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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귀환어선. 자료사진.
 납북귀환어선.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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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속초시 유명 콘도의 식당에서 무기 계약직으로 7년째 일하고 있는 김아무개씨는 1972년 9월 7일 귀환한 어부 중 나이 어린 선원이다. 1971년 8월 납북 당시 나이 만 13세, 귀환 당시 나이 14세였다.

김씨는 중학교 재학 시절 학생 간부직을 맡으며 항상 우수한 성적을 유지해 학교에서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그는 멀미가 심해 체질적으로 뱃일이 맞지 않았지만, 가을 수학여행 비용을 마련하고, 수학여행에서 학생 간부로서 친구들에게 한턱 쓰고 싶은 마음에 용돈을 마련하고자 오징어 배를 탔다가 납북되었다.

당시에는 선원 구하기가 어려웠고, 마침 해부호라는 오징어 배에 작은아버지와 고모부가 선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쉽게 승선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씨와의 면담 과정 중 어려웠던 것은 장소를 정하는 것이었다. 다른 납북귀환어부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일을 말하는 것에 예민한 김씨는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에 장소선정에 무척이나 민감했다.

고문피해자들과의 면담에서 면담 장소는 매우 민감한 문제다. 지금까지 만난 고문피해자들의 면담장소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었다. 먼저 자택을 선호하는 분들이 있다. 여기에는 나이가 많은 분들이나 홀로 살고 있는 분, 또는 주변과 단절되어 사는 분들이 주로 해당된다. 자택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있어서인지 면담 시간이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다.

그러나 가족이 있거나 동거인이 있다면 오히려 집보다는 밖에서 만나는 것을 선호한다. 지역도 집과는 거리가 있는 카페나 사무공간을 선호한다. 카페에서 면담하는 경우 주변 테이블에 사람이 없는 공간을 택하는 분이 대부분이다. 아무래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이 붐비고 조금은 시끄러운 공간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말이 소음에 묻히기를 바라는 경우이다. 김씨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오히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카페가 좋다고 했다.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 주변의 다른 소음으로 묻히길 원했다. 고통의 기억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해부호라는 배에 승선해 조업을 했는데 조업 나갈 때부터 멀미가 심해서 거의 선실에 누워있었어요. 조업이 끝나고 입항하던 중에 북한 배에 잡혔습니다. 귀항할 때 날씨가 너무 나빴어요. 저는 멀미 때문에 잠이 들어서 (납북 당시의) 뚜렷한 기억은 없습니다. 북한 장전에 들어가니까 날이 환하더라고요."

김씨 역시 다른 납북귀환어부들과 마찬가지로 납북된 뒤 북한에서 간단한 조사 후 평양 근처에 있는 석암휴양소라는 곳에 억류되었다. 관광이나 오락, 교양 학습 등을 받으며 길었던 억류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굴뚝같았으나 억류된 신분으로 탈출할 엄두를 쉽게 내지 못했다고 한다.
 
"같은 일행들이 있으니까 탈출 같은 생각은 못 했어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탈출하겠어요.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들어나 주나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포기상태가 되었죠. 사실 다시는 한국으로 못 나갈 줄 알았어요."

그는 귀환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기억하지 않고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편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김씨는 한국으로 귀환 후, 괴로웠던 그때의 기억을 잊어버리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했다고 했다.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던 한국, 고향 땅이었지만 그에게 귀환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의 시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어 말하는 김씨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고통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속초항에 들어오니까 항구에 중학교 친구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그 옆으로는 부모님들도 보이더라고요. 그러나 배에 내려서는 일체 접촉을 못 했어요. 지금 기억으로는 곧바로 (속초)시청으로 갔던 것 같아요. 시청 2층 회의실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인원이 꽤 많았어요. 지금 기억나는 건 회의실에 약간 턱이 높은 곳이 있었는데, 고문  받고 온 사람들이 그곳에 누워 있다가 몸이 좀 회복되면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곳으로 활용되었어요."

그 역시 다른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폭력적 조사를 받았다. 시청 건너편 여인숙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오길 반복했는데, 그가 조사받은 여인숙 방은 2~3명 정도가 누울 정도의 크기로 수사관 2~3명이 돌아가며 조사했다고 한다. 김씨가 조사받던 여인숙은 천지가 비명소리였다. 고문하며 윽박지르는 소리와 고문 받으며 고통스럽게 내지르는 비명이 섞여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다고 한다.
 
