을 갔다. 어느 날 연락병이 오더니 "봉자야. 엄마한테 가자"라고 해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그렇게 해서 학정리 남촌마을에 간 박봉자는 군복과 발싸개를 만드는 엄마와 이모들의 모습이 낯설기는 했지만, 엄마랑 같이 있으니 마냥 좋았다.

하지만 군경의 토벌에 따라 그들은 계속 거처를 옮겨야 했다. 강진면 옥정리로 갔던 박봉자는 1951년 2월에는 회문산 가막골로 가야 했다. 얼마 안 돼 또 지리산으로 옮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지리산은 남한에서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산이면서 유격대 활동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소녀 박봉자는 지리산에 다다르기 전 방향을 바꿔 임실군 신안면으로 하산했다.

엄마 구복순은 임실군 운암면 학암리 산마을 볏짚 낟가리 밑 비트에서 군당 조직지도원 김정기와 숨어 있었다. 토벌대는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 서캐를 잡듯이 산마을을 훑어 내렸다. 이집 저집 울타리와 지붕이 와락와락 탔다.
 
김정기는 불바다를 헤쳐 수류탄을 던지며 뛰쳐나갔다. 구복순은 자결하려고 수류탄 핀을 뺐다. 팡! 하는 순간 한쪽 유방만 날아가고 목숨은 붙어 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박순애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피범벅이 된 구복순은 이미 주검이나 마찬가지였다.

"언니, 웬일이유..." 박순애는 솜저고리를 벗었다 /
"순애야, 넌 살아서 싸워야 해. 그냥 입고 있어." /
구복순의 피저고리를 벗기고 자기 솜저고리를 입혀 /
드렸다 상현달과 별빛이, 타버린 집터 슬픈 정경을 /
은은히 비춰 주었다 /
(이기형, 『봄은 왜 오지 않는가』, <봉자 어머니 구복순> 일부

구복순은 1951년 3월 18일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했다. 임실군 여맹위원장 박금옥 역시 비슷한 시기에 군경토벌대의 총구에 목숨을 잃었다.

여성 빨치산 박선애·박순애 자매

임실군 여맹 조직부원이었던 박선애·박순애 자매도 회문산과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 

구복순의 남편 박세열을 오빠처럼 따랐던 박선애는 1927년 전북 임실군 청운면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일곱 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다. 해방 후 임실군에서 여성운동과 당 레포(연락원) 활동을 하다가 회문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박선애가 빨치산이 된 데는 사상적 동지이기도 한 오빠 박훈(1919년생)이 박세열(1913년생)과 함께 여순사건 직후 임실경찰서에 예비검속돼, 1948년 12월 1일 총살당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회문산과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2년 1월 하산해 지하 활동 중 체포됐고, 광주포로수용소에서 10개월 수감 후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1965년 5월 만기 출소한 박선애는 1975년 사회안전법으로 재수감되었다. 당시 그는 유일한 여성 비전향장기수였다. 결국 한 사람 때문에 여사(女舍)를 계속 운영할 수 없어 풀어 주기로 결정, 1979년 출소했다.

박선애의 동생 박순애(1930년생)도 해방 후 언니와 함께 여성운동을 하다 1950년 가을 회문산으로 들어갔다. 1952년 1월 체포됐는데, 복막염으로 형기를 5년 앞두고 출감했다.(양경인, 앞의 책) 박순애는 특유의 영민함으로 국군 제11사단의 '오소리 작전'을 피해갔다. 국군과 토벌대는 1951년 3월 14일부터 16일까지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폐광굴에 생솔가지와 고춧대를 쌓아놓고 불을 피워 안에 있던 수백병을 질식사시켰다. 박순애 무리도 문제의 폐광굴에 머물렀지만 안전하지 않다는 박순애의 판단에 따라 자리를 옮겼다. 며칠 후에 오소리 작전의 비극이 시작됐다. 

전쟁통에 부모 잃은 소녀의 삶

1948년 강동정치학원을 졸업한 류금수(1927년생,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갈읍리)는 김일성종합대학 입학 권유를 뿌리치고 남파되어 충북여맹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활동한 지 얼마 안 돼 아지트가 탄로나 청주형무소에 구속됐다. 청주형무소에서 탈당을 강요받았지만 끝내 거부했다.

당시 담당검사였던 박세영은 끝까지 탈당을 거부한 류금수를 보기 위해 청주형무소 여자감방을 찾았다. 박 검사는 "류금수, 끝까지 싸워 볼 작정인가?"라며 묻고, 대답하지 않는 그녀에게 미소를 보이며 감방을 떠났다.

중형을 각오한 그녀에게 판사는 징역 5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예상보다 가벼운 형량에는 박세영 검사의 영향이 컸는데 다름 아니라 그는 남로당 당원이었다.(국사편찬위원회,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구술생애사-류금수 편」, 2008)

박세영(1916년생)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일본대학 전문부 법률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 사법요원양성소를 수료했다. 전주에서 시보관(試補官)으로 근무 후 청주지방검찰청 검사로 근무하면서 남로당 활동을 했다. 그는 인민군 점령 시절 청주시 북문로 인민위원장과 청주시 변호사회 회장을 맡았다. 그는 박봉자의 아버지 박세열의 집안 동생이었다. 그는 부역 혐의로 고초를 겪다가 석방 후 변호사 생활을 했다.
 
증언자 박봉자의 유치원 시절
 증언자 박봉자의 유치원 시절
 

전쟁통에 부모와 막냇동생을 잃은 박봉자(1940년생)는 가족 친지와 단절된 채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다나 1996년에야 집안 작은아버지 박세영과 재회를 하게 됐다. 임실국민학교 교사였던 숙모 조갑순은 박봉자를 만나자 너무 기뻐 싱글벙글했다.

박봉자는 2000년 들어서 이이화, 채의진이 주도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통일광장'에도 몸담아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태그:#회문산, #여성 빨치산, #여성동맹, #빨치산, #지리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