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교실 속 책상.
 교실 속 책상.
ⓒ pexels

관련사진보기

 
아이들과의 상담 도중 이따금 자문할 때가 있다. 지금 내가 교실에서 만나고 있는 고등학생 중에 졸업한 뒤 경제적으로 자립해 살아갈 수 있는 경우가 과연 몇이나 될까. 누구나 대학 진학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등록금에 대해 걱정하는 아이를 지금껏 본 적이 없어서다.

나이 스물을 앞둔 고등학생 정도면, 흔히 '천문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등록금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할 법도 하다. 하지만 대학 진학 외엔 고민조차 사치라며 오로지 입시 공부에만 매달린다. 그들은 등록금이 부모의 몫이라 여긴다. 부모 역시 자녀 앞에서 "명문대만 합격한다면, 머리카락을 팔아서라도 보낼 것"이라고 선선히 말한다.

하긴 방과 후 수업을 받을지 말지,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할지 말지, 심지어 몸이 아파 조퇴할지 말지조차 부모에게 일일이 허락받는 요즘 아이들에게 등록금 걱정은 언감생심일 테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건 공부 외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다. 아무리 대입이 전쟁터라지만, '공부만 하면 되는' 아이들이 부럽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초중고의 모든 교육과정이 대입으로 수렴되는 현실이 과연 정상이냐는 성찰적 질문은 우리 사회에선 어느덧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돼버렸다. 대입이 교육의 '종착역'이 된 지금, 대학은 더는 '큰 배움'을 위한 곳이 아니다. 대학이라는 '기업'에 충직한 '고객'이 되기 위해 오늘도 아이들은 불철주야 책과 씨름하고 있다. 

관심은 잠깐일 뿐이었다

지난 21일 보육원 출신의 한 새내기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가 종일 포털 사이트에 걸려 있었다. 안타깝고, 미안하고, 참담한 마음에 일이 종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의 방에서 발견된 쪽지 속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이 많은데'라는 글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경찰은 타살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며 내사 종결할 뜻을 밝혔다. 경제적 어려움과 외로움을 원인으로 지목한 언론에서는 이구동성 경제적 취약 계층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질타했다. 원인 분석부터 제시하는 대책까지 너무나 뻔한 레퍼토리라 이젠 눈길조차 가지 않는다. 

과거 '송파 세모녀 사건' 때도, 영화 <기생충>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때도 반짝 언론의 관심을 끌었을 뿐 변한 건 없었다. 최근 반지하에 살던 가족이 폭우에 숨지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지만, 늘 그래왔듯 부박한 여론은 망각을 부추길 것이다. 경제적 취약 계층은 그들의 목소리를 정책으로 반영시킬 만한 힘이 없는 '연민'의 대상일 뿐이어서다.

교사라서일까. 모든 언론은 '보육원 출신'이라는 데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난 '새내기 대학생'이라는 단어가 더 가슴을 아리게 했다. 달랑 자립 지원금 700만 원을 손에 쥔 채 보육원을 내쫓기듯 나가야 했던 그의 심정을 몰라서가 아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정부의 정책적 배려와 경제적인 지원이 조금 더 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야 왜 없겠는가.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그의 대학 생활은 불과 반년만에 끝났다. 책도 읽고 싶고, 친구도 사귀고 싶고, 남들처럼 여행도 다니고 싶었을 텐데, 그의 청춘은 채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스러졌다. 아직 제 삶을 책임질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그에게 대학은 '캠퍼스의 낭만'은커녕 하루하루 버텨내야 하는 생존 투쟁의 현장이었던 거다. 

과연 그에게 대학은 무엇이고, 학창 시절 10여 년 동안의 배움은 어떤 의미였을까. '보육원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그 근본적인 질문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배움은 삶을 위한 수업'이라는데, 제 삶 하나 건사하지 못하도록 방치한 우리 교육의 무책임과 무능을 반성하는 게 먼저 아닐까.

묻는다, 학교는 제역할을 하고 있나
 
칠판과 분필.
 칠판과 분필.
ⓒ pexels

관련사진보기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과연 학교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책임지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건 '삶'이 아니라, 국·영·수로 대표되는 수험 지식이 전부다. 대입이라는 '실존적 공포' 앞에 동아리 활동과 봉사활동, 진로 탐색 활동 등의 비교과 활동도 교과 수업의 종속 변수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새삼스럽지만, 학교는 상호 협력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아니다. 오로지 끝없는 경쟁을 통해 서열을 정해야 하는 살벌한 전쟁터다. 중학교는 물론, 초등학교 역시 향후 고등학교에서의 피 말리는 등급 경쟁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 전쟁터다. 언제부턴가 '선행 학습'은 교사들조차 종용하는 교육과정의 하나가 됐다.

학교는 함께 협력해야 할 모둠활동조차 모둠 내에서 노력과 기여도에 따라 서열을 매기라고 강요한다. 같은 등급과 점수는 대입 전형에 혼선을 가져오게 되므로 어떻게든 줄을 세우라는 게 주상 같은 성적 관리 규정의 취지다. 등급과 점수를 산출해야 하는 고등학교에서 상호 협력은 불가능할뿐더러 차라리 죄다. 

무한경쟁을 통해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의 성정이 피폐해지는 건 당연지사다. 대입은 어디까지나 학교 교육의 '종착역'일 뿐, 경쟁이 끝난 건 아니다. 다시 생존을 위한 피 말리는 경쟁에 나서야 한다. 취업을 위한 학점과 자격증 취득 경쟁에서 밀리면 안 된다. 누구든 한 번 뒤처지면 따라잡기가 영영 불가능하다는 불안을 달고 살아간다. 

대입을 위해서라면 고등학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경쟁이다. 대입을 준비하며 철저히 경쟁을 내면화한 아이들에게 대학은 '제2의 고등학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공시족'이 되고, 자격증 학원에 등록하며, 전공에 상관없이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는 게 더는 낯설지 않다.

'경제적 원인'만 봐선 안 된다

하루아침에 보육원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그에게 대학이 어쩌면 '정글'은 아니었을까. 친구끼리 학점 경쟁을 벌이는 대학의 강의실은 고등학교 교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따뜻한 가족의 품이 그리웠을 그에게 꿈을 공유할 동아리도 없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선배나 친구도 없다면, 매일의 등굣길은 지옥 같았을 거다. 

더욱이 돈벌이도 없고 거주할 곳이 마땅찮았던 그에게 대학의 기숙사비는 엄청난 부담이었을 테다. 매일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그에겐 정부의 자립 지원금을 탐내는 도적처럼 느껴졌을 거라고 말한다면 억측일까. 자립 지원금의 대부분을 기숙사비로 써야 했던 그의 절박함을 과연 대학은 알고나 있었을까.

대학 새내기인 그를 죽음으로 내몬 가장 큰 이유를 경제적 어려움이라고 단정하는 건, 무능하고 무기력한 대학 교육에 면죄부를 주는 일이다. 고등교육기관이라는 본연의 역할이 사라진 대학에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그의 손을 잡아줄 교수와 친구, 선배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기업'이 된 대학은 '고객'의 죽음을 애도하고 성찰할 여유마저 없는 듯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학은 학문의 전당으로서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지만, 당장 그와 같은 안타까운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학 교육은 제 본분을 되찾아야 한다. 

교과서에서는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적고 있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지금 우리 교육이 그 명징한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지 묻기조차 민망하다. 지성인의 산실이라는 대학 교육임에랴. 삼가 고인이 된 새내기 대학생의 명복을 빈다. 

댓글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