"일단 들어가면 겁을 줘요. 소리치고, 무릎 사이에 각목 같은 걸 끼우고 수사관이 허벅지로 올라타서 내리밟아요. 무릎이 빠질 듯이 아프죠. 북한에서 들었던 것, 지령받았던 것 다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수사관이 듣고 싶은 대답을 듣는 것이 목적이에요. 하루는 수사관이 '고모부하고 작은아버지가 지령받고 왔다는데 너는 왜 그런 걸 말하지 않느냐'고 해서 더 고문을 받았어요. 나중에 조사 끝나고 풀려나서는 술 한 잔 먹고 고모부한테 찾아가서 '왜 지령 받았다고 이야기했느냐'고 따져 물으니 그런 적 없다고 하셔서 오해를 푼 적도 있어요. 그전까지는 고모부 원망을 엄청 했어요."

고문을 받고 나면 여인숙에서 기어서 나와야 할 정도가 되었다. 고문받고 온 선원이 시청에 들어오면 동료 선원들이 고문받은 선원을 바닥에 눕히고 보살폈다고 한다. 그러나 더 고통스러운 것은 선원들 사이의 배신감이었다. 거짓말로 거짓말을 만들고 인정해야 하는 상황, 그것이 서로의 올가미가 되고 범죄 혐의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된 덫이 되었다.

학업 포기하고 취업

어린 나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어린 김씨가 믿고 따르던, 늘 자신의 편이 되어주던 어른들의 배신은 참으로 혼란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한다. 그 혼란스러운 감정은 기절할 때까지 받아야 했던 물고문이나 전기고문의 고통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수시로 기절했어요. 깨어나 보면 시청 회의실에 누워있더라고요.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기어서 시청으로 들어오다시피 하는 것은 수시로 봤어요. 작은아버지는 말을 못 하시는 분이에요. 그 때문인지 작은아버지는 한두 번 여인숙 조사를 받고 온 것으로 끝났어요. 덕분에 고모부하고 저하고 지령받고 왔다고 엄청 고문을 받은 거죠."

그는 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재판이 끝난 뒤 중학교로 돌아가려 했으나 학교 측에서는 학기 중이니 1년을 기다리라며 등교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더 이상 학교를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예상했다고 했다. 학기 중이라는 것은 핑계일 뿐, 그는 이미 학교에서 제적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의정부에 있는 제지회사에 입사했다.
 
"의정부에 갔는데도 정보과에서 한두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 담당 형사들이 회사로 찾아와요. 확인이죠. 내가 잘 지내나 감시하는 확인이죠. 그렇게 1년 정도 근무하다가 결국 속초로 다시 돌아왔어요. 납북된 경력 때문에 뭐라 하지는 않을까, 사찰 때문에 내가 납북되었던 사실이 알려질까 봐 불안해서 회사를 그만두고 속초로 내려왔어요. 군에서도 한두 달마다 정보 보고를 해야 했어요. 그냥 인생 자체가 감시되는 느낌이었어요."

김씨는 제대 후에 택시회사를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택시회사 역시 담당 형사가 수시로 찾아와 회사 직원들이 김씨의 납북경력을 눈치채고 말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직원들과 회식을 하던 자리에서 한 직원으로부터 '너 북에 갔다 왔냐'는 말을 듣는 순간 감정이 폭발해 다투고 말았다고 했다. 결국 택시 회사 생활도 쉽지 않았다.
 
"속초가 크지 않잖아요. 그래서 회사 다니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이 감시당하고 차별받을 수  밖에 없어요. 사회에 나와서 연애를 하려 해도 과거를 알까 봐 연예 한번 제대로 못했어요. 결혼은 꿈도 못 꿨어요. 항상 따라다니는 '빨갱이' 딱지 그게 최고 힘들었어요. 전에 동거하던 사람도 내 자신이 깨끗하지 못하니까 유흥가 여성을 택해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살다가 이혼했어요. 아이들이 커가면서 혹시나 연좌제로 피해받지 않을까 해서 걱정을 했는데 실제 공무원 시험에 몇 번씩 떨어지는 걸 보니 나 때문인가 싶어 굉장히 미안해지더라고요. 하여튼 납북됐다 와서 내 장래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좋은 쪽이 아닌 나쁜 쪽으로."

그는 아이들에게 많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김씨 자신의 과거 때문에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삐뚤어질 것 같으면 더욱 무섭게 다그쳤다고도 했다. 그런 와중에 손찌검도 했다는 그는 자식들에게 매우 미안해했다.
 
"지금껏 이 고통을 안고 살아왔다는 것이 너무 아팠고,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변할 때 이 고통을 묻어놓고 살아야 했던 것이 더욱 아파요. 학교에서 부실장 간부로 있으면서 꿈도 많았는데 그 모든 것이 납북되면서 다 무너진 것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요. 나나 아이들이 살면서 받은 많은 상처에 대해 뭔가 보답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에게 받아야 하는 보상인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 자체가 어그러진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가 하려는 재심이나 진실규명은 자신에 대한 보상과 보답이라고 했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여러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다시 일어서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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