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잡지나 이미 수명이 다 한 물건, 잊힌 사람들을 찾아 넋 놓고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궁금하고, 궁금해서 찾아볼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상한 구경기'를 시작합니다. [기자말] |
옛날 잡지를 모으다 보니 최근 발행되는 잡지와의 차이를 발견할 때가 많다. 잡지의 제호 디자인이 다르거나, 삐삐나 유선전화기 광고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여러 잡지를 구경하다가 유독 눈에 들어오는 페이지가 있었다. 잡지 사이에 빳빳한 종이로 끼워져 있는 엽서였다.
물론 잡지가 아니더라도 나에겐 엽서가 몇 장 있다. 영화 스틸컷으로 제작되었거나 미술관, 박물관에서 구입한 굿즈 성격의 엽서, 혹은 먼 여행지로 떠났던 친구들이 보내준 편지나 크리스마스카드 등이다. 이젠 어딘가에 우편으로 보내기 위해 엽서를 구매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 느껴져 그랬는지, 아주 오래전 발행된 잡지 속 엽서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1996년 5월에 발행된 '21세기 문화특급' <이매진>에도 애독자카드가 있다. 가장 좋았던 기사에 대한 의견과 다음 호에 실렸으면 하는 기사, 문화에 대해 알고 싶은 것 등 독자들의 의견을 엽서로 적극 수용한다. 매호 실리는 퀴즈에 대한 정답을 기록하면 추첨을 통해 선물을 증정하기도 한다.
여기에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에 'IMAZINE'라는 명령어를 통해 메일을 보낼 수 있었다. 엽서에 이름, 나이, 주소, 전화번호, 직업을 기재하는 칸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익명성을 확보해 의견을 건넬 수 있던 창구다.
내가 수집한 1996년 5월호 <이매진>은 '0호', 즉 '창간준비호'였다. 그럼 창간 준비호는 어떻게 '준비'되었을까? 독자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잡지의 형태,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방법 등을 예상 독자 3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다. 한 달에 지출하는 문화비나 읽는 책의 권수, 시청하는 비디오와 영화에 대한 결과가 눈에 띈다.
기자들은 예상 독자에게 질문을 건네고 그들로부터 잡지 후기가 실린 엽서가 편집부로 오길 기대하면서 창간을 준비했을 것이다.
부록 같은 콘텐츠, 애독자 엽서
기자들의 아이템에 날개를 달아주는 독자들의 생생한 의견과 더불어, 엽서 칸은 작은 광고를 실을 수 있는 코너이기도 했다. 영화잡지 <키노> 1998년 4월 독자 엽서 한쪽엔 '대한번역개발원'의 광고가 실려 있다.
비즈니스 분야의 '카다로그(카탈로그)'와 영화와 비디오 만화 등의 미디어 번역 분야의 잠재력을 알리는 동시에 실제 초벌번역가로 일하는 김은경씨를 소개한다. "앞으로 영상번역 쪽으로 계속 공부해 전문번역가가 되는 게 제 꿈이에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 엔딩크레디트 끄트머리에 구인광고를 실었다던 영화 에이전시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마 당시 <키노> 독자들 중 영화와 번역에 애정이 있었던 이들도 잡지 내용과 엽서의 광고를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읽지 않았을까?
1999년 12월, 20세기에 발행된 마지막 <스크린>의 표지는 전도연이 장식했다. '1990년대 한국 영화계가 건져 올린 커다란 수확'으로 그를 평가한 <스크린>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기 위해 독자에게 꼼꼼한 질문을 던진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국내외로 나누어 묻는 동시에 원하는 표지인물과 부록도 조사했다.
여기에 독자들은 순위에 상관없이 '20세기 최고 감독' 다섯 명을 꼽아야 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 아닌가 싶었는데, '독자 영화평' 코너에 꽉 차게 실린 <파이트 클럽> 리뷰를 보면 <스크린>의 독자들은 이런 문답을 즐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둡고 권태로우며 무기력하기만 한 세기말의 일상을 견뎌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 안에 들어있는 정신분열적인 시한폭탄의 뇌관을 죄책감 없이 들여다볼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파이트 클럽>이 갖는 최대의 매력이 아닐까."
20세기의 마지막과 21세기의 시작은 시네필들에게 강력한 논의 주제이자 글감이었던 것 같다.
잡지별로 엽서를 통해 엿볼 수 있는 트렌드가 다르다는 점도 재미있다. 1991년 9월에 발행된 <로드쇼> 독자엽서에선 팬클럽도 모집한다. 홍콩 현지의 영화사 골든웨이, 파워임팩트, 판아시아에 소속된 배우들을 응원하는 팬클럽이다. 성룡이나 왕조현, 장만옥, 유덕화 등의 배우 이름 위에 'O' 표시를 하고 회원신청 엽서를 보내면 입회비 등의 지로용지를 개별 통지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가장 읽지 않게 되는 기사는 무엇인지도 묻는다. 1997년 10월에 발행된 패션지 <쉬크>의 엽서도 이에 못지않게 대담한데, <쉬크>뿐 아니라 <쎄씨>, <휘가로>, <에꼴>의 장단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엽서를 읽는 기자들의 마음이 초조했을 것 같다. <쉬크>는 잡지사에 도착한 질문이나 예쁜 엽서를 사진으로 소개하는 동시에 가족과 친구, 연인에게 보내는 사연을 싣는 펜팔 사서함의 역할도 했다.
컴퓨터, 인터넷 관련 잡지도 오프라인 엽서를
그럼 PC와 인터넷에 대한 잡지는 어떨까? 혹시 우편 대신 온라인으로만 의견을 수집하진 않았을까? 1996년 8월호 <PC사랑>의 애독자 카드엔 잡지에 바라는 점과 함께 독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찬스! 찬스! 찬스!' 코너 신청란이 있다. 매달 독자 한 명에게 PC를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이벤트였다.
선물로 CD롬 타이틀이나 게임 소프트웨어를 증정하는 것도 엽서를 통해 추첨했다. '윈도우즈의 배경화면을 바꿨을 때 해상도와 그림이 맞지 않을 경우 해결방법' 등 퀴즈에 대한 정답을 적어 보내는 식이다. 1999년 4월호 <HOW PC>에선 하우피씨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나우누리, 유니텔, 천리안, 하이텔, 홈페이지 등 여러 채널로 기재하고, 지난호 부록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인터넷 세상을 이야기하는 잡지, <월간 천리안> 1998년 1월호의 독자 코너는 특별하다. 천리안 이용자들을 위해 종이로 출판되지만, 천리안 서비스에서 'CHNEWS'라는 명령어를 입력하면 들어갈 수 있는 페이지를 통해 의견을 접수했다.
피드백을 포함한 좋고 싫음을 SNS를 비롯한 온라인 환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지금과 비슷하고도 다르다. 내가 일하는 <빅이슈>의 경우에도 독자 엽서가 아닌 SNS 채널로 여러 피드백을 받았고, 각종 이벤트 역시 SNS를 기반으로 진행하고 있다. 구체적 문항으로 이루어진 콘텐츠에 대한 설문조사 역시 온라인으로 실시했다. 꼭 잡지를 매호 구매하지 않아도, 잡지가 전하는 메시지나 담고자 하는 기사에 공감하는 이들을 '예비 독자'로 상정하기에 가능한 시스템이다.
오프라인의 종이잡지를 인터넷 뉴스를 통해 다시 이야기하는 현재를, 과거에는 예상할 수 있었을까? 종이로밖에 만질 수 없는 애독자 엽서들의 소중하게 꽂혀 있었을 잡지 편집실의 책꽂이를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