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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대전 민들레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일하는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가정의학과 의사는 1차 의료를 담당하기 때문에 질환 대부분을 광범위하게 볼 수 있어야 하고, 간단한 감기나 배탈부터 고혈압, 당뇨 등의 만성질환, 통증이나 가벼운 정신과적 문제까지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처방하는 약물의 종류도 다양하고 많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약물은 질병을 치료하거나 증상을 좋아지게도 하지만 과하게 쓰거나 잘못 쓰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기도 합니다. 때문에 약물을 적당히 쓰면서 생활 습관 개선과 비약물적 치료를 병행해야 하는데,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는 이것이 참 힘들다는 것을 느낍니다.

매일 몇 백 마리 닭을 씻는 50대 여성 환자 

50대 여성 환자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오셨습니다. 양측 손가락이 굽은 상태로 관절 마디마디가 붓고 아프다고 하십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여쭤봤습니다.

"평소 손을 많이 쓰시나 보네요?"
"네, 닭 공장에서 닭을 씻는 일을 하고 있어요. 매일 몇 백 마리 닭을 씻어야 하니까 손이 남아 나질 않아요."
"손가락 통증이 좋아지려면 손 쓰는 일을 좀 쉬셔야 할 것 같아요."
"선생님, 제가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그저 좀 덜 아프게만 해주세요."


그분은 7년 전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져 와상 상태에 있어,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안 해본 일들이 없다고 얘기하십니다. 낮에 그렇게 일하고 밤에는 집에 가서 남편 간병을 위해 쪽잠을 자야 하는 상황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셨지만, 7년을 버텨 왔는데 지금은 갱년기까지 겹쳐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말씀을 하시면서는 결국 눈시울을 붉히십니다. 다시 손가락 모양을 자세히 보니 그 손안에 딱 닭 한 마리가 들어갈 만큼 굽어 있습니다. 닭 공장에서의 시간은 그분에게 굽은 손가락과 통증으로 남았고, 저는 그분의 힘겨운 삶에 약을 더 얹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는 건 쉽지만, 줄이긴 어려운 약
 
열두개하고도 반 알의 약을 생명줄로 여기는 환자도 있습니다.
 열두개하고도 반 알의 약을 생명줄로 여기는 환자도 있습니다.
ⓒ 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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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올 때마다 약 때문에 저와 실랑이하는 70대 어르신도 있습니다. 과거 위암 수술도 하셨고, 고혈압, 당뇨, 이상지질혈증, 천식이 있는 분인데 줄담배를 피우시고 매일 커피 믹스를 일고여덟 잔은 마셔야 산다는 분입니다. 청소 노동자인데 무거운 청소도구를 옮기고 이리저리 쓸고 닦으니 허리, 무릎, 어깨 안 아픈 곳 없어 통증약에 통증 주사를 맞아야 하고, 근무시간에 화장실을 잘 가지 못하여 방광염과 변비도 있습니다. 당뇨, 고혈압도 조절이 잘 안 되고, 소화 기능도 떨어지고 수면장애도 있습니다. 드시는 약이 무려 열두 개하고도 반 알입니다. 그런데도 약물이 하나라도 줄거나 빠지면 난리가 납니다.

"어르신, 드시는 약이 너무 많아요. 이제는 좀 줄여야 할 것 같아요."
"안 돼유~ 이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나는 죽어유."
"당뇨나 천식은 커피 믹스하고 담배만 줄여도 좀 나아질 거 같아요. 일도 좀 줄이시고요."
"내가 일 쉬면 선생님이 대신 먹여 살릴겨? 담배랑 커피가 내 유일한 낙인데, 그것들을 어찌 줄여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5년 전부터 청소일을 하시는데 칠십 넘은 자신을 써주는 곳이 거기뿐이라 두 손이 다 부르트고 갈라져 피가 나도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해마다 일 년만 더, 일 년만 더 하면서 버티는 거여유. 그나마 이렇게 약이라도 먹으니 버티는 거지. 한 알도 빼지 말고 주셔유."

그 어르신의 마음에는 매일 먹는 열두 개 하고도 반 알의 약이 생명줄입니다. 사실 제가 약물부작용과 오남용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 이해는 하십니다.

"그래도 내일 일을 해야 하니까 일단 약을 주세요. 제가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때 검사도 하고 운동도 하고 약도 줄여 볼게유."

아파도 일을 쉬지 못하는 분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약물 처방인 것 같아 그저 커피 믹스와 담배를 좀 줄이시고 간간이 스트레칭이라도 하시라는 말로 자괴감을 덜어 봅니다.

의사의 조언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는 사회

당뇨와 B형 간염 보균상태인 한 영업직 환자는 2020년 이후 건강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직업 때문이라며 술을 거의 매일 하셨던 분이 코로나 팬데믹 기간 회식이 어려워지면서 술자리가 줄었고, 정상 수치의 2~3배를 오르내리던 간 효소 수치가 정상으로 떨어져 같이 기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2022년 들어 회식 자리가 다시 늘어나며 간장약을 처방 받으러 오십니다. 처음에는 술을 줄이도록 달래도 보고 겁도 드려보았지만, 가족들의 생계가 걸린 직장을 유지하는 것이 본인의 건강보다 한참 우선이라는 것을 지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일이 고되고 힘들수록 아플 수밖에 없고, 고용이 불안할수록 아파도 쉬지 못합니다. 의사로서 당연히 그분들의 아픔을 덜기 위해 약도 드리고 이런저런 조언도 해드리지만, 하루 한두 번 약 먹는 것도 힘에 겨운 분들에게 건강한 식사를 챙기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잠을 충분히 자라는 기본적인 생활지침은 공허할 뿐입니다. 아플수록 약이 늘어나고, 약이 늘어날수록 부작용도 생기고 부작용을 치료하느라 또 약이 늘어납니다. 이런 악순환은 환자의 건강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사실 의사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이 약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저 컴퓨터에 몇 글자 입력하면 끝입니다. 반대로 약을 줄이는 것은 정말로 힘듭니다. 왜 이 약을 줄여야 하는지 한참 설명해야 하고 그래도 안 되면 환자와 실랑이도 벌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진료실 안에서 약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처방한다면 조금은 나아지겠지만, 진료실 밖에서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를 악물고 통증을 버티며 일하는 이들에게 아프면 약을 권하기보다 쉬는 것이 당연한 사회, 의사의 조언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생활 습관을 건강하게 바꿀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지영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후원회원, 가정의학과 전문의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9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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