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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소소한 탐식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과 노곤함을 이겨냅니다. 고독한 방구석 연주자인 임승수 작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는 소소한 깨달음과 지적 유희를 유쾌한 필치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가 피아노에 나름 진심인 편이다 보니, 딸과 피아노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잦다. 내가 유튜브에 접속해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고 있으면 쫄래쫄래 다가와 무슨 곡이고 누가 연주했느냐며 옆에서 같이 귀를 기울인다. 그 모습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다.

음색에 관심 있는 아이

대체로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은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는 기교적인 곡에 관심을 보이기 마련인데, 둘째는 유독 '음색'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하다. 한번은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연주하는 바흐의 아리오소(건반 협주곡 5번 2악장 BWV 1056)를 들려주었다. 악상기호가 라르고(Largo)일 정도로 느린 데다가 고즈넉한 단선율이 연주되기 때문에 초등학생에게는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곡인데, 아이가 초집중 상태로 끝까지 듣는다.

"아빠, 이 할머니 누구야? 소리가 너무 좋은데?"
"마리아 조앙 피레스라는 피아니스트야. 음색이 아름답기로 유명해."

"나 이 곡이 너무 좋아. 악보 구해줄 수 있어? 쳐 보고 싶어."
"그렇게 좋았어? 알았어. 구해줄게."


당장 IMSLP 사이트에 접속해 오케스트라 파트까지 있는 총보를 내려받아 인쇄해 정성스럽게 악보 파일에 끼워주었다. 총보는 처음일 테니 피아노 파트가 어디인지 알려주었는데, 어느새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는 플랫이 네 개나 붙은 내림가장조 곡을 혼자 낑낑대며 연주한다.

좀 도와줄까도 싶었지만, 여러 번 들었던 곡이니 자기 귀로 판별하며 건반을 찾아내는 게 교육적으로 더 낫겠다 싶어 놔두었다. 다만 손가락 번호만큼은 도와주어야 할 것 같아서 개입했다.

"첫 음은 3번 손가락으로 친 후에 바로 1번으로 바꿔줘야겠어.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그래? 좀 까다롭네."

"만약 3번 손가락으로 유지하면 다음에 나올 음을 연주하기가 어렵거든. 프로 연주자들은 어떻게 치는지 볼까?"
"응. 보여줘."

"여기 피레스 연주 영상을 보면, 3번으로 연주한 후에 바로 1번으로 바꾸는 거 보이지?"
"진짜 그렇네!"


아이 손 크기를 감안해 고른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음표 위에 적당한 번호를 다음과 같이 적어주었다.
 
아이 손 크기를 감안해 음표 위에 적당한 손가락 번호를 적어주었다.
▲ 바흐의 건반 협주곡 5번 2악장 BWV 1056 아이 손 크기를 감안해 음표 위에 적당한 손가락 번호를 적어주었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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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아리오소의 매력에 푹 빠진 둘째는 이 악보를 피아노 학원에 들고 가서 선생님에게 가르쳐달라고 한 모양이다. 아이가 의욕을 보이며 배우고 싶다고 하니 선생님도 기특하게 여겨 몇 번 가르쳤지만, 다른 곡 팽개치고 이 곡만 연습하는 모습이 발각(?) 된 모양이다. '하농과 체르니나 열심히 치라'는 꾸지람을 듣고 딸은 악보를 다시 집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뭔가 꽂히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돌진하는 게 나랑 비슷하구나. 후후. 대신 아빠가 집에서 좀 봐줄게.

똑같이 가르치는 손 모양
 
일반적으로 동네 피아노학원에서는 계란을 살포시 쥔 느낌으로 손 모양을 동그랗게 해서 손톱 바로 아래의 살 부분으로 치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동네 피아노학원에서는 계란을 살포시 쥔 느낌으로 손 모양을 동그랗게 해서 손톱 바로 아래의 살 부분으로 치라고 한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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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든 악기 연주든 몸을 쓰는 분야는 나쁜 버릇이 들지 않고 좋은 자세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피아노 또한 연주 자세의 변화에 따라 음색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나는 어릴 때 동네 학원에서 얼렁뚱땅 배우다가 잘못된 연주 자세가 몸에 배었다. 뒤늦게 성인 피아노학원에서 독일 유학파 선생님에게 올바른 손 모양, 타건 방식 및 어깨 힘 빼는 방법 등을 배웠는데, 음색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이 중요한 노하우를 둘째에게 알려주기 위해 손 모양과 연주 자세 등의 변화에 따른 음색의 차이를 내가 아는 대로 설명해주었다. 특히 아이가 관심을 가진 연주법은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펴고 손끝의 살이 많은 부분으로 건반을 누르는 주법이었다.

