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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4월 8일 까미노 12일차
Aljucen-> Alcuesca 19.2km 9시간 정도 소요

초반엔 무리하지 않고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었다. 날아갈 것 같은 돌풍을 맞으며 걸은 날도 있었고, 종일 내리는 비에 몸이 다 젖고 다리에는 1kg 이상의 진흙을 달고 걸은 날도 있었다. 이젠 걷기에 적응이 된 듯했다. 한층 더 주변을 즐기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꽃길
▲ 길 꽃길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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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걷는 길 주변에는 야생 라벤더 꽃이 가득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 같은데 이렇게 지천으로 피어 있는 것이 신기하다. 보랏빛 물결이 끝없이 이어진다. 호젓한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데 라벤더 향까지 맡으며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군데군데 무더기 지어 있는 라벤더가 쉬어가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집에서 키울 때는 잘 자라지 않던 라벤더 꽃이 이곳에는 아름답게 피어 있다. 좋은 토양 때문일까 따사로운 햇살 때문일까. 오르막길임에도 피곤하지 않은 것은 라벤더 테라피의 효과인 걸까? 수시로 발길을 멈추고 바라보고 사진을 찍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후에 생길 일에 대해선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야생의 라벤더꽃길-걷는동안 라벤더테라피를 받는 느낌
▲ 라벤더꽃 야생의 라벤더꽃길-걷는동안 라벤더테라피를 받는 느낌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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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오던 외국인 여성이 나에게 말을 건다. 그는 홀랜드에서 온 엘런이라고 했다. 처음엔 폴란드라고 착각했으나 이내 깨달았다. 네덜란드구나라고. 나도 내 이름을 '쏭'이라고 간단하게 알려줬다. 한동안 함께 걸으며 까미노에는 몇 번째 왔는지 어느 길을 걸어봤는지 누구랑 왔는지를 얘기했다. 오늘의 일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다 같은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공립 알베르게에 갈 거라고 했더니 엘런은 그 자리에서 서양인들이 많이 쓰는 웹사이트인 gronze.com으로 검색을 해본다. 그리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우리가 가려는 공립 알베르게는 현재 닫혀 있는 상태고 근처에 사립 알베르게 두 곳이 더 있는데 그중 Cruce de Las Herrierias에 있는 Los Olivos가 싸다고 알려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녀는 이미 그때 알베르게 예약을 했고 나보고도 예약을 하란 뜻으로 얘기를 했는데 내가 못 알아들은 것 같다).
 
까미노길을 걷는 동안 다양한 형태의 길을 걷게 된다.
▲ 길 까미노길을 걷는 동안 다양한 형태의 길을 걷게 된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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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런이 알려준 알베르게는 아침에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알베르게와 다른 마을에 있다. 원래 가기로 한 알베르게에 도착하기 3km 전에 갈림길에서 다른 길로 가야 한다. 친구와 연락해서 의논해 봐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내가 먼저 출발을 했기에 친구는 뒤에서 여유롭게 오고 있을 것이다. 걱정한다고 해서 당장 해결될 일은 아니라 생각하여 우선은 걸었다.

그리곤 걸음이 빠른 엘런이 앞서가고 나는 한껏 라벤더를 즐기며 가고 있었다. 보통은 걷다 보면 몇 명씩은 만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다. 엘런이 알려준 알베르게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 친구를 만나 엘런이 말해준 알베르게로 갈까 잠시 갈등이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길을 걸으며 지도에 나오는 길 외에도 여러 길이 있는 것을 보았다. 친구와 길이 엇갈릴까 봐 처음 약속한 장소를 향해서 걸었다. 문득 조용한 듯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걷는 사람이 내 앞에도 뒤에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살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우리가 가려던 공립 알베르게가 닫혀 있다는 공지판
▲ 안내판 우리가 가려던 공립 알베르게가 닫혀 있다는 공지판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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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3km를 걸어 공립 알베르게 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때 노란색 코팅지가 보였다. 알베르게 닫았다고. 이미 짐작한 일이었지만 확인까지 하고 나니 씁쓸했다. 이곳에서 1시간쯤은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기다린 지 삼십분이 채 안 되었는데 친구가 도착했다. 친구에게 내가 알게 된 정보를 말해 주었다. 엘런이 알려준 숙소를 가려면 4km를 더 걸어가야 하고 내일 아침 까미노길을 걸으려면 이곳으로 와야 하니 4km를 또 걸어야 한다고.

8km를 덜 걷고,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도에 표시된 이 근처의 apartmentos 알베르게로 갔다. 사설 숙소라 해도 까미노 길의 알베르게인데 비싸봐야 얼마나 하겠냐는 생각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주인은 영어가 전혀 안 되는지 스페인어로 얘기했고 우리는 스페인어를 알아듣지 못했는데 100유로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돌아서는데 80유로까지 해준다고 제안을 한다.

우리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엘런이 알려준 알베르게로 가기로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점심이나 먹고 가자며 식당에 들렀다. 식사를 하고 힘을 내서 걸었다. Los Olivos에 도착하니 벌써 5시가 되었다. 거리에 비해서 많이 늦게 도착한 편이었다. 방이 있냐고 물었더니 주인은 예약을 했느냐고 되묻는다. 아침에 엘런이 알베르게에 전화했을 때 우리 얘기도 전하지 않았을까 싶어 한국인 두 사람 예약한 게 없냐고 물으니 없단다. 숙소는 꽉 찼단다.
 
