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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불리는 까닭, 시를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나마 익숙함을 만들어 드리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선지피
- 김정환

그때 온몸으로 그대 흩뿌리던 비가
해장국 속을 둥둥 떠다닌다
밤을 새운 새벽 작살낸 것은 쏘주뿐
혼탁한 하늘 그때 마지막으로 부릅뜨던 그대 눈동자 두 개
떠다닌다 똘똘 뭉쳐진 것들은 똘똘 뭉쳐서
우리를 노려본다
우리는 아직도 세상이 변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해서 괴롭다
혼탁한 것들은 온통 혼탁해져서 우리를 노려본다
지치고 토하며 얼싸안고 비틀거리다 찾아온 어둔 새벽 시장골목

(하략)

- <황색예수전2>, 실천문학사, 1984년, 39~40쪽


이 시가 어떤 상황에서 쓰인 시인지 70~80년대를 살아온 분들이라면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당시 저는 어린 학생이었기에 그 상황을 알지는 못했지만,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80년대 중반 저는 대전의 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고 있던 학교와 담을 마주한 학교가 목원대학교였습니다. 지금은 유성으로 이사를 했지만, 당시에는 대전 목동에 터를 잡고 있었습니다. 목원대학교를 기억하면 떠오르는 것은 매캐한 연기, 때를 맞춰 시작하는 학생들의 시위와 자욱하게 풍겨오는 지독한 최루탄 가스…, 바로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같을 것입니다.
 
김정환 시인의 시집 '황색예수전2'
 김정환 시인의 시집 "황색예수전2"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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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시를 만난 것은 올해입니다. 2022년 오늘을 사는 저에게 이 시는 군사독재정권과 싸우는 투사로서의 시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투쟁의 시'로 느껴집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80년대 못지않은 투쟁의 연속입니다. 다만, 1980년대는 '민주화'라는 투쟁의 목적이 뚜렷했지만, 오늘 우리의 투쟁은 다변화되었습니다.

짐작하셨듯 이 시집의 첫 주인은 제가 아닙니다. 이 시집은 1984년 발행되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저에게 정가 1800원에 달하는 시집을 살 수 있었던 용돈도 없었을 뿐더러,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입니다.

이 책을 비롯해 다섯 권의 시집을 5만 원에 구입했습니다. 정가로 따진다면 8, 9배는 더 준 셈입니다. 모두 한 사람이 소장했던 시집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시집이 중고 책방까지 흘러나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때 매우 소중하게 다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이 샀던 시집 백무산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청사)에는 부인이 된 자신이 여자 친구에게 쓴 다소 긴 메모도 눈에 보입니다. 중고 시집에서 가끔 발견할 수 있는 애틋함이기도 합니다.
 
'황색예수전' 2 내지
 "황색예수전" 2 내지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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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처음 소장했던 사람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처음 맹세했던 사랑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을까요. 그이는 이 시의 '우리는 아직도 세상이 변하리라는 / 희망을 버리지 못해서 괴롭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치고 있습니다. 그가 바꾸고 싶었던 세상,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는 지금껏 얼마나 달음질쳤을까요. 혹시 혼탁한 세상에 어우러져 살다 보니 그도 같이 혼탁해 진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한때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희망을 버리지 못해서 괴롭다'라고 고민했던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처음 마음먹었던 처음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시만큼은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 「선지피」는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 이제 곧 아침이 온다는 것이다 / 그대가 마련한 아침 / 우리가 일어서야 할 아침'.

만약 이 시집을 소장하셨던 분이 제 글을 보게 된다면, 이 마지막 문장을 다시금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곧 아침이 온다고, 그대가 보고자 했던 아침, 우리가 일어서야 할 아침이 언젠가 오게 될 것이라고. 깊은 어둠 속에 서 있는 만큼 새벽의 동(東)은 더 찬란하게 느껴질 것이니…

시 쓰는 주영헌 드림 

김정환 시인은...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80년 『창작과비평사』에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 『지울 수 없는 노래』, 『황색 예수전』 등이 있으며 백석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을 수상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시와 산문은 오마이뉴스 연재 후,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blog.naver.com/yhjoo1)에 공개됩니다.


태그:#황색예수전2, #김정환시인, #실천문학사, #선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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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보다 '시 읽기'와, '시 소개'를 더 좋아하는 시인. 2000년 9월 8일 오마이뉴스에 첫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그 힘으로 2009년 시인시각(시)과 2019년 불교문예(문학평론)으로 등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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