일반적으로 동네 피아노학원에서는 계란을 살포시 쥔 느낌으로 손 모양을 동그랗게 해서 손톱 바로 아래의 살 부분으로 치라고 한다. 둘째도 지금 다니는 학원에서 그런 연주 자세를 배운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설명한 방식을 직접 해보더니 소리가 훨씬 부드럽고 좋다며 자발적으로 손 모양을 바꿔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피아노학원에서 손가락을 동그랗게 오므리라고 엄하게 지적받았나 보다. 스스로 판단해서 더 음색이 나은 연주법을 선택한 건데, 학원에서는 아이의 손 모양이 흐트러진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 후로는 선생님에게 레슨 받을 때만 손가락을 동그랗게 오므려 연주하고, 혼자 연습할 때는 손가락을 펴고 연주한단다.

자신의 선택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피아노학원 친구에게 같은 곡을 손 모양 바꿔가며 들려주고선 어느 연주법이 소리가 더 좋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친구 역시 손가락을 편 쪽이 더 듣기 좋다고 말했다며 똘망똘망하게 얘기한다.

뭔가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아이가 손 모양 때문에 피아노학원에서 한 소리 들었다는 얘기를 피아노 카페 게시판에 털어놨다. 그랬더니 독일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는 카페 회원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댓글을 남겼다.

"대가들도 다들 손에 살 많은 부위로 치라고 합니다. 더 따뜻한 소리가 나고, 피드백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요. 사실 어느 정도 손이 펴진 상태가 더 자연스러운 자세이기도 하고요. 물론 강한 소리가 필요할 때라든가 특정한 순간에는 손을 뾰족하게 해서 칠 때도 있고, 빠른 스케일을 연주할 때 약간 구부리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피아노학원에서 계란 쥐듯이 치라고 하는 게 가장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생각해요. 손가락 구부리고 치는 대가는 제 기억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구부린 듯한 자세 때문에 불필요하게 힘을 주고 치게 되기도 하고요."

사실 이런 얘기를 접한 게 처음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손가락을 펴서 손끝 살 많은 부분으로 연주하는 방법을 독일 유학파 선생님에게 배웠다. 그 경험담을 디시인사이드 도이치 그라모폰 갤러리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때에도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손가락 끝에 살이 많은 부분으로 터치하라는 것은 러시아 출신의 전설적인 피아노 교수였던 로지나 레빈 역시 강조했던 부분입니다. 사실 로지나 레빈뿐 아니라 19세기 러시아 피아니즘에선 이런 터치, 즉 부드럽게 노래하는 듯한 터치를 중요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로비츠 역시 그렇게도 평평한 손 모양을 고수한 것이 아닌가 싶더군요."

잘 치는 피아노의 기준

아이가 피아노 전공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취미로 즐기더라도 기왕이면 올바른 연주법을 익히기를 바라기에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전공자도 아닌 내가 주제넘게 학원 선생님의 지도법에 이견을 제시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분들도 자신의 지도법에 확신을 가지고 소신껏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 보니 아이가 두 가지 주법을 동시에 익히면 더 좋지 않겠냐는 식으로 애써 정신승리하며 상황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세 번이나 녹음한 독일의 거장 빌헬름 켐프의 연주를 둘째와 함께 듣고 있었다. 그 특유의 덤덤함과 담백함 뒤에 깔린 더할 나위 없는 서정성에 젖어 들어 있는데, 아이가 말을 건넨다.

"아빠, 이 할아버지는 살아 있어?"
"아니. 이미 돌아가신 분이야."

"소리가 너무 따뜻하네."
"아빠는 이 할아버지 연주를 들으면 겨울철 난로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맞아! 정말 그래. 나는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는 게 피아노를 잘 치는 게 아니라, 좋은 음색을 만들어 내는 게 진짜 피아노 실력이라고 생각해."


아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아빠도 네 생각에 완벽하게 동의한단다! 문득 음색에 대한 딸의 진심을 존중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선생님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간만에 바짓단 좀 펄럭여보마. 시간을 내서 아빠랑 동네 피아노학원 투어에 나서자꾸나. 여기저기 물색하다 보면 음색에 대한 딸의 진심에 귀를 기울여주는 곳이 하나라도 있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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