우리가 예약을 하지 못해 곤경에 처했지만 마음씨 따뜻한 천사들의 베품으로 하룻밤 휴식을 취했던 곳
▲ Los Olivos Hostal 우리가 예약을 하지 못해 곤경에 처했지만 마음씨 따뜻한 천사들의 베품으로 하룻밤 휴식을 취했던 곳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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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은 예약 없이 가도 늘 침대가 남아 있었기에 당황스러웠다.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이곳은 식당을 겸한 알베르게로 주변에 아무 시설도 없고 다른 마을과도 떨어진 숙소였다. 난처해하는 우리에게 인상 좋은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스페인어로 얘기를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핸드폰 음성 번역기를 대어줬더니 "걱정하지 말아요. 잘 될 거예요. 두 사람 잘 곳이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라는 의미였다. 인상 좋은 할아버지는 주인하고 얘기해 보더니 예약 취소되는 자리가 있을 수도 있으니 6시까지 기다려보란다. 그리고 자긴 좀 쉬고 오겠다고 했다. 잠시 위안이 되는 듯했지만, 숙소를 예약해 놓은 순례자가 안 올 리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빈 침대가 나타날 것 같진 않았다.

6시쯤 되어 다시 나타난 인상 좋은 할아버지 비센테는 그때까지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를 해주었다. "침낭 가지고 있어요? 침대가 없더라도 빈 공간에 매트리스를 놓고 잘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라며 다시 한 번 다독여주었다.

그 말에 힘을 얻은 우리는 주인에게 "아주 작은 공간만 있으면 매트리스 없이 침낭만 깔고도 잘 수 있어요. 안 되면 처마 밑에 앉아서라도 묵을 수만 있게 해주세요"라며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소통이 안 되어 답답하던 차에 자신의 일도 아닌데 선뜻 나서주는 비센테 할아버지가 더없이 고마웠다. 불안하던 마음이 처음 보는 사람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누그러진다. 모르는 사람한테도 마음을 써 주고 자기 일처럼 챙겨주는 것이 순례길의 미덕인가 보다.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만난 호의였다. 비센테 할아버지의 위로에 희망을 가지고 예약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기다렸다.

혹시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우리의 처지를 하소연하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식당을 둘러보니 낯이 익은 얼굴들이 있다. 어제 묵은 알베르게에서 인사를 나눴던 사람들이다. 노인 둘과 청년 하나는 함께 길을 걸으며 친해졌는지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숙소는 언제 예약했는지 물으니 오늘 아침에 했단다. 우리는 예약을 못해서 침대가 없다며 길에서 자야 할 판이라고 몸짓까지 섞어 애처로운 표정으로 얘기를 했다. 영어를 알아들은 청년이 영어를 못하는 두 할아버지에게 통역을 해주며 뭔가 의논을 하는 것 같았다.

얘기를 끝내고는 할아버지 한 분이, 침대 하나로 두 사람이 잘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지금 우리는 침대가 하나냐 두 개냐를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침대 하나만 생기는 것도 감지덕지였다. 우린 날씬해서 당연히 한 침대에서 잘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1인실인 자기 침대를 우리에게 양보해 주고 자신은 친한 사람들이 있는 같은 방을 쓰겠다고 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침대를 양보해 주다니. 갈 곳 없는 우리에게 자신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가진 것을 내어 준 것에 우린 허리가 꺾어질 정도로 인사를 했다. 땡큐를 수없이 외치며 로비에 있던 짐을 빛의 속도로 2층에 있는 방에 갖다 놓았다. 애태웠던 마음을 진정시킬 겸 음료수라도 마시려고 1층에 있는 카페로 내려갔더니 엘런이 맥주 한 잔을 주문해서 내 앞에 내민다.

오늘 알베르게 정보를 미리 알려 준 엘런, 우리를 위로해주고 안심시켜주고 희망을 준 비센테 할아버지, 오늘 하루 편히 묵을 수 있는 자리를 양보해준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정말 천사였다.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꼈다. 순례길에선 서로가 나누고 의지하고 모두가 한마음이 된다는 걸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숙소 해결 후에 나와서 본 노을
▲ 노을 숙소 해결 후에 나와서 본 노을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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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센테는 내일 목적지 "발데사로르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는 침대가 14개뿐이야. 두 사람이(우리를 지칭) 사진 찍지 말고 빨리 가면 충분히 공립 알베르게에 묵을 수 있어"라며 웃는다. 내일도 저렴한 잠자리를 위해서 14명 안에 들도록 부지런히 가야 하는 건가? 그러나 그건 내일 일이고 오늘은 노숙이 아닌 것만으로도 행복한 날이었다.

길바닥에서 잘 뻔했다가 침대가 생기고 나니 하늘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았다.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내 몸 뉠 곳 하나 생기니 걱정이 사라지는 마법 같은 하루, 갑자기 분위기가 고조되고 사람들과 어울려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태그:#ALCUESCA, #VIA DE LA PLATA, #라벤더, #LOS OLIVOS HOS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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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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